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30)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왜, 라이칸이 오염에 중독 된……. 아.
눈앞에 떠오른 건 폐신전 앞에서 라이칸이 시간을 끌기 위해 시몬을 상대했을 장면이었다.
그때 분명 ‘나만의 로판’기능이 활성화되며 라이칸을 보호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불완전한 기능이었고, 그때 오염에 당한 라이칸에게 뒤늦게 중독 증세가 나타났다는 건가?
간단한 앞뒤 정황이었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진 탓에 여기까지 정리하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달린!”
소리치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래빗이 다급한 표정으로 내 팔을 흔들며 부르고 있었다.
“괜찮운 고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따!”
“아…….”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 나 때문에요. 황녀님. 저 때문에. 저 때문에 라이칸 황자님이…….”
“무순 소리야?!”
“저 때문이에요, 어떡해요……!”
나와 함께 폐신전에 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후회로 인해 까맣게 눈앞이 점철되었다. 아득한 늪 밑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래빗은 주저앉은 내 어깨를 흔들며 나를 까만 세상에서 빠르게 끌어올렸다.
“무순 소리야, 그롬, 이전에 너룰 죽기 직전까지 만둔 것도 내 잘못이니, 나눈 네 얼굴도 보지 말아야 할까?”
“그건……!”
“달린, 무순 일인지 설명해줬우니, 나도 안다. 그로케 생각하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세상에눈 어쩔 수 없눈 것들이 있어. 그것마저 네 탓우로 돌리면 안돼.”
덜덜 떨리는 손을 누군가 붙잡아 주었다.
시선을 살짝 올리니 굳은 표정의 휴고가 보였다.
붉은 눈에는 차마 묻지 못한 듯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로케 시야를 너 스스로 가리면 해결 방법운 영영 찾울 수 없게 돼. 너눈, 나와 같운 후회를 하면 안 되지 않누냐.”
“……네.”
래빗은 아직도 얼떨떨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를 보더니, 나를 다시 향했다.
“함께 가쟈.”
래빗이 손을 이끌었고, 나는 끄덕였다.
천천히 머릿속이 선명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도 패닉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래빗의 말처럼 우왕좌왕하기만 하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세계의 오류……!’
여기 와서 누군가를 이렇게 지독하게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니, 분노만큼은 요정을 향했던 것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욱 깊었다.
* * *
황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는 훨씬 진정한 상태였다. 어느 정도 냉정하게 생각할 기력마저 되찾은 뒤였다.
‘요정의 창은 이대로 가면 라이칸이 사망할 거라고 했어.’
이대로 가면, 이라는 건 사실 해결 방안 또한 있다는 말이었다.
없다면 요정은 그저 사망 예정이라고 확정해버렸을 테니까.
다만, 시간이 없으니 기회를 놓치면 라이칸은 정말로 죽는다는 걸 경고한 거겠지.
나만의 로판 기능.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이 기능은 ‘세계의 오류’를 상대하기 위해 요정이 만들고 내게 준 능력이다.
‘나만의 로판 기능 안에 들어간 인물들은 아마도…… 세계의 오류를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꼭 필요한 인물들이란 소리일 거야.’
처음엔 주인공들만 넣는 건가 싶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라이칸은 육아물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래빗, 휴고, 지금은 곁에 없는 발데르가 주인공이었던 점에 비교해 보면 말이다.
그리고 나만의 로판 기능의 정확한 역할에 대해서는, 이번에 래빗과 휴고 사이의 진실을 알게 되며 확신이 되었다.
래빗은 오염을 상대할 수 있는 파훼의 힘을 만든 자고, 휴고는 그 힘을 배워서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 또한 제국 최강의 검사였으니…… 저 힘을 배운다면 더욱더 강력한 전력이 될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나만의 로판 기능은 게임의 캐릭터 육성 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치고는 매우 불친절했지만 말이다.
‘라이칸에 대한 죽음을 경고했으니, 분명 해결 방법에 대해서도 귀띔을 줄 거야.’
그렇지, 요정?
허공을 보았지만 답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비록 반응이 없더라도 요정이 분명 내 행동을 보고 들었을 것이며 무엇이든 실마리를 던져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쪽입니다, 황녀 전하.”
우리는 황실에 들어가자마자 황제를 마주했다. 황제는 내가 함께 온 것에 대해 의아해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내 얼굴을 보고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애는 내 아들의 연인으로서 걱정이 되었겠군.”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라이칸과 분명 교제를 시작한 건 맞지만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을 텐데? 언제 황제에게 말한 거야? 라이칸은?
상황도 아주 잠깐 잊고 당황하게 만든 말이었다.
그러나 곧 황제가 라이칸의 병실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고 다시 긴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곧이어 침실 문이 열리고, 거대한 침대가 보였다.
침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행색을 보아선 각기 의원, 마법사 그리고 신관이었다.
그 사람들이 물러나며 마침내 라이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색색, 파리한 안색으로 가쁜 숨을 내뿜고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쿵,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달라붙어 있었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던 예쁜 눈동자는 감겨있어 더는 볼 수 없었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에는 처음 보는 검은 반점이 보였다.
게다가 라이칸의 몸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검은 연기를 보았다.
……정말로 폐신전에서 보았던 ‘오염’이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발데르가 있었다면, 상황은 좀 나아졌을까?’
주변에 있던 마법사 망토를 보고서 이런 생각이 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눈 밑이 시큰거리는 것을 꾹 참으며, 함께 들어온 래빗을 향했다.
래빗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뺘의 상태눈 어떠치?”
“그, 그게……. 2황자님께는 현재 약도, 치료 마법도, 심지어 신성력도 거의 듣질 않습니다……. 그나마 가장 효력을 보이는 것이 신성력이기는 하나…….”
보고를 하던 남자가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이마저도 미미한 상태로, 2황자님의 생명력은 몹시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남자를 보며 래빗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보고를 하던 남자는 그나마 라이칸이 타고난 생명력이 몹시도 출중하여 겨우 버티는 중이라고 말했다.
죽어가고 있단 소리니, 결국 요정이 경고한 대로였다.
우리는 라이칸의 방에서 나와 논의를 시작했다.
“어떤 것 같으세요?”
“……내가 기억하눈 그대로댜.”
래빗은 침울한 얼굴로 자신이 황제일 때의 기억을 설명했다.
오염을 가진 마수에게 당한 사람에게서 라이칸과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고.
“저도 마찬가지예요. 책에서 본 것과 같아요…….”
래빗을 만나기 전에 책에서 홀로 ‘오염’에 대해 찾아봤고, 간략한 설명이긴 했지만 오염에 물든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기는 했다.
검은 반점. 연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내가 본 것과 증상이 일치했다.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쥐었다가 폈다.
‘지금도 시간이 흐르고 있어.’
나는 마침내 결심하고는 입술을 꾹 깨문 채, 허공을 응시했다.
“만약 라이칸이 죽으면, 나는 더는 임무를 하지 않겠어.”
“달린……?”
래빗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 시선은 허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대로 나도 그냥 죽어버릴 거야.”
듣고 있겠지?
세계의 오류를 향한 유일한 대항마를 잃고 싶지 않다면, 네 패를 잃고 싶지 않으면 해결 방법을 제시해. 요정.
아마 내 뜻을 전달받았음에도 허공에선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바로 그때였다.
[요정은 빙의자 님이 오른쪽을 보기를 원해요.]
간결한 그 말에 평소와 다른 말투라는 것도 잊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아, 다, 달린?”
놀랍게도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어째서 여기 있는 건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리제?”
리제가 그곳에 서 있었으니까.
“네가 여기 어떻게?”
분명 호수 공원에서 파올로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적어도 오늘 반나절 정도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리제는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느냐는 내 의문을 알아차린 듯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정이 있었어.”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리제는 이내 말을 이었다.
“쓰러지신 것이 2황자님이시지? 내 아버지는…… 그분을 지지하는 세력이야.”
황태자의 자리가 굳건하기에 대부분의 귀족은 황태자를 지지했지만, 황제며 황태자며 황권이 이 이상 강해지길 바라지 않은 귀족들 중에선 꾸준히 2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나온다고 들었다.
‘이들의 목적은 단순히 라이칸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황자들 간에 갈등을 부추기는 게 목적이라고…… 라이칸에게 들은 적 있는데.’
그들 중에 트리샤 후작이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리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이상해.’
원작에서 리제와 트리샤 후작은 애증의 부녀 관계지만, 리제는 이미 수없이 많은 회귀를 거치며 가족애란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회차 속에서 리제가 미련을 가진 인물은 달린, 그리고 파올로 정도였다.
‘그러니, 부친이 이 자리에 오든, 설사 리제에게 강요했다고 한들 움직일 사람이 아닐 텐데?’
아, 설마……!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난 눈을 크게 떴다.
리제는 내 뒤쪽 먼 복도를 보는가 싶더니,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달린, 할 이야기가 있어. 둘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니? 조용한 곳에서.”
나는 허공을 한번 보았다.
이 자리에 절대로 나타날 리 없는 리제의 모습. 그리고 오염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리제의 존재.
……그래, 요정. 이것이 바로 네가 나한테 준 안배구나?
“응, 당연히 가능해.”
나는 침착하게 끄덕였다.
“여기 있는 래빗 황녀님도 함께 들을 거야.”
난, 라이칸을 반드시 살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