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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60화 (260/281)

◈260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25)

“……무슨, 아니. 그래. 좋아한다. 좋아해. 언제부터냐니.”

“그럼 질문을 바꿔서.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거야?”

“뭐? 무슨 그런 질문을 해. 너 아까부터 이상하다?”

“그만 빨개지고 대답이나 해.”

“…….”

파올로는 탄식을 내뿜었다.

내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궁금하기는 한데, 동시에 질문이 가져다주는 설렘 같은 것들을 숨기지 못한 얼굴이었다.

“오빠도 고민했잖아. 어느 순간부터 리제가 오빠를 만나주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그거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

소처럼 큰 눈을 순박하게 끔뻑이는 눈 아래로 진한 호기심과 갈망이 느껴졌다.

“그럼 직접 물어봐.”

“뭐?”

나는 짝짝 손뼉을 치면서 생긋 웃었다.

내가 기절하면서 리제에게 파올로를 불러달라고 이야기했다고는 하지만, 그 비밀 많은 리제가 정말로 파올로에게 얘기를 했다? 그것도 모두에게 숨겨왔던 자신의 아지트에?

현재의 리제는 원작처럼 솔직하고 때로는 유쾌한 아가씨가 아니다.

자신의 진솔함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다. 행동으로, 표정으로.

나를 친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끝내 흔들림을 보이던 모습처럼.

“자리, 마련해주면 오라버니가 알아서 할 수 있지?”

“오라버니라니…… 호칭 바꿔줄래?”

내가 싱긋 웃으며 떨떠름하게 날 보는 파올로를 향했다.

“떠 먹여주는데도 못 하면 바보야. 오빠는.”

* * *

며칠 뒤.

나는 생각보다 꽤 떨어진 체력을 돌려놓는 데 집중했다.

물론 그렇다고 집에서 쉬거나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서재에 박힌 채로 ‘오염’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찾아봤으니까.

“자료가 진짜 없긴 하네…… 한때 금기시되던 단어라 그런가?”

타락한 대신관이 오염을 이용해 세상을 망칠 뻔한 전적이 있다 보니, 꽤 오랜 시간 동안 ‘오염’의 존재에 대한 건 언급조차 못 하는 금기로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야 그 금기는 없어졌으나, 단절된 시간이 있다 보니 알아내기는 쉽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달린의 부모님이 딸의 병을 치료하는데 진심이다 못해 맹목적이었다.

때로는 과거 금기시되던 도서들도 엄청나게 모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를 알아내기는 했다.

‘으윽, 인간이 오염에 물들면 질퍽거리는 형체가 된단 말이지…….’

폐신전 내에서 본 기이하고 뒤틀린 동상은 단순히 추상적인 조각도 아니었고 내가 잘못 본 것도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오염을 정화하거나 막기 위해서는 신의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보호, 정화……. 확실히 신의 힘으로 할법한 일들이긴 하네. 근데 이곳에서 신이란 결국 요정 그놈들이잖아?’

나는 ‘나만의 로판 기능’을 떠올렸다.

불완전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상태로 오염으로부터 라이칸을 보호하던 모습을.

‘허어, 휴고나 래빗에게 신의 사도라 말하고 다닌 게 허언은 아니게 되어버렸네.’

게다가 이제는 리제도 날 신의 사자로 알고 있을 테니, 오해하는 사람 하나 더 추가인가.

나는 잡생각을 떨치고 보고 있던 책에 집중했다.

“이 책 미묘하게 제법 많은 정보가 있단 말이지……?”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지만 오염에 대한 책은 몇 권 없었다.

그 몇 권 없는 책 중에서도 정보가 한 곳에 몰려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책은 의학서도 신학서도 아닌 그냥 역사서였다.

나는 책 표지를 다시 보다가 익숙한 표지라는 걸 새삼 알아보았다.

“이 책은…….”

내 눈이 커졌다.

헐, 이 책은 예전에 래빗의 전생, 로아타 황제에 대해 알아보려고 도서관을 뒤졌을 때 보았던 책이었다.

‘대륙의 역사를 자세히 열거하고 있었지만 특히나 로아타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나는 이걸로 래빗의 전생을 공부했었지?’

이게 웬 우연인지. 첫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해결하기 위해 잡고 끙끙댔던 책을 네 번째 메인 퀘스트를 위해 온 시점에서 또다시 붙들고 있었다.

‘이거 설마 요정놈의 농간 아냐?’

이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띠리링 소리가 들렸다.

[요정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해요! (*●⁰ꈊ⁰●)ノ]

흐음? 독단적이고 재수 없긴 하지만 뭘 했다면 했다고 인정은 하는 놈들이지…….

매우 재수가 없어서 그렇지. 중요하니까 한 번 더 말할 거다.

[요정은 빙의자 님의 감상에 상처를 살짝 받았다고 말해요.]

‘어쩌라고.’

나는 감회가 새로운 기분으로다가 책장을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메인 퀘스트 때 보았던 로아타 황제의 장이 다시 나왔다.

이를 꼼꼼히 읽는데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문장이 하나 보였다.

「로아타 대황 23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마수 사냥 중 나타난 기이한 힘을 보고서 펠프스의 기사들은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중략)…… 로아타 황제는 서기의 보고를 받았다. 신관이 이르길 저것은 신이 남겨둔 이 세상의 ‘찌꺼기’라고 칭하였나이다.」

“……찌꺼기?”

찌꺼기. 오염. 어감이 그리 다른 말은 아니었다.

말이 주는 느낌 또한.

「다른 신학자가 이르길 ‘오염’이라 칭하는 게 옳다 주장하였나이다. ……로아타 황제는 기사들을 뿌리치고 그 힘을 직접 목격하러 갔다. ……(중략)…… 마침내 마수에게 기인하였으며 신의 신성력을 깨트리는 이 힘을 ‘파훼’의 힘이라 칭한다. 로아타 황제가 만든 이 힘은 그가 죽기 전까지 펠프스의 자랑스러운 힘이 되었다.」

……그러니까, 래빗이 아주 오래전에 오염을 이용해 힘을 만들었다고?

‘파훼의 힘이라니, 분명 들어본 적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엠버넷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내가 가장 처음으로 만난 영혼이자, 로아타 황제의 오른팔이었던 든든한 기사님.

그녀의 특수 능력은 ‘파훼.’

그리고 지금도 내 안에 잠들어있을 영혼이었다.

[파훼의 힘을 쓰세요.]

[오래전 펠프스에 있던 힘입니다.]

위기 속에서 엠버넷이 직접 자신의 힘을 설명하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는 마수에서 기인한 힘이라길래 그냥 그런 힘이 있는가 보다 했지…….

근데 그게 사실 오염의 힘이었다고?

‘아냐,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야.’

나는 책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꾹 쥐었다.

‘이럴 게 아니라 모르겠으면 물어보면 되지.’

당사자에게 말이다.

* * *

그날 오후.

래빗이 에스테 저택에 바로 도착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실의 고귀한 신분인 막내 황녀님인 데다가 최근에 라이칸에게 사고가 있었기에 빨라도 내일 오전쯤에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황실에서 우리 황녀님을 이기는 사람은 없는 거구나.’

주렁주렁 매달고 온 호위기사들을 보고 깨달았다.

심지어 황태자도 같이 있더라.

‘네가 감히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왔다갔다 하게 해?’ 하는 듯한살벌한 얼굴인데.

래빗과 무조건 딱 붙어있어야겠군.

혹시 라이칸은 오지 않았나 싶어 살펴봤지만 이상하게도 라이칸은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나? 아니면 아직 쉬고 있는 걸까?

“어서 오세요, 황녀님!”

나는 서둘러 래빗을 도서관으로 안내했다.

“연락은 드렸지만 이렇게 바로 와주실지는 몰랐어요.”

“당욘하지. 다룬 사람도 아니구, 달린 네 일 아니도냐.”

래빗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아, 나는 이 아기 황녀님께 평생 충성해야지.

“게다가 아쥬 급한 일이라 하지 않았도냐.”

용건을 묻기 전 나는 슬쩍 물었다.

“저 혹시 라이칸 황자님은 뭐하고 계세요?”

“흐웅? 왜, 함께 오지 않아소 아쉽도냐?”

“아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래빗은 나를 빤히 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그 시선이 마치 ‘세상 모든 사람은 그래도 넌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하는 표정이라 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둘째 오뺘 그놈운 지굼 황졔가 시킨 일울 처리하누라 바뿐 것 같더구나.”

“그렇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폭군이 시킨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래빗에게 본론을 꺼냈다.

로타아 황제, 엠버넷, 그리고 파훼의 힘에 관해서. 그리고 내가 폐신전에서 본 것들까지.

“……허어?”

모든 것을 듣고 난 뒤 래빗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몸이 직접 보고 만둔 힘이, 제국울 망하게 하려눈 놈의 것과 관련이 있었다고?”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래빗이 오염을 이용한 힘을 만들었다고 탓하고자 주선한 자리가 아니었다.

‘사실 힘 자체는 문제가 없지. 그렇게 따지면 지구에서의 원자력도 사실 되게 위험한 에너지인데 인류를 위해 사용했잖아.’

중요한 건 누가 사용하느냐, 어떻게 사용하느냐였다.

로아타 황제는 ‘파훼’의 힘을 펠프스 기사들에게 가르쳤으며 이들은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그 힘을 사용했다.

그들이 멸망할 때까지.

‘내가 생각한 건 오히려 조금 다른 류의 것이란 말이지…….’

나는 일단 래빗을 진정시키고, 래빗에게 파훼의 힘을 만들던 당시의 정황이라거나 상황 등을 자세히 물어봤다.

혹시나 전생의 일이라 래빗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래빗은 아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비장함마저 느꼈던지라 조금 안타깝고 씁쓸하기도 했다.

많이 적응했지만, 여전히 이 아기 황녀님은 과거에 발을 붙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좋아지겠지. 오늘까지, 계속 더 좋아졌던 것처럼.

“그렇구나, 당시에도 오염이라 불렸다는 거죠?”

“구래, 기록에눈 여러 이룸우로 남운 모양이지만, 펠프스에서눈 대체로 오염이라 불럿따.”

“흐음…… 그렇구나. 황녀님 그럼 하나만 더요.”

“여로개 물어봐도 된다.”

“앗 감사해요. 하하하. 그럼 파훼의 힘은 마수를 상대할 때도 능히 힘을 발휘했다는 거죠?”

래빗이 끄덕였다. 내 얼굴이 진지해졌다.

“왜 구로누냐?”

“아뇨, 으음…….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이죠. 마수에게도 결국 오염이란 힘이 있었던 거잖아요? 황녀님, 아니 로아타 황제님은 마수에게서 기인한 힘으로 파훼의 힘을 만들었고, 그게 다시 오염을 가진 마수에게 잘 먹혔던 거라면.”

래빗이 다시 끄덕였다. 맑은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래빗의 설명에 따르면 파훼의 힘은 마수에게 보통 물리력이나 마법보다 더 잘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래빗 황녀님이 만든 힘은 그놈에게도 들을 것 같아서요.”

세계의 오류, 시몬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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