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18)
순간 내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뭐야, 지금 정말로 라이칸이 이렇게 말한 거야?
‘나보고 파렴치하다고 하던 그 건전하디 건전한 사람이?’
물론 머리로는 이건 어쩔 수 없이 나온 얘기란 걸 알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옳은 이야기지.
비가 오고 날은 춥고 몸은 푹 젖었으며, 구조는 언제 될지 모른다. 이곳이 어딘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하는 상황.
그러니 이건 지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어디 이성적으로만 살 수 있는 동물이던가?
그래, 라이칸에게 미안하지만 저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은 엄한 상상이 시작하다 못해 단 1초 만에 폭주하고 있었다.
“…….”
우리가 시선만 마주한 채 얼마나 대치했을까.
나를 빤히 바라보던 라이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달린.”
“네?”
“……그대 얼굴이 빨개졌는데.”
“…….”
“터질 것 같다.”
……젠장, 알아요. 알아.
그렇게 직설적으로 감상해주지 않아도 안다고요.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싶더니 실제로 빨개진 모양이었다.
나는 단 한마디도 안 했지만 내 머릿속을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홱 돌리며 손 부채질을 했다.
저는 이상한 상상 안 했어요. 암, 안 했지.
예를 들면 내가 벗으면…… 댁도 벗는다던가. 크흠, 크흠, 변태 같은 상상은 하지 않았어요.
지레 찔려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벗겨도 돼요.”
“…….”
“직접 벗을까요?”
아무래도 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는 남자에게 직접 벗겨달라고 하는 건 난이도가(?) 너무 높지 않은가.
‘크흠, 물론 나는 벗겨 주는 것도 크흠흠, 나쁘지 않…….’
라이칸은 이성적으로 필요해서 한 말이겠지만 그가 직접 하기엔 무리라고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라이칸은 내 말에 고개를 돌리는 반응을 보였다. 새삼 자신의 말을 실감했다는 듯이.
그러면 그렇지.
나는 조용히 옷을 벗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혔다.
“저어, 라이칸…….”
내가 들어도 참으로 가녀리고 흐릿한 목소리였다.
내가 벗을 때까지 보지 않겠다며 매너 있게 등을 돌렸던 라이칸의 넓은 어깨가 움찔했다.
“미안한데, 단추 좀 풀어주실래요?”
이 말을 하면서 내 목소리는 절로 기어들어갔다.
아니, 편한 옷을 입는다고 입었는데, 하필이면 웃옷의 단추가 등에 달려 있었다.
‘나도 참 하녀들이 입혀 주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지…….’
이래서야 현대인의 자아가 엉엉 울 일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라이칸은 내게 양해를 구하고서 몸을 돌렸다.
“여기에요. 여기…….”
나는 그에게 등을 내보이고 숨을 죽였다.
‘와,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지?’
밖에서는 빗소리만 들렸다.
툭. 툭.
방 안에는 고요한 침묵과 함께 라이칸의 숨소리만이 메웠다.
이 분위기를 바꾸고자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입에 풀을 묻힌 것처럼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다오.”
“네에…….”
말을 하는 도중이라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진 걸까, 그의 손이 아주 살짝 살갗에 닿았다.
윽, 거칠어…….
검사인 탓에 그의 손끝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투박한 손이 살갗을 스치자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이었다. 야릇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 차려, 달린아. 저 남자는 지금 나를 도와주는 거라고.
도와주는 거다……. 도와주는 거다……!
마침내 모든 단추가 풀리고 스르륵 옷이 흘러내렸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옷이었으나 단추도 풀렸겠다, 벗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깨를 타고 내려가는 젖은 옷의 감촉에 절로 귀가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속옷도 벗어야 하나? 끙, 벗어야겠지? 그렇지. 입고 있으면 감기 걸릴 테고…….’
안쪽에는 속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젖은 옷을 하나 벗고 상쾌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속옷으로 다시 찝찝해졌기에 이번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벗을 수 있었다.
나는 젖은 옷을 벗어 내린 뒤 옆으로 내려놓고 모포로 슬쩍 가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칸은 고개를 돌린 채로, 이쪽은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꾸물꾸물하며 하의도 벗어 내렸다.
툭, 쌓인 옷들을 보며 이제 목까지 빨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으으, 라이칸 빨개지는 걸 놀릴 때가 아니었네.’
맨다리에 느껴지는 공기가 쌀쌀했다. 움츠러든 채로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하는데,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날 것 같았다. 이유는 없고 나 홀로 벗게 되었다는 기분이 묘했기 때문이었다.
“라이칸, 저만 벗어요? 당신은…….”
“그렇군.”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이 절로 커졌다.
라이칸이 나를 보지도 않고서 끄덕이더니 가장 먼저 셔츠를 벗어 떨어트렸다. 젖은 셔츠는 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안쪽에 면으로 된 옷을 하나 더 걸치고 있었는데, 딱 맞는 사이즈인 데다, 온몸에 달라붙어 커다란 근육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였다. 도드라진 흉근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응시했다.
라이칸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티를 잡더니 그대로 벗어버렸다.
조여드는 근육의 모습에서 난 눈을 떼지 못했다. 보기 좋게 그을린 살갗, 게다가 어째서인지 옷을 벗었는데 덩치가 더 커 보여서 숨을 꿀꺽 삼켰다.
‘옷에 덩치가 가려질 수도 있나? 아니면 내 눈의 착각인가.’
왜 이렇게 커 보이지. 더 취향이게끔…….
나는 속으로 있는지 모를 가상의 신들을 찾으며 중얼거렸다.
‘오 신이시여, 이러다 저 남자가 아니라 제가 짐승이 될 것 같아요. 저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
내가 열심히 짝퉁 기도를 올리는 사이, 라이칸은 제 옷을 붙잡고 가져가서는 쭉 쥐어짰다.
그가 힘을 주자 등근육이 조여들며 선명한 선을 드러냈다.
주르륵, 마치 걸레 짜듯 짠 옷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와, 등 근육 봐. 게다가 옷에서 물 흘러내리는 걸 봐. 수도꼭지인 줄.’
나는 아닌 척 흘끗흘끗 쳐다보면서 숨죽여 감상하기 바빴다. 이래서야 라이칸이 정말 파렴치한이라 매도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눈길이 가는 걸 어떡해!
‘……라이칸도 같은 기분일까?’
라이칸은 나를 보지 않고 성큼 걸어오더니 내 옷을 주워들고는 돌아섰다.
“……실례하지.”
그러고는 내 옷의 물기도 조심조심 짰다.
얼마나 비를 맞은 건지 물을 짜낸 바닥이 금방 흥건해졌다.
라이칸은 내 옷과 자신의 옷을 잘 걸어둔 뒤 다시 이쪽으로 다가왔다.
“라이칸은, 익숙하시네요.”
“……야전 전투라거나, 외부로 나가서 야영할 일이 잦았으니까.”
이 제국의 다음 주인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라이칸은 황위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의도치 않은 황위 다툼을 의식해 오래전부터 자주 국경지대나 기사단 외부 일정을 자원해서 나갔다고 했다.
때로는 야만인과의 야전이라거나 산세가 험한 상황도 있었기에 이렇게 자잘한 일에 익숙해졌다고.
‘몰랐어.’
눈을 뜨고 나서는 라이칸은 늘 황성에 있었기에 그에게 이런 경험이 많은 줄은 몰랐다.
물론 기사이기도 하기에 경험이 완전 없을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만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라이칸이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국경으로 가지 않게 된 건…… 그대를 만난 이후인 것 같군.”
살짝 그림자 진 곳에서 그가 보일 듯 말 듯 작게 웃었다.
내가 여동생, 래빗 황녀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순간부터 떠나지 않았노라고.
그건 마치, 그때부터 내게 관심이 있었다는 소리로 들려서 아닌 줄 알면서도 뺨이 조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크흠…….”
라이칸은 모포를 둘러맨 채로 멍하니 올려다본 내 시선을 의식한 것 같이 내 옆에 털썩 앉았는데, 여전히 나를 보지 못하는 채였다.
이제는 나도 이 상황에 살짝 적응이 된지라 조심스럽게 라이칸을 불렀다.
“저, 라이칸.”
“……듣고 있다.”
잠깐 사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솜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러고 있으면 춥지 않아요?”
“별로……. 춥지 않아.”
라이칸은 웃옷을 벗었을 뿐 여전히 젖은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나와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았다.
벽난로 앞쪽 자리가 좁았기에 저렇게 앉아있으면 열기도 가지 않을 것 같았다. 라이칸 뺨이 살짝 창백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옆으로 살짝 비켜났다. 그러고는 모포 한쪽을 들어 올렸다.
“이쪽으로 와요.”
“…….”
“어서요.”
라이칸의 우묵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저 쳐다보기만 했건만 푸르른 눈이 타오르는 벽난로 불티에 더욱 짙어진 것만 같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여기 있는 게 좋겠다.”
“왜요?”
“나는, 아니, 좋지 않은 생각이 들 것 같다. 달린……. 이건 그대에게 좋지 않은 일이야.”
라이칸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횡설수설했다.
그가 느끼는 기분을 알 것 같아 대답했다.
“제가 괜찮다고 한다면요?”
나와 다르지 않겠지.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나 상상 정도야 뭐.
……내가 더하면 더했을 것 같은데?
아니, 확신한다. 내가 더 엉큼한 상상을 했을 거야. 나는 이 말을 꾹 삼켰다.
불티 너머로 라이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대는 좀 더 경각심을 가지는 게 좋아. 나는…… 지금 그대에게 위험한 존재야.”
“으음, 그 짐승 이런 거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죠? 잡아먹겠다?”
내가 태연하게 쳐다본 탓인지 라이칸이 참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를 보는 것만 같아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쉽게 할 이야기가 아니야.”
그래서 나는 조금 전보다 편안하게 한 번 더 권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당신이니까.”
라이칸이 드디어 나를 다시 응시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몸을 옮겨 모포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저 내 옆에 앉을 줄 알았던 라이칸이 조심스럽게 내게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