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20)
나는 그가 깰까 봐 숨조차 천천히 내쉬면서 라이칸의 자는 얼굴을 감상했다.
곤히 잠든 얼굴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느껴졌다.
이런 얼굴이 어젯밤에는…….
‘크흠, 크흠. 그런 모습을 앞으로 나만 알게 된단 말이지?’
나만 안다. 이 문장이 주는 맛은 굉장히 달콤했다.
이 맛에 빠지면 아무것도 더는 맛보지 못할 것처럼 중독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어제, 처음엔 정중하고 끝까지 나를 배려하던 라이칸이 어느 순간 이성을 잃고 내게 허락을 구하면서 매달리던 모습이란…….
이런 말 하기 조금 그렇지만 짜릿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긴 속눈썹이 그려낸 그림자를 즐거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삐죽 솟은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건드려보기도 했다.
뺨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가 일어날까 싶어 숨죽여 구경만 했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그의 뺨에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탁.
손이 잡히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감상은 다 했나.”
잔뜩 쉬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마치 어제 일을 고스란히 기억한다는 듯이.
물론 내 몸 구석구석에는 그가 남긴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라이칸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조금 전에…….”
내가 구경하고 만지던 걸 다 알면서도 그대로 뒀다는 말이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그의 품에 머리를 비볐다.
그는 단단한 팔로 나를 안아주었는데, 그 작은 동작 하나만으로 이 남자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스럽게 여기는지 느껴져서 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라이칸, 심장이 엄청 빨리 뛰어요.”
“……당연한 일이지 않나.”
라이칸이 내 머리를 끌어당기더니 이마에 버드 키스를 남겼다.
함께 밤을 보냈건만 여전히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였다. 나는 이런 그가 싫지 않았다.
“어제 짐승같이 굴던 어느 모 황자님은 어디로 가셨나요?”
“…….”
라이칸은 할 말 없다는 듯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눈 밑이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이 아주 절경이었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의 단단한 가슴을 꾹꾹 찔렀다. 와, 단단해서 손가락이 안 들어간다. 신기하네.
라이칸이 내 손가락을 잡았다.
“힘든가?”
“음, 아뇨?”
나는 내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나른하고, 또 어느 말할 수 없는 부위에 묘한 둔통이 있긴 하지만……. 슬쩍 내려다본 이불 아래에서 열꽃이 핀 것을 본 것 같지만. 시치미를 뚝 뗐다.
어째 여기서 아프다고 하면 이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긴 했으나, 어쩐지…….
라이칸은 나를 위해서 다신 안 하겠다 맹세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섣부른 장난은 치지 않기로 했다.
“……많이, 힘들었나?”
“힘들다고 하면 앞으로 안 하시게요?”
“그거야, 당연히……!”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른 대답해주었다.
“힘들지 않았어요. 아니, 아예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음, 좋았어요. 라이칸이랑 함께였으니까.”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다가 입을 맞추거나 뺨을 비벼보기도 했다.
정답게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되어 손을 짚을 때였다.
‘……어?’
나는 힘주었던 팔에 스르륵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옷을 가져오던 라이칸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달린?”
“아하하하, 라이칸……. 어떡하죠?”
나는 라이칸의 품에 안긴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와, 세상에.
“저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
라이칸이 조용히 양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내게 사과했다.
아니, 사과할 일은 아닌데……. 쌍방이니까 음, 으음.
‘그런데 일어날 힘조차 없을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힘(?)이 좋은 거야?’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건강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온 뒤로 이렇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 또 처음이네.
“제가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고민을 해보는 건 또 처음이네요.”
“…….”
“내 남자가 너무 남자다워서 고민이라니. 이건 참…….”
“……달린, 내가 잘못했으니 부디 그만 옷을 입어주지 않겠나?”
일어날 수가 없는 탓에 나는 앉은 채로 라이칸에게 기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다행스럽게도 옷은 제대로 마른 상태였다.
게다가 어젯밤 라이칸이 몸을 닦아준 탓에 몸도 나름 뽀송뽀송한 상태라 기분이 좋았다.
내가 옷을 모두 입자, 라이칸은 공기가 꽤 차서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며 굳이 자신의 웃옷을 내게 입혔다.
입혀놓고서 미묘하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것 같지만. 본인이 더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살짝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귀여운 사람 같으니라구.
“그래도 제가 물이나 불은 만들 줄 알아서 다행이에요. 그렇죠?”
자고 올 생각이 아니었기에 우리에게 제대로 된 야영 도구는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마법으로 불이나 물은 만들어낼 수 있었기에 우리는 아침으로 라이칸이 근처에서 따온 식용 열매와 내가 끓인 따뜻한 물로 대신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사냥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라이칸은 아쉬워했다. 내게 이런 것을 먹이고 싶진 않았다면서 말이다.
난 괜찮은데 말이지. 하지만 관심이 갔다.
“사냥도 잘해요?”
“토벌 시에는 직접 잡아서 먹기도 하니까.”
나는 양손에 턱을 괴고 싱글싱글 웃었다.
“와, 그럼 하나쯤 먹여 살리는 건 문제 없겠네요?”
“푸흡, 뭐, 뭐, 뭐?”
“어라, 나라고 말 안 했는데, 왜 그리 놀라요.”
내 장난에 당한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는지 라이칸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다가 숨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대 말대로 그대 같은 사람 하나 먹여 살리는 건 문제 없을 거야.”
“…….”
“그대가 바다에 살고 싶건, 이런 한적하고 조용한 숲에 살고 싶건, 혹은 수도에 살고 싶더라도…… 모든 것은 내가 갖추고 맞추지. 그대는 몸만 와도 좋아.”
……와, 예능으로 던진 걸 다큐로 받아쳐진 기분인데, 엄청난 핵폭탄을 받은 기분이었다.
“엄…….”
“표정이 왜 그러지?”
그게, 당신이 분명 아무 말도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한 술술 답변을 들어서 놀란 표정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라이칸이 작게 피식 웃는 소리가 귀로 들렸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던지라 이 웃음 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그대가 이렇게 당황하는 때도 있군.”
“그건 좀 억울한데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땐 당황하는 건 오직 나뿐이었지 않나.
저 까칠한 얼굴에 끔뻑 넘어가서는 뭘 말하든 넷, 넵, 옛 하고 외치던 때를 잊은 건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를 이야기하며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라이칸이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목 뒤를 매만졌다. 그땐 미안했다나.
“부황께서 한창 혼인 얘기를 하실 때라 예민하던 때이긴 했지.”
“혼인이요? 황자님께요?”
“그래. 형님께서 고집스럽게 당장 안 하겠다 버티니, 나라도 먼저 보내면 좋은 영향을 줄 거라 생각하신 거지.”
오, 그럼 라이칸이 이미 누구 임자가 되었거나 유부남일 수도 있었다는 건가?
책의 내용에선 그런 게 없지 않았나 싶었지만 이미 내가 라이칸을 만났을 때 책의 내용이 모두 어그러진 상태 아니었나.
“황태자 전하께서는 왜 결혼 안하신대요?”
“권력을 벌충해주면서도 좋은 파트너가 되어 줄 여성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이 있긴 해요?”
그 인간의 음흉한 성질머리를 받아줄 사람이 있긴 할까.
황태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공녀 언니랑 어울리면 어울렸지, 물론 공녀 언니가 절대 안 받아줄 것 같지만.’
계약 연애 한번 달콤살벌하게 하던 이들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내가 이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면 나 또한 우리 오라버니인 파올로와 리제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 방법을 강구 해야 할 테니까.
“여기 와서 기어이 큐피드 노릇까지 하는구나…….”
“음? 무어라 했나?”
“아, 아니에요.”
우리는 남은 음식을 먹고 깔끔하게 치웠다.
먹은 뒤에는 잠시 밖으로 나갔는데, 나는 다리가 영 후들거려서 라이칸에 안긴 채로 나와야 했다.
솔직히 민망하긴 한데, 좋더라.
‘와, 무지개.’
라이칸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아침까지 비가 왔다더니, 곳곳에 채 가시지 않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늘에는 커다란 무지개가 떠 있었다.
이 세계에 와서 무지개를 본 적 있던가. 아니, 없었지?
‘하늘을 볼 여유나 있었나 몰라.’
나는 무지개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지개는 기적을 상징한대요.”
“어디서?”
글쎄, 어디서였더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이토록 기억이 희미한 걸 봐서는 혹시 내가 잊은 원래 세계에서 얻은 지식이나 들은 말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 무지개를 봤으니까 저희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소리 아닐까요? 길조인 거죠.”
“그런가?”
라이칸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나는 이미 기적을 겪은 것 같은데.”
“음? 정말요? 어떤 기적요? 어떤 일?”
“그대와 만나지 않았나.”
“…….”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당신,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라이칸이 나를 안은 채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귀가 새빨개지는 것이 아주 장관이었다.
“그렇게 보지 마라. ……나도 살아생전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어디서 배우셨어요? 경험하셨나…….”
“뭐?”
“아, 제가 처음이시라고 했죠? 맞죠?”
“그, 그래.”
“그럼 타고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라이칸은 나를 안고 있는지라 차마 얼굴을 쓸지는 못하고 그러고 싶다는 표정을 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나저나 우리 집으로는 어떻게 돌아가죠?”
한참 웃고 나니 정신이 조금씩 현실로 돌아왔다.
의도치 않게 시몬을 만나 잠시 현실에서 벗어난 하룻밤을 보냈지만 이젠 돌아갈 때였다.
‘오늘 돌아가지 않으면 퀘스트가 위험해…….’
나는 남은 메인 퀘스트 기한을 가늠해보며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