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27)
‘그러고 보니 래빗이 은근히 휴고를 좀 좋게 봐주는, 그런 게 있지 않았나?’
미묘하지만 그런 게 있기는 했다.
라이칸, 휴고, 발데르가 삼파전을 한창 벌일 때였다.
래빗은 나를 향해 누굴 택하든 내 선택을 지지한다며 행복해지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중 휴고를 향한 평가가 조금 후했던 것 같기도 했다.
‘흐음, 본인 오빠보다도 높게 평가할 때도 있었던 것 같단 말이지…….’
어쨌거나 래빗의 눈빛이 달라졌다.
본인은 슬그머니 숨기려 하는 것 같았지만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 봐온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대공님, 혹시 파훼의 힘이라는 걸 제가 설명하기 전에 들어본 적 있으세요?”
“음…… 그런 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펠프스 유민들이 들어오면서 특이한 힘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본 적 있습니다.”
“그런 기록도 있나요?”
“네, 아주 조그맣게요.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완벽한 대공이 되고 싶어서 역사 문건 하나하나를 달달 외우던 때가 있었거든요.”
“…….”
내가 안쓰러운 표정을 짓자, 휴고가 화들짝 놀라며 그런 때도 있었다며 얼른 변명했다.
“음, 그럼 영애는 제가 그 힘을 쓸 수 있을지 궁금하신 건가요?”
“네, 맞아요. 그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달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군요?”
“네?”
“목숨을 걸고 한번 배워볼게요. 방법은 모르지만.”
……네? 아니, 목숨을 걸 필요는.
내가 놀라 손을 저으려 하자, 휴고가 순한 미소를 지었다.
“대공, 배울 기회가 있다묜 배우겠다눈 고냐?”
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래빗이 쏙 고개를 내밀었다.
어쩐지 이분의 눈빛이 초롱초롱한 건 내 착각이 아닐 거다.
휴고도 미묘한 변화를 느낀 건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롬 내가 가르쳐 주게따!”
……저기요, 황녀님? 님의 전생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렇다면서요? 네?
나는 당황했고, 휴고는 더욱더 당황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을 것이다.
‘보통 애가 이런 소릴 하면 하하하, 애가 뭘 모르고 하는 소린가보다 하지만. 우리 황녀님은 보통 애가 아니지…….’
휴고는 이미 래빗이 범상치 않은 아이 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저렇게 무어라 답변해야 할지 모를 표정인 걸 거다.
“……제가 배우고 싶다면, 황녀님께서 가르쳐 주실 수 있는 거였습니까? 정말로?”
“그로타. 이 몸운 허툰 소리는 하지 않아.”
“대체 어떻게,”
“단.”
래빗이 쪼끄마한 검지를 휴고에게 척 내밀었다.
“이 몸이 어째서 그론 힘울 갖고 있눈 지, 어떻게 알려줄 수 있눈 지. 궁금해하지 않고, 묻지 않눈다눈 조건이다.”
평소보다 조금 들떠 보이긴 했지만 역시 전생의 황제님은 어디 가지 않았다.
래빗의 단호한 말에 휴고는 잠시 나를 보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왜일까, 시선만으로 두 사람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둘 다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서로 동질감을 느꼈나?’
휴고가 자세를 낮춰 래빗과 눈높이를 맞췄다.
“예. 묻지 않겠습니다. 달린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조아, 그 자세 조타. 내가 알려주려는 건 사람울 지키눈 힘이니까.”
[띵동! 요정은 놀랐어요! ‘나만의 로판’기능에 추가된 인물들이 서로 협력합니다!]
[‘나만의 로판’기능이 완성까지 좀 더 다가갑니다! (◦˘ З(◦’ںˉ◦)♡]
“이 몸이 친히 알려주게따.”
이렇게 말하는 래빗은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차차 현생의 행복을 찾아가는 아기 황녀님이었지만, 역시 과거의 향수를 아직 완전히 지우지 못했기 때문일까.
나는 래빗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일 테니까.
‘의외로 일이 되게 쉽게 풀렸잖아?’
파훼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할 때는 앞에서 펠프스 후손만 쓸 수 있다고 얘기했는데, 도대체 무어라 할 작정이기에 힘밍아웃을 한 건가 심장이 쿵쿵 뛰었건만.
그래도 나 말고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더니, 휴고에게는 간접적이나마 자신의 정체를 보여준 셈이 됐네.
나는 근처에 펼쳐져 있던 책을 응시했다.
말을 타고 근사하게 검을 뽑아든 황제의 삽화가 멋들어진 펜화로 그려져 있다.
대륙을 호령하던 저 황제님은 이제 시간을 뛰어넘어 펠프스의 후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인연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구나.’
지금 이 상황은 오히려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넌 내 핏줄이었다!’에 가까운 것 같지만.
뭐 어때.
나는 책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분 바로 훈련하실 거죠? 장소는 황실이나 다른 곳이 좋겠어요.”
그러자 한창 대화 중이던 두 주인공이 나를 응시했다.
이렇게 보니 거의 삼촌과 딸뻘인데, 실상 정신 나이로 치면 저 아기 황녀님 쪽이 훨씬 누님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나왔다.
“저는 지금 선약이 있거든요.”
“선약?”
“네.”
나는 손뼉을 쳤다.
“누군가의 큐피드가 되러 갈 예정이에요.”
* * *
“여긴 왜 데려온 거야?”
한 시간 뒤, 얼굴을 마주한 리제는 불만과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항상 다정하던 친구였던지라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한 한편 본래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어쩌다 이렇게 변한 걸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으음, 아니다. 원작에서도 한 성격 하는 언니였지? 이 생각은 취소.’
재밌는 건 이렇게 까칠하게 말하고 나서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본다는 점이었다.
마치 잔뜩 집을 어질러 둔 강아지가 주인의 눈치를 슬쩍 보는 것처럼.
‘이것도 신뢰도가 회복된 결과인가?’
신뢰도가 올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마석을 가져오는 퀘스트가 수치를 아주 많이 올려준 덕에 목표 신뢰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서브 퀘스트인 ‘사랑의 위대함!’, 파올로와 이어주는 퀘스트까지 달성하게 되면 신뢰도는 100을 찍을 것이었다. 끝이 보였다.
‘처음에 살벌하던 기한에 비해서는 그래도 살만해졌지.’
나는 내 눈치를 보는 리제의 팔에 모른 척 팔짱을 꼈다.
“날이 좋잖아. 날이.”
리제는 찡그리면서도 나를 내치지는 않았다.
“내 상단에서도 하늘은 충분히 볼 수 있어.”
“……이런 말 조금 그런데, 리제. 너 방금 굉장히 집순이 같은 말이었어.”
“뭐?”
아니, 그렇잖아. 사실 여기서 막 눈을 떴을 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를 붙잡아준 리제는 먼저 연회니 전시회니 나한테 권했었다고.
게다가 마탑에 데려가준 것도 바로 리제 아니었던가.
내가 짤막하게 말하자 리제가 찡그렸다.
“그때는 난, 네가 또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좋은 걸 더 많이!”
“아하, 내가 너무 좋아서 좋은 것만 더 많이 보여주고 싶었어?”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야.”
“방금 그랬잖아.”
아, 재밌다.
회귀로 인한 것인지 성격이 변한 리제는 내가 눈을 떴을 때 보았던 모습과 원작의 ‘리제’와도 다른 모습이었지만, 날 향한 애정은 내내 변함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구나. 내가 언제 죽을지 몰라서……. 지금은 괜찮을 거야. 난 죽기 싫거든.”
“…….”
“널 위해 오래오래 살게.”
“……그런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마.”
리제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동요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곳은 내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호수 공원이었다.
한동안 얌전히 걸음을 옮기던 리제는 문득 걷다 말고 움직임을 멈췄다.
“왜…… 저 사람이 저기 있는 거야?”
그도 그럴 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파올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리제가 놀란 얼굴로 설명하라는 듯 나를 보았다.
나는 살벌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긋 웃었다.
“오늘은 같이 놀자.”
리제가 참지 못하고 내 팔을 뿌리쳤다.
어두운 눈동자로 분노를 비롯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거렸다.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니?”
“파올로 경, 일부러 데려온 거잖아.”
“아, 파올로를 이름으로 불러?”
“…….”
“전엔 에스테 경이라 불렀으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꿍꿍이 같은 건 없어. 그냥 전에 연회도 함께 갈 정도의 사이였으니 오늘도 함께 놀자고 데려온 것뿐이야.”
“…….”
“그리고 꿍꿍이라면 내가 무슨 짓을 벌일 거라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오빠를 데리고?”
리제는 말간 내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면?”
“그놈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오늘 하루쯤 논다고 세상이 멸망하진 않아, 리제.”
그랬으면 요정 이놈들이 붉은색까지 띄워가며 생난리를 쳤을걸.
나는 싱글싱글 웃었다.
“네 말도 맞아. 그놈은 면밀히 주시해야 할 정도로 위험하고 나쁜 놈이야.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그놈의 목적이 너를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고, 자기 외에는 보지 못 하도록 만든 건 아닐지 말이야.”
“…….”
난 그동안 리제와 세계의 오류가 몸을 빼앗은 시몬의 관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놈은 리제가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
바꿔 말하면 그건 집착이었다.
내가 그리도 좋아하던 로판에 너무나 만연한 소재가 아주 찐득찐득하고 추악한 형태가 된 채로 나타난 거다.
“너, 대체 언제 쉬어봤어? 기억은 나?”
아니, 안 날 거다.
내가 본 네 회차의 기억 속에서 너는 항상 불안해하며 무언갈 쫓고만 있었으니까.
리제는 정말, 맹목적으로 시몬을 쫓았다.
시몬은 거기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쾌감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
실제로 세계의 오류가 리제에게 가진 감정과 리제를 이렇게 만드려는 사정은 알지 못한다.
음습한 사랑일 수도 혹은 그저 리제가 필요해서 집착하는 걸지도.
어느 쪽이든 간에 리제에게는 필요 없는 감정이다.
가해자가 행하는 폭력적인 감정은 설사 사랑일지라도 발에 치여 마땅한 쓰레기일 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쉬자.”
리제에게는 파올로가 필요하다.
그림자로 일그러진 네 삶에는 우리 오빠 같은 사람이 필요해.
“이건 비밀인데……, 파올로는 네가 보고 싶었대.”
그 말에 리제의 눈이 커졌다. 리제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건, 흡사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