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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79화 (279/281)

◈279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44)

“가보게따.”

“네, 조심해서 가십시오.”

달린은 어쩔 줄 몰라하며 래빗의 뒤를 따라왔다.

“저, 황녀님.”

달린의 부름에 래빗은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처음이 아닌 사죄였다.

래빗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

“네가 눈울 뜬 건, 내 친구가 원하는 일이었울 테니까.”

현재의 달린은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을 죄스러워하고 사과했다.

래빗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늘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달린이라면, 모든 걸 알고서 행동했을 테니까.’

자신의 친구가 사라진 지 3개월, 이제는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고 세상이 종용하는 것 같았지만 래빗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마도 평생을 이럴 것만 같았다.

에스테 저택을 나섰을 때, 래빗은 익숙한 인물을 마주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까만 옷을 입은 사람, 바로 휴고였다.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아, 너도 왔눈가.”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렸다.

그 결에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꽃다발이 함께 조용히 흔들렸다.

“네. 아무래도 기대를 버리지 못하겠으니까요.”

휴고가 손에 쥔 꽃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황녀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도 날이 아닌가 봐요.”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오늘도 대신전에 갔을 라이칸까지 포함해서.

셋은 ‘달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우리를 버릴 수 있을 리 없다고 믿으면서.

“구래,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네.”

“어차피 저 몸운 진짜 달린이 돌아온 거잖아.”

래빗의 말에 휴고가 천천히 끄덕였다.

마차가 있는 곳은 고요했다.

“네, 신이…… 영애를 데려갔다고 했죠.”

눈을 뜬 달린이 더는 자신의 친구였던 ‘달린’이 아님을 깨달은 래빗이 절망하던 그 때, 그녀의 눈 앞에는 놀랍게도 푸르른 무언가가 떠올랐다.

[당신을 구원한 영혼은 내가 데려갑니다.]

래빗은 이 메시지를 자신만 본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옆에 있던 휴고 앞에도, 라이칸의 앞에도 똑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리제 앞에도 말이다.

그렇게 래빗은 푸르른 무언가를 통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알던 ‘달린’이 사실은 이 세상의 영혼이 아니라는 점이나 계시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했던 점 등의 알고 있던 사실과, 그 외의 더 많은 이야기를.

다른 세상의 영혼이라고 하니, 어쩐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절로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너의 특별함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그녀는 당신이 더욱 행복해지는 결과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푸르른 것이 건넨 메시지에 래빗은 결국 눈물을 터드리고야 말았다.

그런 선택을 했으면서 왜 지금은 사라진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래빗은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푸르른 것, 아마도 신일 존재가 ‘달린’을 데려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언젠가 다시 돌아올 날도 있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달린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날처럼.

“저는 영애가 꼭 돌아올 거라고 믿어요.”

정말, 달린이 떠나고자 했다면, 자신에게 함께 행복해지자고 했을까? 정말, 인사도 없이 갈 사람이었던가?

아니다.

그렇기에 래빗은 믿기로 했다.

“구래, 나도 똑같아. 달린운 돌아올 거야.”

너는 돌아올 거라고.

래빗이 웃자, 휴고 또한 예쁘게 웃었다. 미소지은 휴고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여쁜 하늘이었다. 사랑하는, 그리고 앞으로 영영 이 마음을 접지 못할 상대처럼 아름다운 하늘.

‘우린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달린.’

돌아와 나를 또 한번 불러주는 그 날을요.

* * *

“리제.”

리제는 부름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달린이 숄을 두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달린은 창문가에 서 있던 리제를 이해한다는 듯 작게 미소했다.

“신경 쓰여?”

“뭘 말이야.”

리제가 시선을 살짝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을 꺼내려다 서둘러 말투를 바꿨다.

눈앞의 자신의 친구는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봐도 아깝지 않을 친구였다.

‘진짜’ 친구. 진짜 달린 말이다.

‘내가 본 이번 회차 달린이 가짜였을 줄이야.’

하지만 어째서일까, 계속해서 마음에 덩어리가 하나 생긴 것처럼 목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3개월 전부터 이어진 증상이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당신의 생존을 희망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리제는 평생 희생만 하다 생을 끝내는 거야. 그것만큼 불행한 결과가 어딨어?”

“희생양이 바뀌면, 리제는 살 수 있잖아. 맞지? 리제를 대신해 내가 간다면 말이야.”

푸르른 것이 나타나 리제에게 이렇게 말하며, 귀로는 ‘달린’의 음성이 들렸다.

어째서 푸른 것이 자신에게 이런 음성을 들려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리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회귀는 끝났다. 매번 죽어버렸던 불쌍하고 애틋한 나의 친구는 이제 더는 병을 앓지 않는다.

행복했지만 무언가 하나가 빠진 것만 같아서.

“저, 리제……. 그간 조심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냥 말하고 마는 게 나을 것 같아.”

달린이 리제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내 몸에 들어왔던 그 사람이 보고 싶은 거지? 그 사람에게 미안하고.”

“뭐?”

“그렇잖아. 너 내게 잘못했을 때 얼굴을 하고 있는 거 알아?”

리제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달린은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좋은 사람이었어, 그렇지.”

그 모습에 리제는 3개월간 부정하던 것을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가짜 따위가 아니었어.

너는, 내게 최선을 다했고, 나를 진짜 친구처럼 여겼는데.

미안해. 내게 사과할 기회를 줘.

“……맞아. 좋은 사람…….”

리제가 웃었다.

“좋은 친구였어.”

널 다시 보고 싶어. 달린.

아니, 그때는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될까?

네 진짜 이름을 듣는 날을 기다리고 싶어.

* * *

라이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이 보였다.

하늘을 보노라면 유독 맑은 하늘을 좋아했던 자신의 연인이 떠올랐다.

지금의 곁에 없는 그녀를 생각하던 라이칸이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곧 그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볕을 보고 있자니 두통이 온 탓이었다.

“언제까지 잠을 자지 않을 생각이냐? 아주 그냥 이대로 죽어 부친께 효도나 하지 그러느냐.”

제 형이 황태자가 빈정거릴 정도로 최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을 감으면 ‘달린’이 떠올랐으니까.

“……우리, 약조했지 않았나.”

무겁고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없는 묘지였기에 들을 사람 없이 쓸쓸하게 흩어지는 말이었다.

사랑하던 ‘달린’이 더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라이칸은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차라리 그녀를 쫓아 지옥까지 떨어질까 고민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마저 생각할 정도로.

이런 그를 붙잡은 것은 단 하나였다.

달린과 한 약속.

“라이칸, 이것만 약조해줘요. 다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죽지 않겠다고.”

그 한 마디가 그를 붙잡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녀가 남긴 한마디가 그녀가 여기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존재의 증거였기에.

어길 수 없었다.

라이칸은 대신 매일 같이 대신전에 들렀다.

이제는 거대한 묘지이자 죽은 이를 추모하는 곳이 된 이곳에서 기도했다.

신을 모셨던 곳.

달린을 데려간 신.

……만약, 신에게 제 음성이 닿는다면 제발 그녀를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마도 그는 죽을 때까지 신전 방문을 멈추지 못하겠지만, 자기 자신이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라이칸이 제 얼굴을 덮었다. 차마 울지 못하는 남자에게서 절망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로, 죽지 않기로 약조했지 않았나.”

그 순간이었다.

“맞아요.”

낭랑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칸이 흠칫하며 고개를 홱 들어올렸다.

뭐였지?

낯선 목소리였다. 그것도 처음 들어본 목소리.

그러나 왜일까, 아주 오랫동안 들었던 것처럼 애틋하고도 애절했다.

“어어, 그쪽이 아닌데.”

팔과 등으로 소름이 돋았다. 라이칸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낯선 여성이 서 있었다.

연한 다갈색 머리카락이 길게 흩날렸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은 자신이 알던 얼굴과는 다른 듯 닮아있었다.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마치 주인을 되찾은 것처럼.

“하하, 이 모습으로는 역시 어색하네요.”

눈앞의 여성은 볼을 살짝 물들이며 뺨을 긁적였다.

그 모습에 라이칸은 ‘달린’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럼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첫 만남에서 흘러나온 것과 똑같은 질문에 라이칸은 작게 웃고 말았다.

주르륵 뺨을 적시는 눈물을 내버려 둔 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일단 분홍색 머리카락은 아니다.”

“오, 그렇군요?”

“녹색 눈동자도 아니다.”

눈앞의 여성이 활짝 웃었다.

“그럼 저잖아요?”

그 순간 여성이 뛰어들었다. 품 안으로 따뜻한 체온이 감겨들었다.

폭 안긴 여성의 정수리를 보다 라이칸은 힘주어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헤헤, 우리 대화 모두 기억하고 있었네요.”

“……당연하지. 그대와의 대화니까.”

“나, 알아보기 어렵진 않았어요?”

라이칸은 눈을 꼭 감았다.

“전혀. 어떤 모습을 하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아하하. 정말 주인공 같은 소리네요. 음, 너무 좋다.”

“……그대야말로 상황에 맞는 엉뚱한 소릴 하는 건 정말 그대로군.”

라이칸이 눈을 뜨고서 눈앞의 여성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서로를 쳐다보다 작게 웃었다.

주르륵, 여성의 뺨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내가 무어라 부르면 좋겠나? 아니, 내 연인. 이름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으음, 웬 존댓말이에요?”

“다시, 처음 만났으니.”

라이칸이 손을 내밀었다. 그림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달린’은 천천히 미소했다.

“다린이에요. 윤다린. 많다는 뜻의 다와 불꽃이란 뜻의 린이에요.”

다린이 천천히 제 이름을 발음했다. 라이칸은 연인의 진짜 이름을 천천히 혀로 굴려 발음해보았다.

그러곤 곧 작게 웃음을 띠었다.

“불꽃이라니, 그야말로 그대와 잘 어울리는 뜻이로군.”

“아, 불꽃처럼 당신에게 돌진하던 날을 말하는 건가요? 나,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말과는 다르게 그렁그렁한 눈이 라이칸을 응시했다.

라이칸은 천천히 연인의 뺨을 만져보았다.

따뜻하다. 살아있다.

눈앞에 존재한다.

뻥 뚫려 있던 가슴이 순식간에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직접 느껴봐도 되겠나?”

“그때 하지 못한 피날레 말이죠?”

다린 또한 라이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살살 문질러보는 동안 다린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이야기의 끝은 불꽃 같은 키스로 끝나니까.”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곧 달린의 입술로 라이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다린은 마침내 자신이 다시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있는 공간으로.

그리고 이제는 그립던 이들을 보러 갈 시간이었다.

-요정은 ‘다린’의 행복을 빌어요.

어디선가 원수같던 애증의 존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이젠 괜찮다.

모든 것이 끝나고 행복해질 시간이니까.

“사랑해요, 라이칸.”

이 고백을 얼마나 하고 싶었던지.

3개월을 돌고 돌아 드디어 당신에게 남긴다.

“내 이야기의 종착점은 당신이에요.”

“멋진 말이군. 그럼 그대는 내 인생의 주인공인가?”

“그럼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행복하게 웃었다.

바람에 실린 웃음소리가 멀리,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다린의 귀환을 바라는 이들의 귀에 반가운 예감이 들 때까지, 아주 오래.

* * *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

아니, 이제는 모르더라도 괜찮아요.

내 세상은 이제 나만의 이야기로 흘러갈 테니까.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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