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28)
리제는 입술을 그러모았다가 이내 달싹였다.
내 예상이지만 리제에게는 혀 끝까지 치민 말이 있었던 듯했다.
그러나 그 말은 끝내 언어가 되지 못했고 리제는 그저 숨을 꾹 삼켰다.
하지만 그녀가 실로 삼킨 것은 숨이 아니라 언어였을 것이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리제는 몰랐을 것이다.
이 순간에 제 눈에 어린 물기라거나 꾹 다물린 입술, 찡그려진 미간 같은 것들을.
‘으음, 이렇게 미련이 철철 넘치는 얼굴을 하면서. 계속 모른 척하기도 힘든 얼굴이라구.’
나는 모른 척 생긋 미소지었다.
“그냥, 그렇다고.”
난 리제의 팔에 다시 한번 팔짱을 꼈다.
“파올로는 분명 이렇게 말하지 못할 테니까. 나라도 말해줘야겠다 싶었을 뿐이야. 아, 말했듯 여기에 따른 꿍꿍이는 없다?”
“…….”
이렇게 말하고서 리제를 어찌저찌 설득해 파올로 앞에 멈춰 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파올로는 예상과 다른 폭탄을 던졌다.
“보, 보고 싶었습니다. 리제 양!”
……응?
며칠 전 밤 나와 둘이서 이야기 하던 중에 대체 무슨 깨달음을 얻은 건지.
파올로의 태도는 지금까지와는 달라져 있었다.
오빠의 말에 리제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홱 보았다.
‘어라.’
평소의 쑥맥 같던 인간은 어딜 가고, 빨개진 불곰, 아니 직진남이 계시대?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슬그머니 보다가 슬쩍 리제에게서 팔짱을 뺐다.
더불어 리제에게는 나는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지나번에 제 여동생을 데리러 갔을 때는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지요.”
“에스테 경,”
“리제 양께서는…… 제가 보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오, 파올로 선수. 선빵 필승. 진리의 그 단어를 여기서 실행 중인데요……!
나는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팝콘, 팝콘이 필요해……!
이런 건 본래 혼자 볼 게 아니라 친구랑 같이 보면 더욱 꿀잼인데 말이지.
함께 반응해줄 만한 친구는 래빗밖에 없으니, 이 순간 아기 황녀님이 옆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리제가 대답하는 대신 나를 자꾸 흘끔흘끔 쳐다보길래 나는 얼른 손을 들어 올렸다.
“어머나,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내가 그만 급한 약속을 잊었지 뭐야?!”
“뭐? 달린……!”
“정말 급한 약속이야, 다름 아닌 황녀님과의 약속인걸! 파올로, 오빠! 리제 잘 에스코트해줄 수 있지? 금방 올게!”
파올로가 나를 보더니 눈을 끔뻑이기 무섭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잠시일 뿐 그는 곧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부름도 아니고 황실의 부름이라면 어쩔 수 없지. 우리 가문에 불똥튀지 않게 얼른 다녀와.”
“역시, 오빠라면 이해해 줄줄 알았어!”
리제는 때아닌 남매 사기단에게 뒷통수를 맞고 얼얼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황당함과 당황이 공존하면 이런 표정일까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위해 떠납니다.
내가 정말로 자리를 비우려 들자, 리제가 놀라 나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내가 뒤로 빠지는 것이 빨랐다.
“리제, 내 말 기억하지? 오늘 만큼은 편안해져도 돼.”
“…….”
나를 향해 뻗었던 리제의 손이 아주 잠시 움츠러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얼른 돌아섰다.
뒤로 ‘달린!’ 하고 부르는 리제의 목소리가 따라붙기는 했지만,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가다가 이제쯤 됐다 싶을 때 슬쩍 돌아보자, 내 눈에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가까워진 두 남녀의 인영이 보였다.
‘뭐야, 걸어간 지 3분도 안 됐는데……. 이 정도면 기다렸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아닌가.’
나는 흐응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가만히 응시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갔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건 아마, 내가 리제의 이전 회차들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이제는, 행복해지면 좋을 텐데.’
그리고 이건 모든 일의 원흉인 세계의 오류를 제거하고 나서야 가능할 것이다.
사실 나는 리제와 같은 회귀자가 아니니 내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모든 것을 해결하고 리제도 더는 회귀하지 않게 만들겠어.’
하지만 지금은 조금 쉬어도 되겠지.
본래 큰 싸움 전에는 휴식도 필요한 법이지. 암.
나는 이제는 점처럼 작아진 두 사람을 바라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만큼은 서로만 생각해서…… 잘 됐으면 좋겠다.”
“무엇이 말입니까?”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반쯤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시야에 커다란 인영이 잡혔다.
내 위로 머리 한 통은 큰 곳에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시야에 잡혔다.
내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휴고?”
잎 그림자가 진 새하얀 얼굴에 상큼한 미소가 스몄다.
“네. 달린. 당신의 휴고에요.”
내가 멈칫했음에도 휴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당신의 친우.”
내가 아무 말도 않고 빤히 쳐다보자 휴고는 쓰게 웃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여전히 놀란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 저택에서 보았던 얼굴을 여기서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공님? 어째서 대공님께서 여기 계신 거예요.”
“……휴고라고 불러주시진 않나요? 좋았는데…….”
“아니, 시무룩해하지 마시구요, 대체 왜 이 시간에 공원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공원이었다. 리제가 파올로랑 만날 때 사람이 많은 곳을 꺼려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고른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 휴고가 있다니?
이쯤 되면 그가 나를 쫓아온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으음…… 일단은, 훈련이라고 해야 할까요?”
“훈련요?”
무슨 훈련? 되물으려던 나는 휴고의 얼굴을 보고 아차 싶었다.
휴고는 조금 전 우리 집에 있을 때와 다르게 간편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영애,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자면 저는 달린을 쫓아오지 않았어요.”
휴고의 머리에는 진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고, 머리카락 끝도 살짝 젖어 있었다.
땀이 많이 난 것 같은데 땀냄새 하나 나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바람 때문인지 상쾌한 향만이 넘어와서 알아차린 게 늦은 거기도 했다.
“……저도 대공님이 허락도 없이 절 쫓아올 만한 인물이라 생각하진 않아요. 그렇게 생각해서 여쭤본 것도 아니구요. 그런데 무슨 훈련이길래 여기서 하시는 거예요?”
많고 많은 장소를 두고 왜 하필 여기서?
그러자 휴고가 난감한 표정을 했다.
마치 자신도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곧 우리 근처로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났다.
“찾았다! 요놈요놈, 볼써 요령울 피우는 고냐?”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건 다름아닌 래빗이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경악하고 말았다.
휴고야 대공씩이나 되는 인물이니 홀로 여기 나타난 게 이상하긴 해도 그냥 기행인가 싶은 정도였다면, 호위 하나 없이 나타난 래빗의 모습은 그야말로 쇼킹 했기 때문이었다.
‘내 저택에 올 때도 엄청난 인원의 호위와 함께 오는 사람인데…….’
래빗은 오히려 나를 보고 놀란 듯했다.
“아니, 달린? 왜 요기 있눈 고냐?”
래빗의 반응을 보고, 나는 래빗은 물론 휴고가 정말로 나를 쫓아온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건 제가 묻고 싶어요, 황녀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여기 계신 거예요? 게다가 혼자? 호위는요?”
“호위 따위, 이몸이 그놈둘 10명보다도 강하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만,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요.”
“…….”
어째서인지 래빗이 답지 않게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평소라면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있는 이유를 말했을 래빗이었다. 이렇게 시선을 외면하는 건 떳떳지 못한 부분이 있단 건데…….
난 곧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 수 있었다.
“네에? 제 저택에 있는 척 휴고랑 잠시 나온 거라고요?”
아니, 왜 남의 저택에서 탈출 쇼를 펼치세요?
내가 황당한 얼굴을 하자, 래빗은 변명하듯이 적당한 시간 내에 돌아갈 예정이었다고 말을 덧붙였다.
내가 홱 고개를 돌려 휴고를 보았지만, 휴고 또한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이 사람들이 진짜.’
휴고가 래빗의 후손이라는 믿기지 않는 진실이 밝혀진 지금, 전혀 닮지 않은 것 같은 두 사람에게서 비슷한 표정을 발견한 건 내 착각일까?
“이 정도 직위를 가지신 분들이 책임감도 없이 무슨 짓이세요.”
“나눈 어린 아이다!”
이럴 때만 아이인척 하시지!
차마 휴고가 있어 내뱉지 못한 말을 눈으로 내뿜자, 래빗이 다시 한번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곧 래빗이 크흠, 헛기침하더니 진실을 토로했다.
휴고가 당장 ‘파훼의 힘’ 훈련을 시작하고 싶어 했고, 래빗 또한 꼭 가르쳐주고 싶고 할 얘기가 많다고 했다.
그런데 에스테 저택도, 황실도, 휴고의 저택도.
그 어떤 곳도 훈련 장소로는 맞지 않았다나?
그렇게 택한 장소가 래빗이 가진 이동 마법 장치로 무작정 이동한 여기란다.
계획이라곤 전혀 없는 행동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이거 완전 뒷일은 생각지도 않은 우두머리들의 결정이네.
둘 다 평생 대장으로 우뚝 살았던 탓인지, 아주 잘못했다는 얼굴들은 아니었다.
하기야, 지금까지 저 두 사람 밑에 있는 사람들은 대장의 결정에 쫓아가기 바빴지. 감히 의견을 덧붙이거나 바꾸게 할 게 아니라.
둘 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 체질이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언질이라도 하세요, 언질이라도. 호위들이 알았으면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놈둘이 아눈 건 상관없지만. 첫째 놈이 알게 되눈 건 상당히 성가시댜.”
“……그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때였다.
래빗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띠리링. 익숙한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서브)- ‘사랑의 위대함!’이 완료되었어요! ε٩( º∀º )۶з]
파올로와 리제, 두 사람을 이어주는 퀘스트가 성공했음을 알리는 창이었다.
내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