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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51화 (251/281)

◈251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16)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저건 분명 피였다!

“라이칸, 거기 서요!”

“달린?”

나는 서둘러 라이칸을 붙잡았다.

라이칸은 내 손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린 듯 빠르게 내 손목을 잡았다. 번개와 같은 속도였다.

우리는 서로를 응시하며 잠시 대치했다.

“……왜 그러지?”

“왜 그러는지 모르지 않으시잖아요.”

“별 거 아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이 남자가 이렇게 말하는 건 순도 백 퍼센트 반대인 경우일 거다.

그러나 라이칸이 힘주어 잡고 있어서 내 손이 빠지질 않았다. 내 눈이 뾰족해졌다.

“난 괜찮다.”

“래빗 황녀님이랑 황자님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바로… 안 괜찮은 걸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럼에도 라이칸이 고집스럽게 손을 놓지 않았다. 이 황소고집 같으니! 이런 건 남매가 아주 쌍으로 똑같지!

지금쯤 이곳에서 멀지 가까운지 모를 황실 속 막내 황녀님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라이칸.”

내 목소리가 차가워지자, 라이칸이 절로 흠칫했다.

“이거 놔.”

“……그대.”

“저 정말 화내는 거 보고 싶으세요?”

그러자 끙, 찡그리던 라이칸이 드디어 고집을 꺾고 손을 놓았다.

나는 황급히 그의 배 쪽을 살폈다.

이미 혈흔이 마른 지 꽤 된 건지 가장자리 부분은 검붉은 색이었지만, 중앙 부분은 붉은색이었다.

아니, 젠장! 이곳을 둘러볼 때가 아니었잖아!

“뭐해요, 당장 앉아! 않으시라고요!”

“……이럴 때는 박력이 넘치는군.”

“평온하게 그런 말 할 때예요?!”

나는 서둘러 그를 앉히고는 웃옷을 벗기자 아주 가관이었다.

피로 적셔진 부분이 예상보다도 더 컸다. 난 바지춤에서 셔츠를 꺼내고 단추를 풀어헤쳤다.

피가 말라붙은 탓에 천이 잘 떼어지지 않을 때는 라이칸이 잠시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귀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선정적이라 흠칫했지만, 여기에 신경을 쏟을 때가 아니었다.

‘……상처가 너무 커.’

쭉 찢어진 상처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을 참아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많이 뒹굴고 다친 탓인지 역하거나 거북하지는 않았다.

다만, 눈물이 나올 것 같기는 했다.

“……달린. 왜 울 것 같은 표정을.”

“안 울어요. 제가 쉽게 우는 줄 아세요?”

누가 죽진 않는 이상, 영영 못 보지 않는 이상 안 울거란 말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남은 천도 떼어냈다.

“이거, 날 지켜주다가 다친 거잖아요. 근데 제가 울면 안돼죠.”

“그대는 강인하군.”

“그래 보여요? 아니에요. 진짜 강했다면…… 라이칸을 다치지 않게 했겠죠.”

이렇게 도망갈 시간을 벌게 할 게 아니라.

누군가 다치는 건 참 보기 힘들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백 번 천 번 낫겠어.

울적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뺨에 닿더니 그대로 내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가 엄지로 내 눈가를 쓸어내렸다.

나는 축축한 손가락을 느끼고 나서야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단 걸 알아차렸다.

“……이 순간에 철없는 이야길지도 모르지만 그대가 날 위해 울어줘서 행복하다.”

“정말 철없는 소리네요.”

내가 힘없이 그의 어깨를 치자, 라이칸이 작게 웃었다.

목울대를 울리는 부드러운 소리가 어쩐지 겨울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감정을 고요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라이칸이 머뭇거리다가 상체를 숙였다. 이마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스쳤다.

“이건, 먼저 하겠다는 그거예요?”

“그래.”

“너무 건전하시네.”

“그래, 건전…… 뭐?”

“다음엔 입술로 해주세요. 더 설레게요.”

“…….”

라이칸은 지금 농담이 하고 싶냐는 황당함과 뺨에 열이 살짝 오르는 쑥스러운 기운이 반씩 섞인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끙, 신음을 흘렸다.

“일단 지혈해야 할 것 같아요. 잠시만요.”

혹시나 싶어 상처 앞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치료 마법을 쓸 수는 없나?’

발데르는 내 상처를 몇 번이나 치료해주었다.

이 정도로 큰 상처는 내가 기절했을 때 도와줬던 것 같지만.

어떻게든 마력을 써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숙련도가 낮아 내가 본 마법만 잘 쓸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시도는 헛되지 않았다. 미세하지만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연습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나는 가방을 뒤졌다. 다행스럽게도 허리춤에 찬 가방에서 붕대가 튀어나왔다. 래빗이 가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챙겨준 거였는데, 설마 정말로 쓰일 줄은 몰랐다.

‘……역시 과거 대륙을 제패한 황제님.’

이래서 사람들이 경력직, 경력직 하는 건가. 엉뚱한 생각을 지워내며 나는 붕대를 둘렀다.

“생각보다 능숙하게 잘 메는군.”

“그러게요, 저도 좀 놀라는 중이에요.”

신기하게도 나는 붕대를 능숙하게 매고 있었다.

내가 이런 걸 배운 적이 있었던가?

이 몸에 남아있는 본능이거나, 아니면…… 원래의 내가 익혔던 지식 아닐까.

감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을 봐서는 감이 틀렸던 일은 없었으니, 맞을 듯싶었다.

‘빙의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달린의 몸의 본능이 깨어났다는 것도 이상하니, 그럼 후자 쪽이 맞겠네.’

하지만 이것도 이상하긴 했다.

왜 지금에 와서 지구에서의 내가 잘 했던 일이 생각난단 말인지.

나는 붕대의 매듭을 꽈악 매고서는 손을 뗐다.

끝내고 나니 보기 좋게 잘 그을린 살갗이 보였다. 탄탄한 가슴 근육을 본 순간 잠시 숨을 참았다.

아, 내가 단추를 벗겼지?

“다 된 건가.”

“네? 아, 네. 다 됐어요.”

손을 떼면서도 아쉬움이 들었다.

……아니지. 여기서 조금, 찔러봐도 유죄는 아니지 않을까? 이제 연인이니까…….

엉큼한 생각을 하다 고개를 얼른 내저었다. 환자를 상대로 할 생각은 아니지. 암.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이 정도 상처는 그리 큰 축에 속하지 않는다. 염려 마라.”

“아, 아뇨아뇨. 상처에 대한 게 아니라…… 조금 엉큼한 생각을 해서요.”

“엉큼……?”

“네. 그런데 라이칸이 저를 변태라고 생각할까 봐 말 안 할래요.”

일어나려 하는데, 덥썩 손목이 잡혔다.

날 따라 일어나지 않은 라이칸이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반쯤 걸쳐져 있던 셔츠가 스르륵 내려가며 탄탄한 팔근육이 그대로 보였다.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궁금하다고 하면…… 이상한가?”

“뭐, 뭐, 뭐가요?”

“그대가 하려던 말.”

이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천년의 이상형이 툭 튀어나온 것 같다는 감상을 받았을 정도로, 라이칸은 내 취향의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셔츠를 스르륵 벗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그 눈에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와, 신이시여. 다시는 까불지 않겠습니다…….’

코피 날 것 같은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무늬만 검사가 아니라는 듯 라이칸은 몹시도 몸이 좋았다. 그거야, 옷태만 봐도 알고 있었지만. 안길 때 느낌도 그랬고. 왠지 목이 탔다.

“아, 안, 안 할래요.”

“달린.”

라이칸이 의도한 건지 몰라도, 그의 엄지가 손목 안쪽 여린 살을 미끄러지듯 만졌다.

이 숙맥에다 건전함의 표본 같은 남자가 알고도 만진 것 같지는 않으니 우연이겠지만.

등줄기로 야릇한 감각이 스쳤다.

“……알고 그러는 거면 진짜 나쁜 거야.”

“뭐가…….”

“여우 같은 거라고요.”

라이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반쯤 벗은 채로 그렇게 당황한 얼굴을 해봐야 이상한 상상밖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끄응 소리를 내면서 라이칸에게 잡히지 않는 손을 들어올렸다.

“한번 안겨보고 싶었어요. 라이칸요, 몸이 좋으니까 솔직히 찔러도 보고 싶, 꺅!”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단단한 허벅지에 앉아있었다.

라이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런 건 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 언제는 천천히 가자면서요? 나더러 파렴치하다더니…….”

“정정하지.”

시선이 오고 가는 시선 속 라이칸이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댔다.

그의 손이 느릿하게 허리 뒤를 쓸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 속 허리가 절로 곤두서는 기문이었다.

“파렴치한 쪽은 나인 것 같군.”

살짝 쉰 듯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천천히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마침내 숨결이 가까워지는 때였다.

툭.

“……어?”

툭. 살갗을 때리는 감각에 시선을 들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다.

비? 하필 이런 때?

어처구니없는 훼방꾼에 시선을 찡그리기도 잠시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허벅지를 깔고 앉은 남자가 환자라는 사실을 상기했으니까!

‘세상에, 내가 지금 칼빵 맞은 사람을 두고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서둘러 라이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는 날 보며 설핏 아쉬운 표정을 짓는 듯했지만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칸, 우리 어서 움직여야 돼요! 걸을 수 있어요?”

“문제없다. 붕대 덕분에 움직이기 더 수월해졌어.”

내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그 사이에도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우리는 서둘러 달려갔다. 어디든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

잠시 큰 나무 아래로 피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비가 무슨 열대 지방의 스콜처럼 미친 듯이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줄 알았다.

이런 미친, 왜 여기서 갑자기 생존기를 찍게 된 거야?

투덜거릴 시간은 없었다. 라이칸의 웃옷을 우산 삼아 좀 더 달리던 우리는 마침내 버려진 집을 하나 발견했다.

집이라기엔 작은 오두막에 가까웠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하아, 하아. 괜찮아요, 라이칸?”

“……문제없다. 그대는?”

나는 중간부터 안 되겠다 싶어 스킬을 발동했기 때문에 문제없었다.

여차하면 라이칸을 업고 뛸 생각으로 발동한 거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문제는 그렇지않아도 부상을 입은 사람이 비를 너무 많이 맞아버렸다는 거였다.

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오두막이 조금만 더 가까웠더라도…….

그나마 안심인 점은 작은 오두막이었지만 벽난로나 탁자 등 있을 것이 다 있었다.

“저기 벽난로가 있는데 사용할 수 있을까요?

“오래 방치된 것 같군. 하지만 사용할 수는 있을 거다.”

밖은 여전히 미친 것 같은 비가 퍼붓고 있었다.

땔감이 필요했지만 나갈 엄두도 낼 수 없는 날씨, 해결 방법은 집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밖에 장작 찾으러 나갈 것 없이 이걸 부수면 어떨까요?”

“좋은 것 같군. 그럼 내가-”

“뒤로 물러나세요.”

콰앙!

“…….”

라이칸은 산산조각 난 테이블이었던 조각들을 보며 할 말이 많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하지만 이런 일을 환자에게 시킬 수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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