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32)
그렇게 말하는 리제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사실 아주 잠깐 동안 대체 그 폐신전의 석상이 무슨 역할을 하길래 그걸 들고 오라는 것인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 생각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상황이 너무 급했다.
“지금 당장 갈게.”
내가 치마를 부여잡고 당장이라도 나서려고 하자, 두 사람이 나를 막아섰다.
“잠시만요, 영애. 준비를, 준비라도 하고 가세요……!”
“구래, 달린. 진정해라. 다굽한 마움은 알겠찌만 이럴수록 네가 정신울 차려야지!”
그제야 나는 두 사람에게 붙잡힌 손을 보았고, 가늘게 떨리는 떨림을 느꼈다.
나는 한차례 심호흡한 뒤에 천천히 끄덕였다.
“응, 그럴게요.”
* * *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더욱 그러했다.
2황자인 라이칸이 위독한 탓에 황성은 그야말로 전시에 준하는 경계 태세였다.
나는 몰랐지만, 라이칸이 폐신전에 다녀온 뒤 그곳에서 만났던 시몬과 오염에 대한 경고를 강력하게 설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시몬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를 상황이니 현명한 대처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라이칸이 쓰러진 탓에 오염에 대비하자는 그의 주장은 더욱더 힘을 얻게 되었다.
“폐하께서 대공님께도 명을 내린 이유가 있었네요.”
“예.”
시몬이 혹시라도 다시 나타날 것을 대비해 휴고와 래빗이 함께 하기로 했다.
사실 래빗의 합류에 대해선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몰래 빠져나오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라이칸이 쓰러지고 래빗의 호위가 아주 잠시 어수선한 틈을 노린 결과였다.
물론 나는 말렸지만 우리 아기 황녀님이 대륙 황제의 기상을 꺼내서 고집을 부리는 데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럴 정신도 없었단 말이 맞겠다.
“저기가 폐신전이로군요.”
“네, 맞아요.”
휴고에게 안겨 있던 래빗이 빤히 쳐다보더니, 확실히 기분 나쁜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럼 약속대로 이곳은 내가 지키겠습니다.”
입구에 멈춘 휴고가 래빗을 내려주었다.
폐신전에 다시 온 사유가 극비인 탓에 인원은 셋이 전부였다.
사실 나를 포함한 이 셋은 제국에서 제일 강한 사람 둘 그리고 강한 이의 힘을 스킬로 쓸 수 있는 사람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일당백의 파티였다.
“대공님, 미리 말씀드렸지만, 붙으면 반드시…….”
“상대하는 척하다 자리를 피하란 말씀이시지요? 염려마세요, 달린.”
“…….”
“나는 달린이 열 번을 혹은 스무 번을 말해도 언제나 경청할 테지만 시간이 없으니 제가 잘 되새기겠습니다.”
나는 굳은 얼굴로 끄덕이고는 래빗과 함께 폐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폐신전 입구에서 시몬이 나타났던 만큼 불안이 앞섰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둠 속으로 진입했을 때 나는 함께 있는 래빗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황녀님? 대공님께서는 이제 막 ‘파훼’의 힘을 배우기 시작하신 거잖아요.”
“괜찬댜.”
생각보다 래빗은 덤덤했다.
휴고에게서 자신의 핏줄을 발견하고서 더 신경을 쓸 거라 생각했는데, 위험을 앞두고 외려 자신의 핏줄을 더 믿는 눈치였다.
“파훼의 힘운, 감각이다. 힘울 느끼눈 감각만 깨우치면 그 다움운 얼마든지 쓸 수 이따.”
그리고 휴고는 이미 짧은 가르침으로도 깨달은 것이 있으니, 걱정할게 없을 거라 말했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래빗이 그렇다니 일단 그렇게 알기로 했다.
‘내가 더 집중해서 빠르게 가져오면 돼.’
이미 아는 길이다보니 빠르게 들어가 바로 석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곤가?”
“네, 맞아요. 황녀님 혹시 이런 석상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업땨. 내가 황제일 쩍에눈 오염에 물둔 인간운 삽시간에 죽어찌, 이렇게 괴물이 되지눈 않아써.”
“그렇군요.”
래빗이 검을 들었고, 놀랍게도 아주 간단하게 돌을 잘라냈다.
나는 새삼스럽게 이 아기 황녀님의 무력에 감탄하며 돌을 챙겼다.
여기까진 수월했다. 다행이었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돼.’
그러나 역시나 만만치 않은 일이었던 걸까.
나는 돌아선 순간, 등을 찌르는 감각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래빗이 검을 들었고, 내 마력이 나보다 먼저 반응했다.
카아앙!
“이야, 감이 좋은데.”
어둠 속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그림자 사이에서 홱 번개 같은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 공격은 래빗이 휘두른 검에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날 어떻게 눈치챈거지?”
바닥을 뒹구는 건 평범한 돌멩이였다.
그러나 곧 돌멩이에서 라이칸에게서 보았던 것과 같은 자욱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오염을 튕겨내는 힘이라. 넌 대체 뭐지?”
어둠 사이에서 시몬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흑표범과도 같이 길고 날렵한 실루엣이었다. 그래 봐야, 남의 몸을 빼앗은 자였지만.
어쩌면 저놈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은 여기 오기로 결정할 때부터 각오했다.
내가 집중한 건 다른 쪽이었다.
‘파훼의 힘을 몰라?’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 그렇군. ‘주인공’인가.”
시몬의 잘생긴 얼굴이 가는 웃음을 만들었다.
새까만 털을 가진 여우 혹은 까만 비늘을 가진 뱀이 연상되는 듯한 미소였다.
“기억에 있어……. 넌 신전과 관련된 이야기의 주인공이군.”
극중극이라는 말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소설 속에 있단 사실을 모른다.
래빗 또한 마찬가지일 터, 아기 황녀님 쪽을 돌아봤지만 그녀는 무덤덤하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모래는 거야, 시커먼 놈이.”
래빗이 툭툭 검을 흔들었다.
“그롬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지, 너겠누냐? 미친놈아.”
……으음, 우리 황녀님 욕 끊기로 하셨는데.
저 XX 때문에 불량한 성격이 다시 불끈하신 모양이었다.
“하, 하하하하. 재미난 주인공인데? 난 좋아해, 그런 얼굴을 망치고, 주변 인물부터 차차 죽여, 절망에 빠지는 얼굴도.”
시몬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미친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에 집중하는 대신 래빗을 흘끗 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다시 온 이유가 뭐야? 조사? 아니면 여기에 있는 보물을 찾으러? 이미 가장 중요한 건 쏙 가져가 놓고서는?”
고요한 공동에 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래빗은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 됐어. 네가 가져간 보물은…… 정말 탐이 났는데, 그놈의 신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해서 기회만 엿봤는데 말이지. 아니, 너라면 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나, ‘요정’이란 이름을?”
“…….”
이놈, 계속 말하는 척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떠보려 하고 있다.
공격할 수 있음에도 처음 한 번 이후로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증거였다.
나는 긴장한 척 입을 열었다. 뒷짐진 손은 전혀 보이지 않는 채였다.
“혹시, 그놈을 마주하게 된다면, 절대 네가 석상을 가져가려 한다는 걸 들키지 마.”
시간이 없던 탓에 자세한 이야기 대신 주요한 경고만 들었다.
리제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넌, 대체 목적이 뭐야.”
내 말에 재잘재잘 떠들던 목소리가 딱 그쳤다.
생각해보면 저놈의 본체와 온전히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자 세계의 오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찢으며 미소했다.
미형의 얼굴에서 나오기 힘든 기괴한 표정이었다.
“알고 있잖아? 요정이 알려줬잖아? 이, 세상의 멸망, 신의 추락!”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오염을 이용한 위대한 멸망.”
세계의 오류가 웃을 뿐 제대로 대답하지 않자, 나는 다른 주제를 꺼냈다.
“넌 대체 왜 리제에게 집착하는 거지?”
리제의 이름이 나오자 시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곧 세계의 오류의 얼굴로 황홀한 미소가 스쳤다.
……정말이지, 선을 넘어버린 자의 광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얼굴을 하고서.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으니까. 절망, 그녀가 한없이 추락해 절망했으면 좋겠어! 나락으로 떨어져 내 곁만이 유일한 안식처가 될 때까지!”
질척하고도 음습한 집착이 느껴지는 말에 목 뒤가 욱신거릴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잠시지만, 대화를 시도한 걸 후회할 정도였다.
“그래, 알겠어. 대답할 생각도 대화할 생각도 없는 거구나?”
세계의 오류가 나를 빤히 보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한발 뒤로 뺐다. 누가 보아도 전투를 준비하는 자의 자세였다.
동시에 래빗 또한 검을 들어 올렸다.
내가 손을 흔들자, 손에서 하얀빛이 치솟는 것과 함께 지팡이가 쥐여졌다.
발데르가 생전에 쓰던 지팡이였다.
‘아무래도 발데르의 능력은 위기 속에서 쓸수록 더 정확하고 성공률이 높은 것 같은데.’
절박함 속에서 더 잘된다고 할지.
어쩌면 내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마력을 건넸던 발데르의 소원이 영향을 미친 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마력이니까.
“하하하하, 여기서 결판을 보는 거야? 좋지, 좋아! 네가 거슬려, 아주 거슬리니까. 신에게 선택받은 자, 요정이 선택한 자!”
틀린 호칭은 아니지만, 참으로 거슬리는 호칭이네.
나라고 원해서 선택받은 줄 알아?
지팡이를 꾸욱 쥐었다.
그때였다.
쾅!
“달린!”
래빗이 검을 날리고, 검격에 우수수 무너진 기둥 하나가 세계의 오류가 있던 곳을 덮쳤다.
세계의 오류는 순간 당황하며 피했지만 나는 이를 놓치지 않고 지팡이를 겨눴다.
퍼엉!
거대한 빛덩어리가 세계의 오류를 향해 쏘아진 것과 동시에 넓게 퍼지더니, 밧줄처럼 세계의 오류의 몸을 꽁꽁 잡아챘다.
아니, 그건 사슬이었다.
한순간이지만 꽁꽁 묶인 세계의 오류가 꼼짝 못 하는 사이, 나와 래빗의 옆으로 빛으로 만든 구멍이 생겼다.
마법 도구로 만든 이동 포탈이었다.
“결전? 어떡하나, 난 너랑 싸워줄 생각 없는데.”
세계의 오류가 딱딱하게 굳었다.
“내 원래 세계에선 너 같은 놈을 허접한 스토커라고 불러. 네가 뭐라도 된 듯 양 굴고 심취했겠지? 아니, 넌 그저 사람의 인생을 장난감 다루듯 다루는 것에 취한 삼류 악당일 뿐이야.”
“…….”
세계의 오류가 거세게 움직였지만 엄청난 마력을 쏟은 사슬은 제 역할을 공고히 했다.
오래 버티지는 못했으나, 우리가 이동을 마치고 포탈을 닫기까지는 충분했다.
[나만의 로판 부가 기능 발동! 인물 ‘휴고’와 교신합니다!]
[연결 중입니다……]
-달린, 신호를 보내셨군요. 나도 황성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휴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래빗에게 눈짓했고 우린 동시에 포탈에 올랐다.
우리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 내 시선은 다시 세계의 오류를 향했다.
“관심 종자라 불러도 되겠네, 너 같은 놈은. 악당의 끝은 언제나 비참할 뿐이지. 모든 이야기의 끝처럼.”
“…….”
나는 세계의 오류를 바라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나 내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네가 내 애인을 건드렸냐?
“목이나 닦고 기다려, 이 새끼야.”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깜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