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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72화 (272/281)

◈272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37)

‘결국 네 번째 메인 퀘스트는 세계의 오류를 없애버릴 해결책을 두고, 그 열쇠를 쥔 리제의 신뢰에 달려 있었던 거야.’

만약 리제의 신뢰를 끝끝내 얻지 못했다면?

내가 죽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 또한 그대로 끝이란 소리다.

리제는 다시 한번 회귀하겠지만, 다음 회차엔 나 같은 존재가 있을진 모르는 일.

아니, 아마도 없을 거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요정이 나 같은 존재를 두 번씩이나 불러들일 수는 없을 거다.

나는 요정이 내세운 비장의 수단이자, 최후의 카드일 것이다.

[요정은 놀랍도록 정확한 추리에 박수를 치고 있어요! ( *˘╰╯˘*)]

허, 내가 미친 게 틀림 없지.

이젠 저 망할 이모티콘도 예전처럼 가증스럽게 느껴지지 않다니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리제가 입을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고운 얼굴로 망설임이 스치는 것도 같았다.

“……맞아, 알아.”

짧은 한숨 뒤로 흘러나온 말은 덤덤했다.

“내 모든 생을 바쳐 겨우 알아냈어.”

무한 회귀자가 자신의 모든 회차를 포함해서 알아낸 진실이었다.

“……이것도 네게 지시하는 신이 알려준 거니?”

“아니. 일단은, 그 신은 썩어빠진 놈이라 그런 친절한 지시 같은 건 안 줘.”

내 적나라한 말에 리제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요정이 서운하다며 엉엉 울어요! (⸝⸝⸝ᵒ̴̶̷̥́⌑ᵒ̴̶̷̣̥̀⸝⸝⸝)]

눈 앞에서 푸르른 창이 괴롭히거나 말거나 나 또한 담담하게 말했다.

“내 스스로 알아낸 거야.”

리제의 칭호 속에 힌트는 있었지만, 찾아낸 건 나다.

“네가 걸어온 길을 믿으니까, 네 삶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낸 결론이었어.”

“…….”

“이 정도면 우리, 친한 친구 맞지?”

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끄덕여지는 얼굴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문득 손을 통해 작고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래빗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아기 황녀님에게 한번 웃어주고는 다시 리제를 향했다.

“그래서 그놈을 처리할 방법은 뭐야?”

“……일단 그놈을 마주해야 해.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응.”

리제는 하늘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마법사가 필요해. 강력한 마력을 가진.”

나는 멈칫했지만 그 질문엔 쓰게 웃으며 답할 수 있었다.

“그거면 돼?”

“응. 그거면 돼. 그리고…… 뛰어난 검사가 있으면 좋겠지. 많을수록 좋아. 그놈은 위급할 때 괴물을 만들어내니까.”

강력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와 뛰어난 검사.

들을수록 요정의 안배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웃음이 흘러나왔다.

‘세계의 오류 때려잡자고 모인 어벤X스라 이거네.’

그만큼 요정 그놈들도 간절했다는 소리이리라.

“다음엔?”

“다음엔…… 날 중앙에 내세워줘. 그놈과 1대 1로 마주할 수 있게.”

리제는 천천히 설명했다.

리제가 수없이 많은 회귀를 하면서 얻게된 힘이 하나 있다고, 그리고 그 힘만이 세계의 오류를 죽게 만들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혹시 그놈은 알고 있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래빗을 한번 보았다.

래빗은 듣는 귀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몰라.”

리제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도 이 힘이 자기를 죽게 만들 거라곤 상상도 못 할 거야.”

그리 말하는 리제의 표정은 몹시 스산했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런 결연한 표정에 안심하고 넘어가서는 안 됐다.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줄은, 지금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 * *

그날 저녁, 나는 라이칸과 휴고와 재회했다. 그러나 우리의 재회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괴물이 오염을 전염시켰다고요?”

회의 중에 떠올렸던 문제, 예상했던 그 문제가 터지고야 말았다.

도시 한복판에서 ‘오염’에 물든 인간이 나타난 것은 물론, 그 괴물이 평범한 사람을 오염시켜서 똑같은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고.

‘이래서야 진짜 좀비랑 다를 게 뭐야?’

물론 생김새나 특징은 좀비와는 달랐지만,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이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나타난 괴물들은 모두 라이칸과 휴고, 그리고 래빗이 힘을 불어넣어준 무기를 든 휴고의 기사들까지 나서 모두 없애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성벽 밖에 더 있는 것 같아요.”

“대공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수도 성 밖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휴고가 흘끗, 라이칸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곳곳에서 괴물이 발견되고 있고 성밖에서도 목격된다고.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현재 오염에 물들지 않으면서 괴물을 해치울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소수야. 그런데 그런 괴물이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면?’

한 방향에서만 나타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늘처럼 도시 곳곳에 갑자기 나타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아버지께 미리 말씀드렸기에 군사와 기사는 충분하다. 하지만.”

“전염을 야기하는 괴물 앞에 일반 기사와 병사를 내세울 수는 없죠.”

혹시 몰라 리제를 보았지만 리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한두 사람의 오염을 막거나 치료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무리야. 힘이 부족해.”

리제가 무리해서 커버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10명.

대단한 숫자지만 제국민의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고보니 래빗이 파훼의 힘을 무기에 불어넣을 수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래빗의 한계는 어떨까.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닌 듯 어느새 모여있는 사람들 모두 조심스럽게 래빗을 응시했다.

이들 중 라이칸은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대표로 래빗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황녀님 외람되지만 혹시 파훼의 힘을 불어넣는 것 말인데요…….”

“얼마나 가능 하냐눈 고지? 궁금해할 것 같아따.”

“하하…….”

역시 전직 대륙 황제님은 눈치도 대륙급인가 봐.

“결론부터 말하쟈묜…… 더 이상 괴물울 상대하기 위한 무기룰 만드는 건 불가눙 하다. 정확히는 시간이 없댜.”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언제 괴물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날지 모는 상황에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거 답이 없잖아?’

눈앞이 깜깜해지는 상황, 나는 그대로 절망에 가라앉는 대신 고민했다.

요정이 잠자코 이 세상을 멸망하게 두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수없이 생존의 위협을 거쳐왔기에 어떤 위기 앞에서든 의연해진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거 새로운 퀘스트가 뜨는 거 아니야?’

허공을 보았지만 정답이 아니라는 듯 잠잠하기만 했다.

……이 망할 요정 놈, 설마.

‘세계의 오류만 잡을 수 있다면 희생쯤은 감수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수도에 있는 인원만 몇인데.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였다. 거기다 수도. 얼마나 많은 인원이 희생당할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심각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래빗은 고요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나는 래빗에게 다시 집중했다.

……너무 고요하고 평온해서 오히려 기묘하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사람이 극한 감정에 빠지면 오히려 표정이 사라진다고 하던가?

갑자기 왜 이런 사실이 떠오른 건지.

“달린, 방법. 있울 것 같다.”

천천히 고개를 든 래빗에게서 나는 어린 황녀님이 아니라, 오래전 환상으로 보았던 황제의 모습을 보았다.

씁쓸한 듯, 슬픈 듯.

고뇌 어린 저 표정은 그 누가 보아도 어린 아기 황녀님이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래빗 황녀님?”

“사실 평생, 혹은 쥭도라도 이것만운 절대 쓸 수 없다고 생각 했눈데.”

래빗이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달린, 나눈 다시 ……도 사람둘울 죽게 둘 수눈 없나 보구나.”

앞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도 올곧아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달린, 나는 다시 태어나도 사람들을 죽게 둘 수는 없나 보구나.’

나만이 래빗이 생략한 말을 알 수 있었으니까.

* * *

나는 다음날 래빗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바로 알게 되었다.

아침부터 래빗의 부탁으로 황실에 온 참이었다.

“황녀님의 유모께서 오셨습니다.”

시종들의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가게 된 곳은 다름 아닌 거대한 회의장이었다.

이미 문 앞에서는 라이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자님?”

“왔군.”

나는 라이칸이 에스코트를 위해 내민 손을 붙잡으면서도 얼떨떨하게 그에게 속삭였다. 내가 왜 오늘 아침부터 황실에 오게 된 건지 아직 영문을 모른다고.

그러자 라이칸이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모른다. 어찌 된 영문인지 유엘 그 애가 아버지에게 오염과 관련한 일로 대신들을 소집해달라고 했고, 아버지께서는 이를 허락했으니까.”

오염이 전염되는 것. 거기다 숨겨진 괴물 떼를 보게 된 이상 황실 또한 비상시임을 인정하고 국가 전체에 비상사태 선언, 쉽게 말해 계엄령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럼, 폐하마저도 무슨 일인지 모르신단 거예요?”

“……글쎄, 그런 것 같더군.”

회의실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아 나는 거대한 원탁을 마주했고, 이미 그곳에 앉아있는 황제와 황태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래빗은 황제 옆에 앉아있었는데, 조그마한 몸에는 너무나 거대한 의자였다.

그럼에도 묘하게 어울리게 보인 것은, 아마 여기서 그 누구보다 태연한 표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래빗에게 다가가자, 래빗은 인사 대신 내 손가락을 꼬옥 잡았다.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관계가 있다고 했던가. 이건 수없이 힘을 빌린 상대이기 때문일까. 가장 은밀한 비밀을 공유했기 때문일까.

나는 래빗에게 더 묻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손잡아 주시니까, 황녀님께서 처음 제 손을 이렇게 잡아주실 때가 생각나요.”

지금보다는 로아타 황제의 인격이 강했던 그때, 유일하게 아이다워질 때가 있다면 바로 이렇게 조그마한 손으로 옷자락이나 손가락만 꼬옥 잡을 때였다.

“황녀님은 지금도 그때도 제겐 사랑스러운 황녀님이에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서 이렇게만 말하자, 래빗의 표정이 한순간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달린, 이것만운 알아다오.”

“네?”

“지금부터 내가 말할 선언운, 오직 네가 있소소 결심하게 된 고라고.”

“…….”

“내가 쥭고 네가 쥭어 완성될 복수와 모든 걸 잊고 용서하눈 길 사이에서, 나눈, 너룰 위해 용서하눈 것울 택하겠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얌전히 경청했다. 그리고 래빗의 말을 찬찬히 곱씹어보았다.

이윽고 회의가 시작되고, 마치 미리 정해진 듯 래빗이 나선 순간에야 그 말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내 딸은 대단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내 딸이 직접 하고 싶은 말이 있다더군.”

시작은 황제의 한마디였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신성력.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래. 래빗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본인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절대 죽어도 쓰지 않는 힘이었지만.

“모듀 들었겠지만, 나눈 아버디의 허락울 받아 직접 이야기 하기로 했댜. 참고로 이 내용운 아버지도 모룬다.”

왜냐, 신성력. 그 힘은 과거 로아타 황제의 조국을 멸망시킨 힘이었기에.

“나눈, 내가 가진 신성력우로, 현재 괴물둘에게 맞설 수 있눈 무기룰 만둘 수 있다.”

어린 아기 황녀님이 조국을 멸망시킨 나라에, 그것도 그 힘을 가지고 태어난 자기 자신의 처지에 얼마나 절망했던가.

“그 힘에눈…… 한계가 없댜.”

그 힘을 오직 단 한번 나를 살리는 데에 쓰고는 다시는 쓰지 않았다.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잠시 잊을 정도로.

“……나눈, 이 힘우로 모둔 사람울 살리기룰 희망한댜.”

나는 그제야 래빗이 얼마나 무거운 결심을 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죽고 네가 죽어 완성될 복수와 모든 걸 잊고 용서하는 길 사이에서, 나눈, 널 위해 용서하는 것을 택하겠다.’

래빗의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서 마침내 내 과거를 모두 잊고 이 나라를 용서하겠노라고.

나는 친구의 묵직한 신념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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