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42)
나는 대답하지 않는 허공을 향해 웃었다.
“넌 내가 리제를 대신해서 자폭할 수 있는 방법이나 마련해. 네가 맨날 주던 그 ‘역할’ 나한테 주란 소리야.”
한 세계의 주인공이 죽자 요정은 새로운 주인공을 만들어 내게 역할을 주었다.
그런 것처럼 리제가 네 번째 원작에서 맡은 역할이 자폭하는 희생양이라면.
“방법, 없어도 만드는 게 좋을걸? 내가 리제가 도착하기 전에 콱 죽어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내 목숨을 담보로 한 협박은 언제나 먹혔다.
나는 이번 또한 먹히리라 생각했고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요정은 이미 앞서나간 ‘무한 회귀자’를 막을 수 없다고 알려요!]
그래, 그러네. 앞서 나간 저 애를 어떻게 막지?
이래서야 설사 내가 대신 희생하는 방법이 생겨난다고 해도 리제보다 빠르게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초조해졌다. 더는 누가 희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누가, 막아줬으면, 아니 제발, 저 애를 설득하고 말려주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특별 보상, 세 번째 보따리가 발동합니다. 잠들어있던 ???의 영혼이 깨어납니다!]
푸르른 창이 눈앞을 채우는가 싶더니, 허공에서 빛이 생성되어 빠르게 리제에게 쇄도했다.
달려나간 빛은 리제에게 가까워질수록 점점 형상을 갖추더니, 마침내 리제 앞에 도착했을 때는…….
-리제!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분홍빛 머리, 가냘픈 눈동자, 마치 금방이라도 쓰러질 같은 창백하고도 예쁜 얼굴.
늘 거울로 바라보던 내 모습이었다.
‘……저건.’
나만 경악한 것이 아닌 듯 리제 또한 걸음을 멈췄다. 몹시도 놀란 눈이었다.
-안돼, 안돼, 가지 마. 가지 마……!!
…지금이다.
나는 리제의 걸음이 멈춘 사이 빠르게 발을 굴렀다.
솔직히 가면서 후회? 조금은 했다. 내가 왜 희생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좀 많이 했지.
‘……미안해요, 라이칸. 약속은 아무래도 못 지킬 수도 있겠죠?’
하지만 리제도, ‘달린’도 자꾸 뇌리에 아른거리는 걸 어떡해?
무엇보다도 마지막 리제의 모습에 발데르가 겹쳐 보였다.
더는 고통 받는 주인공들이 희생하는 건 싫었다.
나는 푸흡 웃었다.
‘이래서야…… 진짜 과몰입 독자가 따로 없네.’
아니, 이젠 나는 이곳을 내 세계로서 사랑했다. 사랑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마지막 방점은 내가 찍겠다 결심할 정도로.
세계의 오류는 반투명한 벽 안에 갇혀 있었다. 그 벽에 손을 짚는 순간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달린……? 아니, 달린이 둘?”
리제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가, ‘달린’을 보았다.
‘사라지지 않았구나, 당신.’
정말 다행이야.
미소를 끝으로 나는 미련 없이 벽 안으로 향했다.
[정말 들어가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자폭’의 역할은 당신에게 주어집니다.]
경고하듯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어째서일까, 나는 처음으로 이 붉은 글씨가 내 편처럼 느껴졌다.
‘봐, 할 수 있었잖아? 역할 바꿀 수 있었네.’
마치 나를 걱정하여 막아선 것처럼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너도 참, 이제야…….
“됐으니까 자폭의 힘이나 넘겨.”
[‘시간의 마석’ 효과가 종료됩니다. 시간이 다시 흐릅니다.]
* * *
시간이 다시 흐른다는 메시지를 다시 본 탓에 마음이 초조했다.
그러나 ‘세계의 오류’가 묶여 있는 공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엄청난 이질감을 느꼈다.
마치 전혀 다른 공간에 온 것처럼…….
[시간을 단절시켰어요. ‘빙의자’ 님이 들어가는 거라면 이렇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뭐? 그럼 자폭이 일어나도 세상엔 지장을 주지 않는 거야?
[요정은 그렇다고 말해요…….]
어쩐지 힘이 빠지고 시무룩한 말투였다.
이걸 보면서 나는 미운 정도 정이라고 이 놈에게 아주 정이 없지는 않았구나 생각했다. 참으로 애증의 존재였다.
이것도 마지막이겠지만.
‘속은 후련하네.’
곧 나는 세계의 오류가 묶여 있는 앞에 도착했다.
놈은 힘이 빠진 건지 축 처져 있다가 나를 본 순간 아득바득 움직였다.
철컹철컹, 놈을 묶은 사슬이 미친 듯이 움직였지만 빠지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꼴 좋네?”
“너……!”
놈이 피를 토하며 외친 것과 동시에 검게 뭉쳐진 힘이 내게 쏟아졌지만 그건 내게 닿기 전에 파스스 흩어졌다. 음? 난 뭐 안 했는데…….
설마 요정인가?
“왜, 리제가 아니라 네가 나타난 거지? 어째서, 어째서!”
“아……. 너 설마, 네 끝을 리제가 내주는 걸로 만족하려 했던 거야?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리제와 함께 죽을 수 있었어!”
“에라이, 이 미친 새끼야!”
진짜 제대로 돌아버린 거 아니야? 나는 경악한 얼굴로 세계의 오류를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놈은 거의 광인 같은 눈으로 짐승처럼 이를 드러냈다.
“지금 내 처지가 우습겠지, 통쾌하겠지! 하지만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요정의 사도, 아니 대리인인가? 나도, 처음엔 너와 같았어!”
“…….”
“요정이 나를 데려왔단 말이다!”
그 말에 나는 허공을 한번 응시했다.
“저 놈들의 수법은 항상 같지! 제 세계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다른 세계의 영혼을 끌어들이고, 그 다음엔? 무수히 많은 시련과 시련 속에 결국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들어. 내가 악당인 것 같아? 그렇다면 다, 저놈이 그렇게 만든 거다!”
으음, 요정 저새끼들이 생각보다 더 나쁜 놈이었다. 이건데. 딱히 변명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요정은 저 존재가 스스로 ‘오염’으로 타락했다고 알려요.]
그럼 나머지는 사실이다 이거네?
나는 허공을 보았다가 다시 놈을 응시했다.
“그래 뭐, 네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진 않았다니, 그렇다고 쳐. 그래서 뭐?”
“요정 저놈이 지금은 네 편을 들어주는 것 같지? 나와 같이 희생한다고 해서 저놈이 보상일도 줄 것 같아?”
“아니? 난 너랑 같이 희생할 생각 없었는데?”
뭐, 나와 같은 존재가 처음은 아니란 건 잘 알겠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이미 요정은 내 안에서 최악과 차악 사이를 오가던 존재였으니 평판이 더 떨어질 곳이 없었단 게 맞다고 할까.
‘사실 여기 들어올 때만 해도 정말 대신 희생할 각오를 했지만…….’
놈을 보는 동안에 생각이 달라졌다.
아니, 다른 방법을 떠올렸을 따름이다.
“이야, 이제 보니까. 알겠다. 널 죽이는 게 리제가 아니라 나인 것만으로도…… 네겐 최악의 최후인 거구나?”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힘을 주자, 이내 손에서 곧 딱딱한 것이 잡혔다. 검 손잡이였다.
[‘자폭’의 힘을 담은 검입니다.]
빛으로 만들어진 검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태양의 빛을 품고 있었다. 모든 것을 무로 돌리기엔 적절한 검처럼 보였다.
“젠장, 놔, 놓으라고, 널 죽이고 다시 한번 리제와 함께 시간을 반복해서……!”
“아니, 그럴 일 없을걸. 넌 여기서 영원히 죽을 테니까.”
나는 검을 살살 흔들었다. 놈이 나를 조롱했던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네 끝은 여기야. 미친 스토커 새끼야.”
너 때문에 대체 몇이나 죽었고, 희생당했으며 영영 사라졌는가.
수없이 희생당한 리제의 삶은 또 어땠는가.
“날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아?! 어차피 너 또한 나와 같은 존재가 될 거다! 요정의 손에 있는 한 언젠가 타락하겠지! 네 손으로 오염을 마시지 않고서는 견디지 않을 날이 올 거다! 너 또한 나처럼 너와 같은 존재와 함께 죽을 거다!”
“아, 너랑 같이 안 뒤진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나와 같은 존재?”
뭐. 좋다.
그렇게 있다고 쳐.
어쩌면 놈을 죽이고 운 좋게 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나 또한 놈이 말한 것처럼 요정이 본성을 드러내 나를 어떻게 할지 모른다.
“이제 더는 만들지 않으면 되잖아?”
“……뭐?”
분명 요정은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야, 요정. 기억하겠지? 네 번째 퀘스트를 완료한 순간 넌 내 소원을 이뤄주기로 했어.”
퀘스트 보상, ‘소원권’. 네 개의 이야기를 성공한 내게 주어진 보상.
나는 대답 없는 허공을 향해 씩 웃었다.
이 공간에서 희미하게 요정‘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소원 미리 빌게. 이 새끼만 죽이고 난 살려줘.”
나를 내려다보던 한 요정의 눈이 그대로 커졌다.
“아, 허튼수작은 말고 내 목숨 똑바로 붙여두는 게 좋을 거야.”
여러 요정들 중 하나가 반발하고 하나는 열심히 날아다녔다. 개중 하나는 나를 빤히, 아주 빤히 내려다봤다.
-요정은 ‘빙의자’ 님의 소원을 접수했습니다. 맹약에 따라 그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더는 시스템 창이 아닌 육성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저 목소리는 내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마, 말도, 말도 안 돼. 어째서……!”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저 최후의 악당을 위한 것이지.
난 통쾌하게 웃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자, 지옥엔 네 자리가 없대. 그러니 영원히 사라져버려.”
넌 용서를 빌 자격도, 구할 자격도 없다. 나는 눈빛을 가라앉히며 마지막 힘을 다해 놈을 찔렀다.
푸우우욱!
“아, 안돼…… 안돼, 죽기, 죽기 싫……!”
이번엔 심장을 찔린 놈이 파드득 미친 듯이 움직이더니 곧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입을 주르륵 검은 피를 내뿜다가 천천히 쓰러진다.
놈이 쓰러지기 무섭게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더니…… 놈의 시체를 덮은 것과 함께 스르륵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나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검이 손 안에서 사라진다. 나는 비틀거렸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손이 활활 타는 것만 같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쥐고 있던 검의 열기가 바닥에 옮겨붙은 듯 덥고 열이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마침내 통쾌한 기분을 느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최종 퀘스트 ‘용사님! 이 세상을 구해주세요!’가 완료되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푸르른 창을 보며 나는 입술을 비죽이 올렸다.
“야, 아직 끝이 아니지.”
그럼 끝이 아니지.
나와 저놈은 아직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다. 그 테이블의 이름은 그래, ‘최후의 협상’이라 해둘까.
나는 화상을 입은 것 같이 따끔따끔한 손을 쥐었다가 폈다.
“넌 들어줄 소원이 하나 더 있어. 기억하겠지?”
요정들이 나를 응시하는 게 느껴진다.
우리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 내가 ‘달린’의 몸에서 눈을 뜬 시점으로 말이야.
“집으로 돌려보내 준댔지?”
나는 평온하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 다른 소원을 이루어줘.”
이 말을 하기엔 나 또한 잠시 숨쉴 틈이 필요했다.
“더는 나와 같은 ‘사도’ 혹은 ‘대리인’을 만들지 않으며,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고.”
요정이 내 눈높이까지 내려왔다.
-요정은 ‘빙의자’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니, 넌 이해했어. 그렇지? 난 이 세계에 머물 거란 이야기야.”
오랫동안 생각했다.
모든 퀘스트를 완료한 나는 어떻게 되는가?
‘라이칸도, 휴고도, 래빗도. 모두 늘 내가 가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다고 얘기하곤 했어.’
특별한 존재인 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세계의 영혼이며, 모든 것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거란 걸.
하지만 나는 과연, 그때 가서…… 후련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나를 위해 평생을 간직한 원한마저 용서한, 세상에서 오직 단둘만 아는 비밀을 공유한 래빗을.
날 위해 폭주마저 견뎌낸 휴고를.
나를 위해 영원히 홀로 남는 선택을 하고서 모든 것을 주고 떠난 발데르를.
“나 또한 말하고 싶다. 이제 달린, 네가 없는 세상은 견딜 수 없다고.”
나아가 더는 내가 없는 세상을 견딜 수 없다던 라이칸을.
이 모든 사람을 두고 나는 돌아갈 수 있는가.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세계의 사람이 되기로 했다.
자유롭게.
“결과적으로 난 널 위해 목숨을 걸고 움직였어. 너는 내 생존을 걸고 수없이 위협하고 때론 협박하고 억지로 움직이게 만들었지.”
-…….
“나는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아, 너, 이 소원은 절대적으로 이루어줄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난 너와 같은 협박은 안 해.”
비틀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들어줘. 난 네가 만든 세계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네는 화해의 표시야.”
-……요정은 당신과 같은 ‘빙의자’는 처음 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 나는 특별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들어줄 거니?”
눈앞에서 선명해지는 요정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각각 짓고 있는 표정이 달랐지만 공통적인 감정은 보였다. 놀람, 경악. 복잡함.
그리고…… 기쁨.
-요정은, 맹약에 따라 ‘빙의자’ 님의 마지막 소원을 접수했습니다. 그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곧이어 딩동, 익숙한 소리와 함께 어쩌면 정말 최후가 될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보상을 받았습니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