◈247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12)
갑자기 뭐라는 거야?
‘게다가 메인 퀘스트보다 왜 서브 퀘스트 기한이 더 긴 건데?’
이제까지 옽통 심각한 일들뿐이었다.
리제가 무한 회귀자였다는 점, 남자주인공인 시몬이 세계의 오류에게 먹힌 뒤라는 것, 이 무한 회귀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몬을 죽여야 한다는 것까지.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서브 퀘스트는 정말이지, 쓰디쓴 약만 먹던 입에 갑작스레 주어진 달달한 설탕이나 다름없었다.
‘……아냐, 잠시만 내용에 주목해보자.’
앞에서 리제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척 열심히 끄덕이고는 흘끗 요정의 창을 곁눈질했다.
‘리제의 정신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속이 쓰렸다. 아니,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이미 정신이 망가졌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처참한 일들로 가득했으니까.
요정은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 존재다.
오히려 교묘하게 숨기고, 알지 못하게 다른 쪽으로 관심을 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퀘스트는 결과적으로 메인 퀘스트에 필요하기 때문에 부여되었다.
‘퀘스트에서 추측할 수 있는 건, 요정이 말했듯 리제는 한계에 다다랐고 그런 리제를 도울 수 있는 존재가 파올로라는 거네.’
왜 나는 아니야?
조금 불만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리제의 정체를 몰랐을 때 리제와 파올로 간에 연애 전선이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단 점을 알았다.
리제의 상태를 보아선 파올로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스스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럼 일단 쌍방이라는 거네?’
이런 상황에서 연결시켜 주라는 건…… 지금까지 서브 퀘스트 중에서도 매우 쉬운 축에 속했다.
나를 싫어하는 북부 사람들을 무려 세 명씩이나 주고 그들의 신뢰도를 무려 100까지 쌓으라던 서브 퀘스트도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런 쉬운 서브 퀘스트가 나온 건, 메인 퀘스트가 그만큼 어려우니 이런 보너스가 있다는 소리도 되겠지만.
뭐, 이미 메인 퀘스트 기한에서 짐작했다. 이건.
마침 리제의 이야기가 모두 끝을 맺었다.
“네 얘긴 모두 이해했어, 리제. 그럼 우린 공통의 적을 앞두고 있으니, 함께 하면 어떨까?”
사실 리제의 지난 회차 기억은 내게도 충격적이었던지라 아직도 리제가 죽어가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조금만 집중하면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너는 정말로 힘들었겠구나.
사람의 불행을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만났던 그 어떤 주인공보다 힘든 삶을 견뎌온 게 바로 리제였다.
“너도 여기까지 날 데려와 모두 이야기 한 건, 어느 정도 나를 믿는다는 소리잖아.”
[신뢰도를 재산정합니다! 회귀자 ‘리델라제’의 빙의자님을 향한 신뢰도가 공개됩니다.
신뢰도: 0 / 100]
아, 드디어……. 드디어 제로로 들어섰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란 소리였지만, 그래도 마이너스를 벗어난 게 어디인가.
나는 속으로 작게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상하지. 내 감각은 네가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의심이 들어. 널 가까이 하면 안 될 것처럼 누가 경고하는 것 같아.”
건조하게 중얼거린 리제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허공을 보았다. 누가 경고한다는 소리에 자연스럽게 요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리제에게도 쟤 같은 놈 하나 붙어있는 거 아냐?
[요정이 억울하다고 외쳐요! 요정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오직 빙의자님을 아껴요!]
‘그래, 이런 개소릴 하는 존재가 또 있으면 곤란하지.’
[요정이 억울해서 엉엉 울고 있다고 말합니다! ˚‧º·(˚ ˃̣̣̥⌓˂̣̣̥ )‧º·˚ ]
나는 요정의 창을 무시하며, 일단 리제에게 요정 같은 존재가 붙어있을 것 같단 가설은 지웠다.
“하지만 난 시간이 없어. 그놈을 반드시 죽이고 싶고, 그럴 수만 있다면 악마의 손이라도 빌릴 수 있을 지경이야.”
내 쪽을 노려보는 리제의 얼굴은, 마치 그렇다고 내 친구의 몸을 가져간 낯선 존재와는 손을 잡지 않겠다 하고 외치는 것 같았지만 이 또한 슬쩍 모른 척했다.
“나도 언제까지고 너와 입씨름을 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 증명해봐.”
“……뭘?”
“네가 정말로 내 친구 달린이라는 걸.”
나는 쓰게 웃었다.
“너도 알다시피 난 기억이 없어, 리제.”
리제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웃고 있는 것 같기도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알아, 그래서 난 이번 회차에서 참 괴롭고 한편으로는 행복했지.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해 슬프고 동시에 네가 건강해지는 모습이 참 기껍고 행복하고…….”
절절한 눈과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리제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을 때, 그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진 뒤였다.
“네가 정말 달린이라면, 이전 회차들과 다른 이유는 네가 말한 대로 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겠지?”
“맞아.”
“그럼 그걸 증명해.”
리제가 간략하게 말했다.
“네가 정말로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 할 수 있을 일을 하나 줄 테니, 그걸 해결하면 믿을게.”
“……정말이야?”
리제가 픽 웃었다.
“난 이제 굳이 거짓말은 안 해. 강해지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지거든.”
나는 나와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를 갖추던 리제를 떠올렸다.
확실히 느껴지는 힘이 어마어마했었지. 그런 힘으로도 죽지 않았던 세계의 오류는 대체…….
‘이러니 요정이 리제와 내가 협력해야 한다는 메인 퀘스트를 준 건가?’
리제가 말했다.
“내가 줄 과제는…….”
* * *
“구래서 어떻게 되었누냐?”
다음 날, 나는 이른 오전부터 날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은 다름 아닌 래빗으로, 그 덕에 난 간만에 사랑스러운 우리 황녀님 모습을 보며 절찬리 힐링 중이었다.
래빗은 가만히 앉아있었고, 나는 열심히 래빗의 머리를 묶어주고 있었다.
“앗 가만히 계셔 주세요, 이거 대칭이 비뚤어지면 안 돼요!”
“말을 하고라, 말을!”
“아앗, 삐뚤어졌어!”
래빗이 크아앙, 성질을 내기 전에 나는 서둘러 고무줄로 매듭을 짓고는 얌전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어떡하긴요,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죠. 아무래도 함께 해야 할 사이니까요.”
“……나초롬 말이더냐?”
“네, 황녀님처럼요.”
나는 래빗에게 현재 진행하고 있는 ‘계시’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설명했다.
래빗에게 리제의 무한 회귀에 대해 말을 할 순 없으니 중간 중간 핵심 내용이 빠진 내용이었지만 래빗은 어떻게든 알아들은 것 같았다.
하기야, 자신이 환생한 사실을 타인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래빗은 내가 만나는 상대마다 그런 비밀이 있더라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래빗의 이런저런 질문에 답변하는 한편 한쪽에 떠오른 요정의 창을 응시했다.
[퀘스트(서브)- ‘무한 회귀자의 부탁을 들어주자!’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가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신뢰를 얻기 위해 이를 들어줍시다!
성공적으로 수행할수록 더 좋은 보너스가 주어질지도?
내용: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과제 ‘아만티 대신전 아래 마석을 가져오기’를 완수하기
실패 시,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신뢰도 회복 불가
기한: 2일
보상: 메인 퀘스트 기한 증가,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신뢰도 30~50([email protected])
※단, 성공 시 주어지는 신뢰도의 수치는 빙의자님의 수행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리제가 과제를 주는 동시에 떠오른 서브 퀘스트였다.
서브 퀘스트가 여럿 주어진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연이어 나타난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수행 난이도가 꽤 쉬운 데 비해 보상이 모두 리제의 신뢰도를 올려 주는 것인 걸 보면…… 요정이 이래저래 나를 돕긴 하려는 모양이었다.
“쉽다고?”
“네, 이 정도면 쉬운 것 같아요.”
리제가 내게 준 과제란 간단했다.
수도 근처에는 버려진 대신전이 하나 있는데, 그 아래 지하로 내려가서 봉인되어 있는 마석을 가져와달라는 것.
그곳은 오래전부터 신을 모시던 곳이니, 신의 ‘계시’를 받은 자라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확하게는 신의 계시가 아니라 요정의 계시지만…… 일단 얘들도 신적인 존재니까 어떻게 되지 않을까?’
나는 리제의 과제를 손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쉬운 곤 조타 이고다. 근데 혼자 간댜고?”
“네. 왜요?”
“그곤 안댄다! 나랑 가치 가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퀘스트 기한이 짧다 보니 오늘 바로 다녀올 생각이었다.
래빗이 방문하는 바람에 일정이 살짝 미뤄졌지만.
나는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황녀님을 위험한 곳에 데려갔다간 저 폐하나 황태자 전하께 살해당할지도 몰라요.”
내 농담에 래빗은 찡그렸지만 아니란 말은 하지 못 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육아물 오빠와 폭군의 성격을 무시할 순 없었던 모양이었다.
“네 입우로 지굼 말하지 않았누냐, 위험하댜고.”
“아, 그건 황녀님을 데려가면 황태자 전하나 폐하의 눈에 그렇게 보일 거란 거죠. 사실 황녀님께서 근처 정원에만 가셔도…… 무슨 마계에 가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시잖아요?”
“…….”
도대체 라이칸은 지난 두 번째 메인 퀘스트 때에 어떻게 래빗을 북부에 데려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 래빗이 몰래 쫓아갔다고 했나?
“구래, 내가 가눈 곤 너룰 귀찮운 훼방꾼 때문에 너룰 방해하는 꼴이 될지 모루니 나는 포기하겠어.”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혼쟈는 안대! 둘째 놈울 데려가라!”
그렇게 래빗의 고집 덕에 나는 예상치 못하게 내 연인과 함께 오래된 대신전에 가게 됐다.
……이것도 데이트라고 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