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31)
“……황녀님께서 함께 들으실 거라고?”
리제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래빗이 앞에 있다 보니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응.”
나는 래빗을 한번 보았다가, 다음엔 라이칸의 방 쪽을 보았다.
“네가 말하려는 게…… ‘오염’ 관련한 이야기지?”
숨죽여 속삭인 목소리에 리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역시. 다시 한번 리제의 등장이 요정의 안배임을 깨달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실마리가 등장한다는 것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모처럼 푹 쉬라고 파올로랑 오붓한 시간을 보냈으면 했건만 리제가 결국 여기로 온 것에 아쉬움과 미안함도 있었다.
‘그래, 래빗의 말처럼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야. 굳이 찾자면 시몬, 그놈이 잘못한 거지.’
그놈은 기어이 내 독기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황녀님도 같이 들어도 괜찮아. 이분도…… 알고 계시니까.”
말을 건네며 난 래빗의 눈을 보았다. 래빗이 천천히 끄덕였다.
‘괜찮을까?’
리제의 신뢰도는 99, 사실 이 숫자를 믿고 질러본 것이기도 했다.
리제는 무한 회귀로 인해 모든 사람을 불신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내 입술로 자그마한 미소가 스쳤다.
씁쓸한 웃음이기도 했다.
“그래, 고마워.”
장소를 옮기려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인영을 보고 다시 한번 쓴웃음을 머금었다.
“리제, 미안한데 한 사람 더 추가해도 괜찮지?”
* * *
잠시 뒤, 우리가 모인 장소는 래빗의 방이었다.
‘아무래도…… 이 황성에서 사람도 적고 듣는 귀도 없는 장소를 꼽자면 여기가 좋긴 하지.’
래빗은 가족들이랑 가까워지면서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자기 성에 일정 숫자 이상의 시종과 하녀를 두는 걸 싫어했다. 번잡하고 필요 없는 것 같다나.
‘워낙 기감이 뛰어나다 보니 오히려 사람이 적은 곳에서 안정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지.’
우리는 각기 자리에 앉은 채 말이 없었다.
래빗과 리제는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고, 휴고는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에 괜찮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어주고는 리제를 응시했다.
“이제 이야기해줘. 리제. 괜찮으니까.”
나는 옆에 있는 래빗과 휴고를 보았다.
“두 사람 다 모두 들어도 괜찮아. 네가 이야기해줄 수 있는 부분까지 얘기해줘.”
래빗이 자신의 전생을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리제 또한 자신의 회귀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부분까지란 건 이런 걸 의미했다.
“…….”
이렇게 말했음에도 리제는 한참이나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네가 아닌 사람이 똑같은 소리를 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아하하…….”
리제는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말을 이었다.
“아버지를 통해서 2황자님의 증상 들었어. 그건 분명 오염에 피해를 입은 거야.”
“……응.”
내가 천천히 끄덕이자, 리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그러했듯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날 향한 시선에 죄책감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이미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있고 여기 있는 황녀님이랑 대공님도 알고 계셔. 내가 궁금한 건…… 리제 넌 혹시 오염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어? 아니, 방법을 알고 있는지도 궁금해.”
“……대체, 저 어린 황녀님은 무슨. 아니, 그래. 맞아. 난 알고 있어.”
리제는 잠시 래빗을 보다가 아무리 봐도 조그마한 황녀님이 애 여기 있는 것인지 큰 의문이 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고개를 돌리면서 내게 대답했다.
“하지만 역시 내가 먼저 들어야겠어. 대체 왜 저 두 사람이 여기에 함께 있어야 하는지.”
리제의 단호한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끄덕였다.
리제 입장에서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래빗에게서 암묵적인 동의도 받았으니까.
‘게다가 리제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나만의 로판 기능으로 묶여 있으니, 앞으로 협력해야 할 일이 분명 있을 거란 소리야.“
어쩌면 리제 또한 메인 퀘스트가 끝나면 이 기능에 추가될 것이다.
아니, 그럴 것 같았다. 확신에 가까운 감이었다.
“미리 이야기해 두자면 이쪽은 오염을 막을 힘을 갖고 있어. 그래서 함께 참여한 거야. 혹시…… 파훼의 힘이라고 들어봤어? 자세한 건 설명할 수 없지만 여기 있는 두 사람은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어.”
내가 간략하게 말하자, 리제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혼란이 어린 표정이었다.
“들어본 적 있어……. 하지만 그 힘은.”
“리제.”
나는 고개를 더 저었다.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듯이.
대신에 ‘너에게도 하나쯤 숨기고 싶은 것이 있잖아?’ 이와 같은 시선을 건네자 리제가 입을 다물었다.
“리제, 나는 지금 원하는 것이 명확해. 오염으로 쓰러지신 2황자님, 살릴 방도가 있을까?”
이 순간에도 라이칸은 죽어간다. 나는 손을 꽈악 쥐었다.
나를 바라보던 리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단순히 가까이 지내던 분이 아픈 걸 걱정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네.”
“맞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리제 또한 세 번째 메인 퀘스트로 인해 수도에 파다한 내 소문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땐 헤벤 공녀와 시간을 보내느라 거의 보지 못했으니.
“나는 절대 그 사람이 죽게 두지 않아. 아니, 절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내가 소문으로 엮인 세 남자 중에 한 사람과 연인이 되었다는, 진실 또한 알지 못할 터였다.
“……넌, 변했구나.”
리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거의 넌, 아무것에도 미련을 가지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신경을 쓴다고?”
“무슨 소리…….”
“난 알아. 너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그런 나조차 네가 스스로 더 살고 싶다 바라게 만드는 동기는 되지 못 했어!”
리제가 벌떡 일어났다.
‘아. 이건……. 내가 아닌 ‘달린’의 이야기구나.’
이상했다.
내가 리제의 회차에서 보았던 ‘달린’의 모습은 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달린’의 무엇이 리제에게 이렇게 비춰졌던 걸까?
‘확실히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하는 걸 아는 사람처럼 보이긴 했어.’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자주 아픈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역치가 낮아져서 쉽고 빠르게 체념하는 경향이 있다고.
달린은 어린 시절부터 아픈 데다 시한부였다고 했으니,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부터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때, 에스테 가문의 가족들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곤 했으니까.
‘내가 뭘 하든 아프니까, 어쩔 수 없지 하는 분위기가 만연했었지.’
리제는 다시 한번 낯선 이를 바라보듯이 나를 보았다.
“나는 가족도, 친구도 세상의 그 무엇도 네게 미련이 되지 못했다는 걸 알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겠지! 무수하게 많이 봤으니까!”
리제가 차마 하지 못한 말 뒤에는 ‘네 죽음을.’ 하는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신의 계시를 받았댔지. 그래, 이해했어. 납득도 했어. 그런데 고작 그것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변한다고? 난, 믿기지 않아.”
“리제.”
나는 리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었다.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나한테는 시간이 없어.”
“뭐?”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 리제. 이것보다 중요한 게 또 있니?”
“…….”
“나는, 내게 소중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그건 설사 여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라이칸이 아니라 너였더라도 내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거야.”
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변했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리제, 나는 건강해졌어. 일어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이런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
“부탁이야, 리제. 얼른 방법을 말해줘. 나는…… 정말로 내가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
라이칸을 잃는다면, 나는 이번에야말로 지쳐서 모든 걸 놔버리고 싶을지도 모르거든.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 같지만, 나는 이미 한계였다.
그동안 무수한 위기를 거쳐왔다.
보이지 않게 닳고 닳아버린 신경줄. 아주 얇은 실 하나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리제는 내 말이 끝난 뒤에도 나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리제 외에도 다른 두 사람의 시선 또한 느껴졌지만 나는 꼿꼿하게 오직 앞만을 향했다.
“……그래, 네 말대로 정말로 이번 시간에서야말로. 변했구나. 많은 것이.”
리제의 얼굴이 끝내 흐려졌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많은 것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리제의 얼굴에서 혼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곧 내가 알던 명료한 표정이 자리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래 오염에 당한 사람은 무조건 죽어.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어.”
그 말에 옆에 있던 래빗이 움찔했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물었다.
“‘없었다’라는 건 지금은 있다는 거지?”
“……맞아. 몇 번이나 시행착오 끝에 발견한 거지만. 나는 알고 있어. 오염에 당한 사람을 구할 방법.”
리제가 이를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쳤을까 안타까움이 스쳤지만 잠시뿐이었다.
“참 우습게도…… 모든 독과 약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말을 알아?”
“뭐……? 설마…….”
“그래.”
리제가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네가 갔던 폐신전을 기억해? 그곳엔 오염이 봉인된 동시에, 오염에 당한 사람을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놀랍게도 리제는 폐신전에 있던 동상을 언급했다.
정확히는 내가 라이칸과 보면서 놀랐던, 오염에 당한 인간을 표현했다는 그 조각상을.
“그 조각상의 일부를 가져와. 잘라서 가져오든 부숴서 가져오든 다 좋아.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