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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57화 (257/281)

◈257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22)

친구야, 내가 목숨을 걸고 가져왔단다.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기다리는 동안 금방 답변이 돌아왔다.

“상단주님께서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안내를 받아 리제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여긴, 지난번에도 들어왔던 곳이잖아?

창문도 작고 삭막하게 느껴지던 바로 그 공간이었다.

“들어와.”

리제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기 무섭게 문이 닫혔다. 밖에 있던 직원이 닫은 모양이었다.

리제가 앉아 있는 곳은 반쯤 그늘이 져 있어, 리제의 얼굴은 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내게 모든 표정을 드러낸 리제의 얼굴은 서늘하게만 보였다.

나를 빤히 보더니 왈칵 인상을 찌푸리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뭐, 어디 가서 전투라도 했니? 꼴이 왜 그래.”

그제야 나는 내 옷차림을 점검했다.

음, 시몬에게서 도망간다고 이동 마법을 쓴 뒤에 바닥에 한 번 굴렀지.

그 상태로 비를 푹 맞았고 말리긴 했지만 구겨진 옷을 보니, 확실히 한바탕 뒹군 모습이긴 했다.

‘어쩐지 내가 싸구려 짐마차를 타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더라니.’

여기에 얼른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차피 알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전투가 있었냐고 묻는 거라면…… 맞아. 있긴 했지.”

정확하게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라이칸이 상대한 것이지만. 자칫 목숨이 위험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 시간을 다시 떠올린 나는 리제가 그랬듯 살짝 찡그리고 말았다.

리제가 앉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푹신한 쿠션이 느껴지니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네가 전투를 했다고?”

“왜, 나한텐 어려울 것 같아?”

리제의 눈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내 친구가 어쩌다 이런 불신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었는지 잘 알기에 불쾌하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한번 생각해봤어. 네 입장에서 말이야.”

나는 진짜 달린은 아니지만 리제의 입장에서 나는 달린이다.

그리고 수없이 본, 무한 회귀를 거쳐 가며 본 ‘달린’과 나는 너무나 다를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달린’은 항상 일찍 죽었다. 안쓰러울 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리제의 기억을 지켜보던 내가 안타까움을 느낄 만큼.

“모든 시간에서 내가 아프고 힘들었다면, 네가 보는 지금의 나는 무척이나 이질적이겠지.”

“…….”

“그러니 나를 경계하고 적대적으로 여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 모두 이해 가더라.”

[신뢰도를 재산정합니다! 회귀자 ‘리델라제’의 빙의자님을 향한 신뢰도가 공개됩니다.

신뢰도: 10 / 100]

오호라? 생각지도 못한 요정의 창에 시선을 주다 눈을 슬며시 다시 옮겼다.

“바꿔 생각하면, 넌 어느 순간부터 나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겠지. 그럼에도 내게 변함없이 잘해준 시간이 있는 거야, 그렇지?”

리제가 무한 회귀를 하는 동안에 ‘달린’이 황실 유모가 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갑자기 공작의 약혼녀가 되어 북부로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리제는 늘 내 건강을 염려했고, 북부로 가는 내 손에 정체를 들킬지도 모를, 기밀까지 포함된 정보책을 내밀었다.

“나는 이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거짓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빙의자님이 놀랍게도 무한회귀자 ‘리제’의 동요를 이끌어냈어요! 신뢰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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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도: 25 / 100]

신뢰라는 건 참으로 오묘한 감정이라 사람은 맑은 물에 떨어진 단 한 방울의 잉크, 가벼운 티끌 하나만으로도 누군가를 의심하기도 한다.

반대로 조그만 단서 하나가 누군가를 대폭 신뢰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믿고 싶었지만 그간 부정해온 것에 가까울 것이다.

“네가 원하는 걸 가져왔어.”

나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네가 말한 마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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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도: 30 / 100]

리제는 나를 믿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의심이 진실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눈앞으로 계속 떠오르는 요정의 창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정말 그 마석을 가져왔다고?”

“그래, 직접 확인해봐.”

내 말이 떨어지자, 리제는 기어이 직접 주머니를 열고 확인했다.

“정말로, 진짜 마석을……. 대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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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도: 35 / 100]

혹시나 가품이라고 오해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리제는 진품임을 대번에 알아봤다.

오해하면 아무리 리제라지만 조금 서글플 뻔 했는데 말이지.

‘근데 리제는 저 마석의 존재를 어떻게 아는걸까? 진짜인 걸 알아볼 수 있다면, 마석의 존재를 이미 본 적이 있거나 알고 있었단 거잖아.’

나는 리제가 마석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한참이나 말없이 응시했다.

문득 리제가 저 마석을 어디 쓰려는지 궁금해졌다.

“틀림없는 진짜지?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리제, 그 마석은 대체 뭐야?”

“…….”

나는 이미 저 마석이 무엇인지 사이렌 오더의 기능으로 보았다.

시공간을 멈추는 기능.

과연 리제는 대체 어떻게 이 물건을 알았으며 무엇 때문에 이것이 필요한가.

‘그렇다고 시간을 오랫동안 멈출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한번 수면 위로 올라온 의문은 크기를 부풀렸다.

“넌 몰라도 돼.”

리제는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에 마석을 손에 든 채로 내가 했듯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리제였다.

“……인정할게.”

리제가 제 허벅지에 마석을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정말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걸.”

[퀘스트(서브) - ‘무한 회귀자의 부탁을 들어주자!’ 가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메인 퀘스트의 기한이 증가합니다!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신뢰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나 또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메인 퀘스트 기한이 늘어나면서 숨돌릴 시간을 얻은 것이다.

와, 다행이다. 이번엔 정말 쫄려서 죽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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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도: 75 / 100]

게다가 다른 보상인 리제의 신뢰도. 무려 40이나 증가했다. 서브 퀘스트의 보상 효과가 대단했다.

저 마석이 리제에겐 어떤 의미이길래?

‘오묘한 표정이네.’

마석을 바라보는 표정이 매우 복잡하게 보였다.

일단 신뢰도도 엄청 많이 얻었겠다, 메인 퀘스트 기한도 연장됐겠다.

내게는 아주 성공적인 여정이었다. 비록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지만 말이지.

“리제, 네가 그렇게 인정해주니 고맙긴 한데, 정말 네겐 그 마석을 들고 온 것만으로 증명이 되는 거야? 왜?”

“이것을 가져올 수 있는 방은, 신의 허락이 필요하니까.”

리제는 이것마저 숨길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말했다.

“그 방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

여기서 말하는 신은 요정이란 걸 눈치챘다.

저 물건 자체가 요정의 실수로 탄생한 거라고 했으니까.

“넌 이 물건이 거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거쳐온 시간이 얼마나 긴데 이런 것 하나 모르겠어?”

“그럼 넌 그게 어디 쓰이는지도 안다는 거네?”

리제는 나를 지그시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뢰도가 오르자 더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거나 지피고 불퉁한 표정으로 넘어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맞아. 알고 있어. 그리고 이것을 알게 된 계기는……. 그놈이야.”

리제가 이를 부득 갈았다.

“원흉?”

“그래. 시몬. 그 지옥에나 떨어질 자식.”

차분하게 말했지만 리제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흉흉함과 증오가 묻어나왔다.

“……사실 그 시몬이란 존재, 폐신전 앞에서 마주쳤어.”

“뭐?!”

리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린 그 남자에게 죽을 뻔했어. 정확히는 나와 함께 갔던 2황자님이 말이야.”

나는 폐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시몬의 공격에서 겨우 벗어나 숲속에서 노숙한 일까지.

“2황자님이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네게 마석을 건네지 못했을 거야.”

이를 털어놓으면서 리제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이끌어내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리제에게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커다란 절망과 죄책감이 엿보였다.

아니, 거대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정말이야? 너, 몸은 괜찮은 거야?”

리제가 벌떡 일어나 내 어깨를 붙들었다.

“나, 나는 네가 죽길 바라서 보낸 게…… 아니, 아니. 그놈이 이젠 네게까지…….”

“리제!”

마치 엄마를 잃은 아이 같은 리제의 모습에 나는 얼른 리제의 손을 붙잡았다.

“정신 차려! 난 괜찮아. 다치지도 않았고, 그 남자에게서는 잘 도망쳤어. 나 봐.”

“…….”

리제의 초점이 돌아왔다. 나는 가볍게 말한 걸 후회하고 반성했다.

“그보다… 나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리제, 넌 ‘오염’이 뭔지 알아?”

리제의 눈이 또 한번 흔들렸다.

순식간에 이성을 되찾은 얼굴로 리제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예전처럼 나란히 앉은 모습에 나는 익숙한 다정함을 느꼈다가 지워냈다.

“정말로 그놈을 마주친 게 분명하네. 그놈이…… 오염을 사용했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리제는 숨을 고르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놈은 이 세상을 망가트리는 힘, ‘오염’ 그 자체야.”

나도 모르게 허공을 보았다.

요정은 알고 있었을까? 리제가 ‘세계의 오류’의 본질에 거의 다가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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