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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68화 (268/281)

◈268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33)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뜨면 익숙한 방 안이었다.

방 안에 앉아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구했어?”

리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피로감이 섞여 있던 얼굴로 화색이 돌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리제는 석상의 조각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휴고 또한 무사히 이동한 건지, 곧 방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없으니까 얼른 내게 넘겨줘.”

“응.”

리제가 석상의 조각을 받았다.

그러고도 잠시 망설이더니 내게 물었다.

“그놈을 만났어?”

“응.”

그러자 리제의 얼굴로 분노를 포함한 온갖 부정적으로 얽힌 표정들이 떠올랐다.

이는 잠시뿐, 리제는 순식간에 그 표정을 가라앉히더니 돌을 가지고 나섰다.

“황녀님, 외람되오나 혹시 제게 조용한 공간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가능하댜. 이 성엔 남는 게 방이니.”

리제의 청에 래빗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리제가 금방 오겠다며 방에서 나가고 나는 그대로 쇼파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달린!”

“영애!”

“……아, 괜찮아요. 긴장이 조금 풀려서 그래요. 긴장이.”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다른 한손을 살살 흔들었다.

귀로 거칠어졌던 두 사람의 숨소리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할 말은 많았지만, 모두들 상황을 알기에 침묵했다.

라이칸이 사느냐 죽느냐, 중요한 기로에 선 시점이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제가 돌아왔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음에도 리제의 얼굴은 아픈 사람처럼 헬쓱해진 채였다.

“……이걸 2황자님께 가져가.”

“먹여야 돼?”

리제가 느릿하게 끄덕였다. 먹이는 게 힘들면 뿌려도 된다고 했지만, 먹이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도 덧붙이면서.

그럼 당연히 먹여야지.

리제가 건넨 것은 작은 병에 든 액체로, 새하얀 색과 검은 색이 혼탁하게 섞여 기묘한 색을 내는 액체였다. 병이 흔들리면 이따금 빛을 내뿜기도 했다.

무엇인지 몰라도 이것만이 라이칸의 구명줄이었다.

‘요정이 기적까지 일으켜 리제를 보냈으니, 분명 통할 거야.’

라이칸의 침실에 사람을 모두 쫓아 보내는 건 래빗이 맡았다.

그렇게 혼수상태인 라이칸에게 입을 맞춰 액체를 모두 먹였다. 그러고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아 초조할 때즈음…….

라이칸이 눈을 떴다.

“……으으.”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약을 먹은지 무려 3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간 래빗이 모든 사람을 내쫓아 보냈지만 이도 한계가 찾아와 더는 물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밖에서는 라이칸의 죽음을 기정 사실화하려는 사람조차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마침내 라이칸의 푸른 눈을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흘렸다.

정말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더라.

“……달린?”

그가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손을 뻗기 무섭게 나는 그 앞에 달려가 엎드려 엉엉 울었다.

“이건, 꿈인가…….”

“끕, 꿈일 리가, 있겠어요?”

당신 죽을 뻔했다고. 정말 요단강 건널 뻔했다고, 알아?

물론 내가 그 강 절대 건너지 않게 뒀겠지만.

“……눈앞이 깜깜해졌던 기억밖에 없군. 내가, 그대를 힘들게 했나?”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끕, 이제 일어났으니까. 그런 거 잊기로 했어요.”

“힘들었다는 소리군.”

라이칸의 손이 엎드린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엉엉 새어 나오는 울음 사이로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기도 한 것 같았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나?”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방안엔 나와 라이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 훌쩍, 황녀님은요?”

“내게 눈인사를 보내더니 나가던데.”

“아…….”

우리 황녀님, 이럴 때도 눈치가 빠르게 행동해주시다니……. 나는 상황도 잊고 머쓱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래빗은 이제 가족들에게 거의 모든 마음을 열었지만, 그럼에도 더 애틋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 라이칸이었다.

이 때문인지 라이칸이 정말로 죽음의 위기를 겪게 되자 평소 황제의 명이면 따라주던 것도 멈춘 채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하였지. 그녀의 마음도 무척 심란했을 터였다.

죽을 뻔한 오빠가 눈을 뜬 걸 보고서 본인 또한 반가운 마음이 들었을 텐데, 내게 양보해준 게 느껴져 고마운 마음이 더 크기도 했다.

“고생을 시킨 것 같아 미안하군.”

라이칸이 손을 뻗어, 내 눈꼬리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나를 보는 얼굴은 조금 창백했지만 더는 죽음의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피로해 보이기는 했지만 차갑게 식어가던 모습을 보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의 시선에 미안함과 애달픔이 묻어나왔다.

“……좋은 것만 주고, 느끼게 해주어도 아쉽기만 한 내 사람인데. 난 그대에게 늘 빚을 지는군. 유엘 그 아이의 일도 이번 일도 말이야.”

“그런 말씀 마세요.”

나는 라이칸의 손을 잡았다.

사실 내 마음을 깨닫고 라이칸의 마음을 받아주었을 때만 해도 이 마음이 이리도 크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애틋했지만 얼마나 깊은지는 몰랐다고 할까.

이번에 라이칸이 눈을 감고 영원히 뜨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당신의 죽음으로 생존의 의미를 잃고 이 세상이 나와 같이 사라져도 좋을 만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무수한 사랑 이야기를 읽어왔지만, 그 이야기들은 사실 활자에 불과했었다.

주인공과 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고, 나는 액자 밖에서 들여다보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위기도 분노도 아픔도, 기쁨과 행복도 함께 아프고 즐길지언정 결국엔 지나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당사자가 되고서야 깨달았다.

사랑은 실로 위대하여서,

전생의 아픔으로 삶을 놓아버린 자가 또 한 번 사람을 기대하고 사랑하게 만들며,

무한에 가까운 회귀로 삶에 지쳐버린 회귀자가 또 한 번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는 나에게도 다르지 않아, 생존을 가장 우선시하던 내가 끝내는 그마저도 저버리게 만들었다.

휴고 당신이 나를 다치게 하는 것보다 폭주로 죽는 것이 낫다고 했을 때,

발데르 당신이 끝끝내 나를 위해 희생을 망설임 없이 선택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나는 내 사랑을 깨닫게 만든 고맙고도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들어올렸다.

“당신이 살았기에 무엇이 바뀌었는지, 라이칸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그대로 죽었다면, 정말 요정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려고 했다고요.

당신이 알아요?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웅얼거렸다.

아마 라이칸은 어떤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거다.

그럼에도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내 등을 서툴게 쓰다듬었다.

“……가끔 그대가 사라질 것처럼 아련하고 멀게 느껴질 때가 있어. 하지만 지금은 처음으로 그런 기분이 완전히 사라지는군.”

“앞으로도 그렇게 느껴주세요……. 또 이렇게 아파서 쓰러지지 말구요.”

“약속하지.”

고개를 들면 굳은 얼굴로 약속을 말하는 라이칸이 보였다.

까칠한 얼굴 속 직선 같은 꼿꼿함이 어쩐지 그답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눈물을 매단 채로 웃고 말았다.

“그래요, 약속 꼭 지켜주세요. 저도 연인이랑 즐거운 밤을 한 번으로 끝내고 보내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구요…….”

“……왜 여기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지?”

“싫으세요?”

“……아니.”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라이칸은 내 표정을 쫓듯 풋풋한 웃음을 짓고는 이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나는 서툰 듯 다정한 그의 손길이 좋았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런 위기를 겪고 나서야 깨달은 게 있어요.”

“그게 뭐지?”

“아껴두면 안되는 말이 있다는 거요.”

나는 내 뺨을 감싼 커다란 손을 내 손으로 감싸듯 꼬옥 쥐었다.

내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사랑해요. 아주 많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많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말에 라이칸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이내 그는 울컥한 사람처럼 시선을 늘어트렸다.

다시 떠오른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환희와 기쁨이 가득했다.

나는 행복이 눈에 보이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 그의 모습을 말하고 싶었다.

“……내가 부족하여, 지금 이 감정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 표현하셔도 괜찮아요.”

“은애한다. 그 말로는 충족되지 않아.”

라이칸이 깊고도 행복한 눈으로 말했다.

“그대, 나는 정말 온 마음을 다해 그대를 사랑해.”

그에 대한 화답으로 내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을 때, 푹신한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피하지 않고 맞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라이칸. 이 분위기에서 미처 말하진 못했지만, 당신의 복수는 내가 꼭 해줄게요.

걱정 말아요.

* * *

라이칸의 방에서 나오자 래빗이 나와 바톤을 터치하듯 안으로 들어갔다.

래빗 뿐만 아니라 라이칸이 눈을 떴단 소식에 달려온 다른 황족들도 함께였다.

복도가 왁자지껄해졌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2황자가 깨어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산처럼 몰려든 사람을 보면서 라이칸이 정말 인기가 좋았구나, 하고 그의 인망을 새삼 깨달으며 슬쩍 복도로 물러났다.

한참을 걸어 인적이 드문 복도로 나온 뒤에야 나는 비로소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괜찮니?”

조그마한 말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온 건지, 벽에 기대어 선 리제가 보였다.

내가 우연히 리제가 있는 곳에 온 건가? 착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자세였다.

리제의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신뢰도를 재산정합니다! 회귀자 ‘리델라제’의 빙의자님을 향한 신뢰도가 공개됩니다.

신뢰도: 100 / 100]

[축하합니다! 요정은 빙의자님이 모든 신뢰도를 달성하였음을 알려요! ヾ(๑ㆁᗜㆁ๑)ノ”]

푸르른 요정의 창이 눈이 어지럽도록 시야를 뒤덮었다.

[축하합니다! 퀘스트(메인) -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가요?’를 달성했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어쩐지 나보다도 더 들뜬 듯한 말투로.

[빙의자님은 마침내 네 개의 메인 퀘스트를 모두 완료하였어요! (◞♥ꈍ∇ꈍ)◞♥・*:.。..。.:*・'(*゚▽゚*)'・*:.。. .。.:*・]

모든 메인 퀘스트의 종료를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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