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15)
요정이었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형체였다.
내 말을 들었는지, 눈앞에 형성된 형체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허, 자신들을 요정이라 부르길래 어떻게 생겼나 싶었더니.’
관리자, 혹은 신이라는 말을 들었다 보니 이름만 요정이지 어떤 신성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상상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형체는 동화 속 요정과 그리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게 만든 존재가 이리도 조그맣고 손에 잡힐 만한 크기밖에 안 된다니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신기하게도 눈앞의 요정의 형체는 분열하더니 처음엔 둘이 됐다가 다음에는 셋, 그 다음엔 넷으로 늘어났다.
신기한 건 이렇게 분열되자, 생긴 건 똑같이 생긴 요정들이 각기 다른 행동을 보였다는 거였다.
하나는 내게 좀 더 다가왔으며, 하나는 다른 하나의 뒤로 숨었고, 또 하나는 정신 사납게 날아다녔다.
“드디어 만났구나, 원흉.”
내 살벌한 목소리에 요정 뭉치 중 하나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요정은 빙의자님이 이 공간에 나타난 것에 매우 놀랐어요!]
눈앞으로 요정의 창이 떠올랐다. 뭐야, 이렇게 내 앞에 실재하면서 왜 말은 요정의 창으로 하는 건데?
“할 말 있으면 직접 해.”
[요정은 빙의자님에게 직접 말을 건넬 수 없다고 알려요. (σTロT)σ]
푸르른 창과 동시에 요정 넷 중 셋 정도가 둥실둥실 날아와 내 주변을 멤돌았다.
[빙의자님은 아직 이곳에 올 때가 아니라고 알립니다.]
[요정은 오래 있으면 위험하다고 알려요! ๐·°(৹˃̵﹏˂̵৹)°·๐ ]
[요정은 할 말이 있으니, 발언권을 달라고 외쳐요! 나! 나! 시켜달라고 외칩니다!]
뭐지? 요정의 창이 각기 다른 말투로 외쳤다. 아무래도 얘들끼리도 성격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그간 가끔 요정의 창 말투가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지.’
나는 위험을 외치는 사이에서 발언권을 달라고 외치는 창을 유심히 보았다. 얘들 사이에도 서열 같은 게 있는 건가?
[요정은 모두 동등하다고 외쳐요!]
[다만, 서로의 협의 하에 발언권을 가진 개체가 따로 있음을 알립니다.]
[요정은 정말 꼭 할 말이 있으니, 발언권을 달라고 두 번째로 외쳐요! 아, 왜! 왜! 한번만 시켜줘! 외칩니다!]
“너,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는 창을 유심히 보다가 마지막의 창을 고갯짓했다.
그러자 내 근처로 다가왔던 요정들이 움찔하는 것이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내가 해선 안 되는 행동을 한 것처럼.
그 모습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빙의자님의 요청으로 요정은 발언권을 얻었어요! 신난다고 외쳐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내 말이 주효했던 건가? 이리 생각하면서도 창을 응시했다.
[요정은 주요한 정보를 알립니다! ‘세계의 오류’가 ‘오염’을 이용해서 무언가 꾸미고 있음을 알려요!]
“……뭐야, 그게.”
나는 눈을 찡그렸다. 그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 수상한 방에서 나오자마자 시몬이 나타났는데 추측이 어렵겠나?
“고작 그런 당연한 이야기 하나 하려고 발언권씩이나 필요했다고?”
그러자 뒤쪽에 있던 요정이 움찔했다.
다른 요정 뒤에 숨어 있던 놈, 저놈이 발언권을 요청했던 놈인 모양이었다.
[요정이 말해요, 요, 요정이 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서……! 하고 외칩니다!]
“그럼 처음부터 발언권을 요청하지 말던가.”
[요정이 움찔합니다. 요정은 굴하지 않고 그럼 하나 더 외치겠다고 선언합니다!]
[요정이 말립니다. 우리에게 허가된 이상을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요정이 싸움 구경에 신나서 팝콘을 뜯어요! 。゚✶ฺ.ヽ(*´∀`*)ノ.✶゚ฺ。 ]
……뭐지 이 정신 나간 대화는?
그보다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눌 것이지, 왜 내가 다 볼 수 있게끔 굳이 요정의 창으로 다투는지 모를 일이었다.
[요정은 반대를 무릅쓰고 말해요! 세계의 오류는 과거 이 세계의 인간이 남긴 ‘오염’의 이용법으로 사람과 동식물을 모두 오염시키고 마침내 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
뒤로 갈수록 글자가 깨졌지만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염의 이용법?
그 순간 라이칸이 예전에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악신을 모시면서 광신도를 만드는 동시에 저런 뒤틀린 석상을 만들었다고 하더군. 저건 아마 인간이 ‘오염’되었을 때의 모습일 것이다.”
동시에 폐허가 된 대신전 지하에서 본 끔찍한 동상들.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흡사 좀비와도 같던 모습들.
등골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세계의 오류가 바라는 게 그런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라고? 멸망? 대체 왜? 그럼 그놈도 이 세계에서 더는 살 수가 없잖아.”
그러자 요정들은 왜인지 곧장 대답하는 대신에 서로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마치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할지 말지 고민하듯이.
[요정은 빙의자 님에게 왜 빙의자 님이 세계의 오류를 막아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느냐고 정중히 여쭤봅니다.]
“……뭐? 그야, 너희가 그걸 시켰으니까.”
이렇게 말하던 나는 멈칫했다.
이 모든 힌트가 모이면서 내 생각의 가지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던 탓이다.
“설마, 세계의 오류도 다른 세상에서 온 거야? 나처럼?”
[요정은 정답이라고 말해요!]
요정이 설명했다. 중간중간 글자가 끊기거나 잘렸지만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세계의 오류는 외부에서 나타난 존재로, 이 세계에서 ‘오염’을 손에 넣어 세상 전체를 망치고자 한다고.
다만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는 요정들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알고 있지만 알려주지 않는 거거나.
“그래서 오염을 퍼트리는 걸 막으라는 거야?”
[요정이 끄덕입니다! 다만, 현재 빙의자 님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어서 빨리 메인 퀘스트를 완수하는 것이라 말해요. :;(∩´﹏`∩);: ]
서둘러 리제를 동료로 삼아 리제와 협력하라고.
[요정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시간이 다가온다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실감이 나진 않았다.
겨우 시몬 한 사람이, 그 안에 있는 존재가 도대체 세상을 어떻게 망쳐버리겠다는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폐신전 아래서 보았던 그 끔찍한 것들이 이 세상에 풀린다면 실로 멸망과 가까워질 것 같기는 했다.
‘하긴, 휴고 같은 강자가 폭주해서 그 넓은 땅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보다 더 강한 미친놈이 있다고 하면…….’
나는 마침내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은 발언권을 이용해 마지막으로 조언할게요! 하고 외칩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을 어서 빨리 완성하라고, 메인 퀘스트를 완수하면 완성되며 그 후로는……$^&@## 하고 외쳐요!]
맨 뒤로 빠져있던 요정이 붕붕 몸을 흔들며 창을 띄웠다.
메인 퀘스트가 완료될 때마다 나만의 로판 기능에도 인물이 하나씩 추가됐었지?
그렇다면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끝나면 리제가 추가되는 건가?
‘그 기능이 날 오염에서 막아줬지. 완성되면 더욱 강력해진다고 생각하면 될지도.’
그때였다.
[한 요정이 불만을 가집니다.]
단조로운 요정의 창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차분하게 둥실 떠 있기만 하던 요정이었다.
그러자 나머지 세 요정이 당황한 것 같았다.
왜인지 그 요정을 막기라도 하듯 그쪽으로 달려갔으니까.
[요정이 고요하게 불만을 터트립니다. 이렇게 할 것 없이 빙의자 님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Y^]
[요정이 안 된다고 막아섭니다! ૮₍。 •᎔• 。₎ა]
[요정이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크게 호통을 칩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빛나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실눈을 뜨니, 왜인지 눈 앞으로 아주 가까이 다가온 요정이 보였다.
다 똑같이 생겼지만 저놈이 발언권을 요청했던 요정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요정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려요, 하지만 요정은 빙의자 님의 편이에요.]
망막에 글자가 떠오르듯 작지만 선명한 글자였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뭐라는 거야…… 바로 너희가 내 삶을 험난하게 만들어두고서!
* * *
눈을 다시 떴을 땐 먹구름이 낀 하늘이 보였다.
“달린! 정신이 드나?”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흐릿한 시야로 라이칸의 모습이 보였다.
“아, 라이칸…….”
기절하기 전의 장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다행이다. 마법을 제대로 썼던 것 같지.’
어디론가 이동하는 걸 보고서 기절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꿈인지 뭔지는 몰라도 요정 그놈들의 실체를 보기도 했고.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끙, 하고 일어났다.
“라이칸, 괜찮아요?”
“……난 괜찮다.”
어쩐지 대답이 한 템포 느린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좁히며 라이칸의 모습을 훑었다. 옷이 찢어지기는 했지만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느릿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저희 둘 다 다치지 않아서.”
이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여기가 어디예요? 라이칸이 저보다 먼저 일어났죠? 어딘지 알겠어요?”
라이칸이 먼저 눈을 뜬 것 같으니, 혹시 이 곳이 어딘지 대충 파악했을까?
하지만 라이칸이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네?”
“어디 깊숙한 숲이라는 사실만 알뿐. 어딘지 모르겠군.”
까칠한 우리 황자님은 이런 때조차도 신중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이토록 차분하게 조난 사실을 듣는 건 처음이라 조금 신선했다.
“……저희 데이트가 좀 험난하네요.”
“동감이다.”
내 농담에 동의한 라이칸과 내가 서로를 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일단 다친 곳이 없으니 여기가 어딘지 알아내서 돌아가면 되겠지.
‘일단 걱정은 시몬 그놈이 우리 가문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점인데.’
이를 생각하면 서둘러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이동 마법을 쓸 수 없을까 싶어 도전해봤지만, 아직 이제 막 마력이란 걸 쓰기 시작한 내게는 두 번은 무리인지 여러 차례 시도해도 잘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끙끙대는 나를 보며 라이칸이 일단 주변을 먼저 살펴보자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탐색을 함께 해보려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피?’
라이칸의 옷자락 사이에서 핏자국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