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41)
시선을 마주한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목 끝까지 칼이 들이밀어진 듯한 섬뜩한 감각. 예민해진 감이 미친 듯이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피할 길이 없어……!’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내 목을 파고드는 놈의 검이 보였다.
시선만이 겨우 쫓아간다. 내 힘이 아직도 부족했던 걸까?
‘아니, 저 미친놈이 규격 이상으로 강한 거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다가올 충격을 각오했으나 이게 웬걸, 목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콰아아앙!
거대한 소리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왜, 내게 아무런 충격이 없는 거지?
불길한 감각이 혈류를 돌고 심장을 쿵쿵 두드렸다. 눈앞에서 모든 악의 근원이 씩 웃고 있었다.
“그거 알아?”
세계의 오류의 말이 느릿하게 들려왔다.
“사람을 괴롭힐 때엔,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바로, 소중하게 여기는 걸 망가트리는 거야.”
누가 봐도 삼류 악당 같은 잡소릴 지껄이는 녀석에게 욕설이라도 날려야 하겠건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빠르게 상체를 돌렸다.
내 눈이 커진다. 눈 앞에서 저 멀리 허물어지는 형상이 보였다.
등에 내리꽂힌 거대한 검,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본 순간 찢어질 듯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라이칸!!!”
천천히 쓰러지는 모습에서 침대에 누워 죽어가던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안돼, 안돼. 이번엔 안돼. 이럴 수는 없어……!
“둑스!”
[소환된 신 ‘둑스’가 엄청난 마력을 소비합니다!]
[요정은 이 이상 낭비가 있어선 안 된다고 조언해요!]
둑스가 달려가는 것과 동시에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신성하게 느껴지는 빛과 함께 라이칸 주변에 까맣게 몰려 있던 괴물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간신히 라이칸을 살렸으나, 대가는 컸다.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토해냈다.
마력은 몸 속에 저장되는 힘. 대량의 마력이 일시에 빠져나가자 심장이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 물론 당사자에게도 갚아주지 않겠단 말은 하지 않았어.”
살짝 허물어지는 상체 위로 푸우욱,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입으로 곧 무언가 뚝뚝 떨어진다. 선명한 피였다.
“난, 네가 죽었으면 좋겠거든. 요정의 사도.”
두툭, 덩어리진 피는 금세 웅덩이를 만들었다.
[치명상을 입었어요! 요정은 도망을 권고합니다! 빠른……]
“시끄, 러워…….”
나는 입가를 닦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지속적으로 마력이 빠져나갑니다! 더 이상의 마력 소비는 위험을 초래합니다!]
머리를 뎅뎅 울리는 요정의 창에서도 시선을 돌렸다.
라이칸은 살아 있다. 둑스와 연결된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만의 로판 부가 기능 발동! 인물 ‘라이칸’과 교신합니다!]
라이칸이 내게 속삭였다.
-달린……. 난 약속, 꼭 지킬 것이다.
자신은 괜찮다고. 우리의 약속을 어기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그러니 나도 쓰러질 수 없었다.
“이거, 어떡하지? 네가 준비한 공격 따위에 죽진 않은 것 같은데. 나도, 내 애인도 말이야.”
피를 닦으며 말하는 동시에 나는 배에서 격렬한 고통을 느꼈다.
나를 걷어찬 세계의 오류가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웃기지마, 고작 요정의 하수인 주제에.”
“하하.”
하지만 고작 하수인이라 폄하한 나 같은 것에게 이토록 동요하는 넌 어떻고?
난 삐딱하게 웃어 보였다. 내 비소를 눈치챈 오류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분노로 일렁거리는 눈과 세트라도 되는 듯 더욱 짙어지는 검은 연기가 나를 감싼다.
오염은 통하지 않는 몸이 되었다지만…… 이렇게까지 진하게 휩싸여도 괜찮은 걸까?
다행스럽게도 스킬은 종료되지 않았다.
그러니, 한방만, 아까의 그 한방만 다시 만들 수 있다면…….
어떡하지? 라이칸에게 자신만만하게 웃어주었는데.
‘……남은 힘이 없잖아?’
나는 찌푸리며 다가오는 검을 피하지 않은 채 응시했다. 코앞에서 멈춘 검이 마치 나를 약 올리는 것 같았다.
옆으로 음흉하고도 서늘하게 웃는 시몬의 얼굴이 보였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왜일까. 시몬의 마지막 저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것도.”
다짐처럼 중얼거리는 말, 자신에게 하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아주 잠깐, 아주 잠깐의 틈이면 되는데…….’
조롱하듯 살살 흔들리던 검이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맹수처럼 쇄도했다.
정말 마지막이라도 눈은 감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쇄애애액!
퍼어억!
“으윽…… 뭐, 뭐야?!”
화살처럼 날아온 무언가 세계의 오류 팔을 맞췄다.
그대로 멈춰선 몸을 본 순간 난 더 생각할 것 없이 힘을 끌어모았다.
‘젠장, 로아타 황제님! 발데르……! 힘 좀 주세요!’
조금 전 내 팔에 모였던 로아타 황제의 힘과 발데르의 힘이 다시 한번 맺혔다. 그것도 더욱 빠른 속도로.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꽂아 넣었다.
“허억, 허억…….”
해치웠나?
비틀거리며 물러난 세계의 오류의 눈으로 경악이 스쳤다.
투둑투둑,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새카만 색으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미 인간이 아니긴 했다. 심장에 검을 꽂고도 비틀거리며 서 있었으니까.
‘징글징글한 새끼…….’
하지만 내 공격이 크나큰 유효타를 만든 것 같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는 어느새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검은 사슬이 놈을 붙잡고 있었다. 타닥타닥, 사슬에선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상체를 일으키는데,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늦어서 미안.”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헉, 헉 숨을 몰아쉬는 리제의 모습이 보였다.
저 마법진이 리제의 것임을 증명하는 듯 안색이 매우 창백했다.
“너 괜찮아?”
“……괜찮아. 발동하는 데도, 유지하는 데도 거대한 힘이 필요해서 그래.”
리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것도 네가 준 마력이 아니었다면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리제는 눈앞에 갇혀있는 세계의 오류를 노려보았다.
깊어지는 시선 속 일렁거리는 눈빛은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젠 끝이 다가왔다. 라이칸 쪽을 보아하니, 저쪽도 정신을 차린 라이칸과 둑스 덕에 거의 정리 되는 듯했다.
“리제, 이젠 어떡하면 돼? 저놈을 붙잡았으니까. 이젠 죽이기만…….”
“아니. 저 놈은 저걸로 죽지 않아.”
리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멈칫했다.
……죽지 않는다고?
“아아, 리제! 리제! 나의 리제! 날 찾아왔어? 응? 날 찾은 거지?”
이제 정신이 나가 버린 듯 리제를 미친 듯이 부르짖는 세계의 오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에 찡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 위로 주르륵 흐르는 피가 느껴졌다.
“죽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이런 걸로는 죽지 않는단 얘기지.”
리제는 놈에게 꽂힌 내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놀랐어, 수없이 많은 회차 중에서 저놈이 저렇게 상처 입은 건 처음 보니까…….”
이대로 세계의 오류에 못이 박힌 것처럼 영원히 노려볼 것 같던 리제가 고개를 돌렸다.
쿵.
왜일까. 나는 나를 쳐다보는 리제의 모습에 심장이 저 바닥으로 까마득히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달린, 내가 어떻게 저놈을 끝장내버릴지, 궁금하다고 했지?”
손등이 시큰거리도록 식은땀이 맺혔다.
……왜?
“너무 늦게 알려줘서 미안해. 하지만 말할 수는 없었어.”
리제가 천천히 주먹을 뻗었다.
주먹을 열자, 익숙한 마석이 보였다. 내가 폐신전에서 가져다준 마석이었다.
이걸 본 순간 두근거림이 더욱 커졌다.
왜? 왜? 어째서. 이제 저놈은 꼼짝없이 붙잡혔고, 끝장내버리기만 하면 되잖아?
“달린, 내게는 영원에 가까운 회귀 동안 모아온 힘이 있어.”
“힘? 그럼 왜 내게 마력을…….”
“한번 발동하면, 나조차도 억누를 수가 없거든.”
리제가 곧 나를 향해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자폭이야.”
“뭐?!”
“내 몸을 매개로 만든 폭탄이라고.”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나서려 했지만 내 움직임은 리제의 한 손에 막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젠장, 세계의 오류가 찌른 상처만 아니었다면……!
“이 마석은 시간을 잠시 멈출 수 있어.”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그리고 네 도움으로 완성한 이 마법진은, 폭발로부터 막아줄 거야. 폭발은 순간이거든.”
“리제!”
내가 마석을 가져다준 건, 네가 그렇게 쓰라고 가져다준 게 아니야. 아니, 그렇게 쓸 줄 알았다면 가져오지 않았어……!
“고마워.”
너무 많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기 때문일까, 오히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소릴 잃은 인어같이 뻐끔거리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제가 이내 웃었다.
“나, 너를 정말, 정말 정말로 좋아했어. 달린.”
눈부시도록 환한 미소였다.
“어둠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너만이 유일한 안식처였어.”
왜일까, 웃는 그 얼굴 위로 발데르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왜?
“안녕.”
지독하게 후련한 얼굴이었다.
이와 동시에 엄청난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이 부셔서 인상을 찡그리니, 언제 빛이 퍼졌냐는 양 눈앞으로 어둠이 내리깔렸다.
눈을 천천히 떴다.
‘어?’
그야말로 놀라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튀어오른 돌이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으니까.
[레전드리 아이템 ‘시간의 마석’ 발동했습니다. 지금부터 30초동안 시간이 멈춥니다!]
돌뿐만 아니었다.
돌아보면 라이칸도 괴물들도 모두 멈춘 채였다. 심지어 소환된 둑스조차도.
나는 멈춘 시간에서 홀로 걸어가는 이를 발견했다.
‘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내 질문에 대답하듯 어디선가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빙의자님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니까요! ♫꒰・‿・๑꒱]
[당신은 우리의 대리인.]
[그리고 요정의 힘을 가진 존재니까요
앞을 가득 메우는 푸른 창을 천천히 읽었다.
내 시선은 홀로 걸어가는 이를 향했다.
리제였다.
저 애는 지금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거야.
제한 시간은 30초, 이 30초만 견디면…… 모든 것이 끝난다.
[요정이 동의해요!]
요정 또한 곧 다가올 끝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들뜬 것이 느껴졌다.
그래, 네 오랜 숙원이었겠지. 저놈을 반드시 없애버리고 싶다는 소원 말이야. 다른 세상의 존재를 끌어들여서라도 이루고 싶었겠지.
내 기나긴 여정이, 이대로 멈춘 시간을 조금 견디기만 하면 끝이 난다. 모든 것이.
……그런데.
“이 세상은 꼭 누군가 희생해야지만 구원이 가능한 거니?”
나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눈앞에 켜진 푸른 요정의 창이 꺼졌다.
“왜, 희생으로 모든 걸 끝내야 하는데?”
곧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
물음표 하나. 요정의 모든 의문을 대변하듯 간결한 의사표현이었다.
나는 하, 하고 웃었다.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진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이 요동쳤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까지 20초 남았습니다.]
너무 집중한 탓일까,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곧 생각을 마무리하고 입술을 끌어올렸다.
내 몸이 움직일 수 있을까? 아니, 틀림없이 움직이겠지.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내 몸뚱이는 움직였잖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조금 전엔 꼼짝도 하지 않던 몸이 움직였다. 귓가로 들려오던 숨소리가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당황한 듯이.
이 숨결이 요정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넌 자폭, 저거 막을 수 있니?”
특수한 공간이기 때문일까? 어쩐지 눈앞에 조그마한 형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언젠가 보았던 요정의 모습이었다.
[…….]
“그래, 괜한 걸 물었지. 네가 날 도울 리 없으니.”
나는 예상했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왜 가려는 거죠?]
그러나 요정의 창이 앞길을 막듯 떠올랐다.
“……그야 당연하잖아?”
내 대답은 마치 미리 쓰인 답처럼 거침없었다.
“이대로라면 리제는 평생 희생만 하다 생을 끝내는 거야. 그것만큼 불행한 결과가 어딨어?”
[요정은 이외의 해결책은 없다고 알려요.]
“글쎄, 동의 못 하겠는데. 사실은 아니지? 있잖아, 해결책.”
이건 확신하지 못하고 묻는 질문이었지만, 그럼에도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어쩌면 말이야.
“희생양이 바뀌면, 리제는 살 수 있잖아. 맞지? 리제를 대신해 내가 간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