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43)
* * *
-3개월 뒤.
“2황자님을 뵙습니다.”
거대한 공간,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막 나타난 자를 향해 고개를 정중히 조아렸다.
기사들의 인사는 절도 있었지만, 인사를 받는 이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문을 지나갔다.
그런 그를 보던 기사들이 라이칸이 완전히 사라진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도 오신 거지?”
“그렇지…….”
제국의 2황자 라이칸은 매일같이 하는 행동이 있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한 지는 딱 3개월째였다.
“이곳은 ‘그 사건’ 이후로 묘지가 되었잖아?”
“맞아. 그런데 계속 찾아오신다는 건 음, 아무래도…….”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본래 ‘대신전’이라 불리던 건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대신관이 제국의 황녀를 납치한 사건으로 폐쇄가 되었고, 이후 3개월 전 끔찍한 괴물들이 범람했던 사건 이후 그날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기리는 묘지이자 성당이 되었다.
이는 황제의 명이기도 했으며, 2황자의 주장으로 수락된 것이란 이야기가 알려졌다.
그런데 이 거대한 묘지가 만들어지자마자, 2황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에 나타났다.
한 손에는 꽃을 든 채로.
“그 소문이 맞는 것 같지?”
매일같이 이를 보던 기사들은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었다.
추측이 무엇인가, 이를 말하기 전에 매일 같이 이곳에 나타나는 꽃을 든 2황자의 모습은 언제가 우수에 차 있었다.
마치 아주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처럼 무거운 슬픔을 머금은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결국 무수한 추측 끝에 가장 그럴싸한 소문이 퍼졌다.
“……황자님의 연인이, 돌아가셨다는 소문 말이야?”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하고는 얼른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무도 없는 장소임을 알면서도 말하기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함께 보초를 서던 기사가 끄덕였다.
“그래, 매일같이 꽃을 들고서 이곳에 오시는 이유가 뭐겠어.”
세 달 전 있었던 괴물의 범람은, 수도에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그날 제국의 병사와 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용맹하게 싸웠다.
여기 있는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중한 나라를, 소중한 가족을 위하여.
괴물의 숫자는 실로 엄청나 숙련된 기사마저 잠시 전의를 잃게 만들었다.
병사와 기사들을 독려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싸움은 결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중 한 사람은 고작해야 5살도 안 된 어린 황녀였고, 다른 한 사람은 북부를 수호하는 체단 대공이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황녀의 모습은 신이 함께한다는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었다.
게다가 곳곳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이 어린 여신과도 같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체단 대공의 활약 또한 눈부셨다.
홀로 무수히 많은 ‘오염’을 일으키는 개체를 베어 넘겼고, 그 모습이 지치지 않는 신화 속 영웅 같다 하여 쓰러진 자마저 일으켜 세웠다.
혹자는 타국인이나 대륙적으로 유명한 영웅 ‘로아타’ 황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그에 걸맞은 영웅이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필두로 제국의 기사와 병사들이 죽도록 버텼을 때, 어느 순간 괴물이 행동을 멈췄다.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은 각기 래빗과 휴고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끝났나.”
“끝났군.”
그 말이 무섭게 눈앞의 괴물들이 먼지가 되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운 검은 입자가 되어 흩날리는 모습, 마침내 흩날리는 거대한 검은 바람이 사라지고 다시 태양이 비치는 그 모습은 세상이 한 차례 정화되는 것을 보는 듯하였다.
그리고 괴물들이 재로 화해 날아가는 방향에서 누군가 홀로 걸어왔다.
놀랍게도 엉망이 된 2황자 라이칸의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짐승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함께였다.
여우처럼 생겼지만 그보다 더욱 거대하고 맹수와 같은 모습의 그 존재는 온몸으로 부드러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눈을 크게 뜨며 북부인들이 작게 중얼거렸다.
“……둑스시여!”
“둑스시여!”
마치 라이칸을 보필하듯, 부축하듯 함께 온 짐승은 라이칸이 사람들 앞에 멈춰서기 무섭게 자신의 이마를 부드럽게 비볐다.
그 모습은 어쩐지 몹시 슬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바라보던 이들이 영문 모를 슬픔을 느낄 정도로.
“……더는 괴물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라이칸의 말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2황자님께서 이 괴물의 원흉을 없애버리셨다!”
라이칸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소문은 그렇게 라이칸이 괴물의 원인을 없애버린 영웅이라고 퍼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라이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영웅은 따로 있다.”
자신이 영웅이 아님을 밝히며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린 라이칸의 모습은 이 끔찍한 사태의 끝을 맞이한 사람답지 않았다.
그렇게 그때부터 라이칸의 묵직한 슬픔이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로 여기가 완성되고 나서 매일 같이 꽃을 들고 오시잖아. 그런데…… 좀 이상한 건 꽃을 그대로 가지고 나오시는 거지?”
“그렇지……. 그건 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
두 보초 기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다.
라이칸은 항상 꽃을 들고서 이곳으로 들어가되, 나올 때 또한 꽃을 가지고서 나왔다.
매일 같이 꽃을 들고 나타난다는 소문만 퍼졌기에 라이칸이 돌아갈 때 또한 꽃을 손에 그대로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었다.
“이유가 있지 않으시겠나.”
이들은 그날 참전했던 사람으로서 래빗, 휴고, 라이칸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괴물이 사라진 시점과 맞춰 거짓말처럼 라이칸이 나타난 모습까지 똑똑히 보았던 보초 기사는 동료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내 똑똑히 기억하는데 말이지. 2황자님의 연인이라면 그분 아닌가? 분홍머리를 가진 영애…….”
끔찍한 괴물들이 나타나기 전, 라이칸에게는 온갖 소문을 일으킨 연인이 있었다.
그래, 그러했다. 기억하자마자 왜 떠올리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상한데, 그분은 지금 살아 계시지 않나?”
* * *
황태자 슈리안 리온 비센에게는 최근 커다란 고민이 있었다.
그 고민은 무려 거의 3개월 넘게 그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유엘.”
고민이란 바로, 자신의 여동생이 웃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엘.”
그의 부름에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여동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래빗의 얼굴을 바라본 황태자가 속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여동생의 얼굴은 겨우 대답만 했을 뿐 이곳에 영혼을 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분명 3개월 전부터였다.
바로 수도를 급습한 괴물의 떼가 완전히 사라진 뒤부터.
“우리, 사랑스러운 유엘, 밥은 먹었어?”
“…….”
래빗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는 표정 없는 여동생을 볼 때면 심장이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황제와 3황자인 루이프 또한 그럴 것이었다.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군.’
이 애가 가족들과 대화를 거부하던 그때로 말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들을 피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단 점이었다.
그러나 슈리안은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적어도 자신들을 피할 때만큼은 분노와 같은 감정을 보였고 생기가 있었다.
지금의 여동생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태엽이 빠진 인형 같은 여동생의 모습을 보기가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동생을 몹시 아끼고 사랑하니까.
“우리 사랑스러운 유엘, 오늘도 에스테 백작 저에 갈 거야? 이 오빠가 에스코트 해줄까? 응?”
그 말을 듣자, 래빗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걷는 모습 또한 생기가 없었지만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 겨우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황태자는 남몰래 숨을 내쉬었다.
‘……라이칸은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의 래빗이 그나마 말을 많이 나누는 상대는 셋이었다.
라이칸, 놀랍게도 체단 대공.
그리고 에스테 저택의 백작 영애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무엇이 이 애를 이렇게 만들었나?
답을 알지 못한 채 황태자는 오늘도 여동생을 직접 에스테 백작저에 데려다주었다.
이것만이 현재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래빗은 에스테 백작저에 도착하자, 자연스럽게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가 2층에 올랐다.
마치 자신의 방을 찾아가는 것처럼 래빗의 행동은 자연스럽기만 했다.
‘……익숙한 방이기야 하지.’
정말 제 방처럼 드나들던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익숙한 방으로 갈수록 래빗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가, 본인은 알지 못했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문을 열었을 때.
익숙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래빗을 반겨주었다.
“오셨습니까, 황녀님.”
“와 우리 래빗 황녀님 오셨어요? 오늘도 귀여우셔!”
래빗을 반겨준 사람은 래빗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친구였으며 가족보다도 소중한 단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존재는 더는 래빗이 알던 ‘달린’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래빗이 알던 달린은 이렇게 우아하게 웃지 않았다.
예법을 지키는 모습에서도 어딘가 귀여움이, 사랑스러움이 묻어나오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사실 이런 예법들이 낯간지럽노라고 속삭이던, 친근하고도 사랑스러운 유모님은 이곳에 없었다.
래빗의 표정이 천천히 흐트러지고 흐려지는 것을 보던 달린이 작게 웃었다.
그 미소는 래빗을 닮은 듯 서글펐다.
“……죄송합니다, 오늘도 저라서.”
그랬다.
자신이 알던 ‘달린’은 사라졌다.
자신만을 남긴 채로.
* *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영웅은 따로 있다.”
라이칸이 홀로 나타났을 때, 래빗은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어째서 자신의 오빠는 홀로 나타났는가?
라이칸의 옆에 보이는 존재는 래빗은 잘은 모르지만 달린에게 들은 적 있는 존재라고 느꼈다.
분명 달린이 신비한 힘을 사용할 때 부르던 존재일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런 존재가 달린이 아니라 제 오빠 옆에 있는가?
래빗은 라이칸을 잘 알았다.
달린의 위험을 두고 보느니 제 목숨을 걸고, 아니, 자신이 죽더라도 달린의 앞을 막아설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런 오빠가 홀로 나타났다.
래빗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자신의 전생의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멸망하는 나라와 죽거나 잡혀가는 가족들.
끝끝내 가장 사랑했던 가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자신의 모습까지.
‘……왜?’
래빗은 가슴 속 오래된 원한을 단 한 사람을 위해 잊었다. 한 사람을 위해 용서했다.
그런데 네가, 이제 이 세상에 없으면 나는 어떡해?
아니지? 네가 나를 두고 갈 리가 없다!
그 불안함은 곧 리제가 기절한 달린을 데리고서 나타나면서 사라졌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달린이 자신을 두고 갈 리 없었다. 함께 행복해지자고 말하던 사람 아니던가.
그러나 래빗의 기대는 달린이 눈을 뜨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래빗은 라이칸이 어째서 홀로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누구세, 황녀님?”
눈을 뜬 달린은 더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표정, 다른 행동, 다른 습관.
검사였던 래빗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달린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달린’이 아니라고.
“황녀님, 새로운 차를 내어드릴까요?”
래빗이 고개를 들면 안색이 창백한 달린 눈에 보였다.
눈을 뜬 지금의 달린은 우아한 나비 같았다.
고상하고 차분했지만 한편으로는 부서질 듯 가냘파 보였다.
똑같이 가냘팠지만 언제나 생기가 넘치던 자신의 친구 ‘달린’과는 달랐다.
“……아니, 돼써.”
현재 달린의 옆에는 래빗에게도 익숙한 사람인 리제가 서 있었다. 달린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저쪽 또한 잠을 자지 못한 듯 눈가가 조금 퀭했다.
래빗은 괴물 떼가 나타나기 전, 리제가 달린에게 가짜라고 말하던 것을 기억했다.
만약 지금 나타난 달린이 진짜라면, 그럼 리제는 분명 가장 행복해야 할 사람이었다.
한데 왜 행복해보이지만은 않는 건지, 의문이 생겼지만 래빗은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