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5. 에필로그 (1)
* * *
몹시도 화창한 날이었다. 이제는 금방 여름이 되겠구나 싶은 푸르른 하늘.
바람은 깊어진 봄의 내음을 가득 품은 채 기분 좋게 뺨을 간지럽혔다.
라이칸은 늘 나를 보면 봄이 생각난다며 말하곤 했다.
그 탓에 어느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은 봄이 되어버렸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면, 몹시도 화사한 꽃으로 가득한 공간이 보였다.
나는 꽃과 닮은 레이스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언젠가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 있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 풀과 들꽃, 그리고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어여쁜 주인공들을.
눈 앞에서 그 장면이 재현되는 것만 같았다.
예쁜 천을 내걸고 바닥에 흰 카펫과 꽃을 깔아 길을 만들고…….
그 길 끝에는 주인공이,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나를 본 라이칸이 쑥스러운 듯 까칠한 눈매를 찡그렸다.
찡그림마저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풍경 속에서 내가 다가가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임에도 풍경과 더없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자, 그가 입을 떼었다.
“……다린.”
나는 곧 나올 말을 알고 있다.
“나와 결혼해주겠나?”
그리고 이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클리셰다.
내 대답 또한 정해져 있는 꽉 닫힌 해피 엔딩의 시작.
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요.”
* * *
“다린.”
래빗의 부름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은 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앗 죄송합니다, 저를 부르시는 줄 알았어요.”
“아니다. 발움이 비숫하기는 하니까.”
살랑살랑 흔들리는 분홍 머리를 가진 달린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빙의했던 몸의 진짜 주인 말이다.
‘아직도 달린을 달린이라고 부르는 건 어색하단 말이지.’
내가 진짜 이름인 다린으로서 돌아온 지 꼭 6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뭐, 하나하나 떠올리자면 하루 반나절도 모자라니까.
‘막 돌아왔을 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라이칸과 눈물의 재회를 한 뒤에 다음으로 만난 건 래빗와 휴고였다.
마침 두 사람이 함께 있었기에 그립던 사람들과 한 번에 재회할 수 있었다.
“어떠케 나룰 두고 갈 쑤가 있어!! 너 미워, 허으어엉!!”
그리고 나는 래빗이 그렇게 서럽게 울 수가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나 또한 가장 그립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부둥켜안고 같이 울었지만.
“흐어어엉, 죄송해요오……! 허으엉!”
우리를 난감한 눈으로 보던 두 남자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물론 휴고도 뒤이어서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지만 말이지?
‘우리 주인공님들은 다들 울보야 울보.’
정작 그 눈물을 쏙 빼게 만든 건 나라는 사실을 슬쩍 흘려보내며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의외로 리제였다.
래빗과 휴고에게서 이미 ‘요정’이 모든 진실을 알려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으므로, 그녀에게는 환영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리제에게 있어 나는 그저 진짜의 몸을 차지한 가짜였을 테니까.
그러나, 날 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마는 리제를 보면서 느꼈다. 나도 네 진짜 친구가 되었구나.
그래서 뭐, 한 번 더 찐하게 울었지. 그날은 눈이 퉁퉁 부어서 자는 것도 고역이더라고.
리제를 만났을 때, 나는 달린 또한 함께 만날 수 있었다.
한바탕 엉엉 울고 난 뒤라 분위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 달린씨 정말 착한 사람이더라고. 얼음도 주고 손수건도 건네주더라.
‘내 얼굴일 땐 못 느꼈는데…… 왜 진짜 달린의 영혼이 들어가니까 더 예뻐 보이는 거지?’
사람의 외모가 태도와 말씨 등 부가적인 것에 따라 어떤 차이가 나는지 확실히 느꼈달까.
그리고 참 놀랍게도 달린과 나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닮아있었다.
비슷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다른 사람 같은, 굳이 따지자면 한배에서 나온 자매 느낌이라고 할까.
솔직하게 말해서 달린의 얼굴 바탕을 동양적으로 바꾸고, 좀 더 수수해지면 내 얼굴 같더라?
요정 놈 때문에 내 진짜 이름도, 얼굴도 잊고 있었던지라 그동안은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세계로 끌려온 건가?’
이름도 얼굴도 닮았다.
요정 놈의 말로는 영혼의 본질도 비슷하다던데.
그래서 내가 달린의 몸에 빙의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아무튼 내가 달린과 상당히 닮은 덕에 내 거처는 쉽게 정해졌다, 놀랍게도 백작 부부가 내 후견인이 되어준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며 놀라워하는 동시에 어쩐지 남 같지 않다는 말을 할 때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나만의 로판 기능에 있던 사람들만 그간 달린이 나였음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
물론 이 기능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놀랍게도 황태자와 헤벤 공녀 언니는 미심쩍은 표정을 하더라?
어차피 들켜도 딱히 상관없는 사실이었지만, 두 사람이 마치 통하기라도 하듯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땐 정말 놀랐다.
“다린, 여행을 떠난다고 했지?”
“응, 달린.”
달린과는 편히 말을 놓기로 했다.
사실 함께 지내온 시간은 어디 가는 게 아닌지, 말이 후견인이지 백작 부부와 파올로는 나를 딸처럼 여동생처럼 여겨주곤 했다.
나야 뭐 이미 저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으니.
특히나 파올로는 자연스럽게 나를 대하다가 고개를 갸웃하곤 해서 웃음을 몇 번이나 참곤 했다.
“래빗 황녀님이 북부로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같이 갈 거야.”
래빗은 자신의 후손이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낸 땅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물론 래빗이 북부에 간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으니 한 번 더 가보고 싶다고.
나는 황녀님 여행에 동행하기로 했다.
“너눈 겨론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나눈 여행이 되게꾼?”
“네, 음 그렇죠? 지금은 약혼한 상태니까……. 곧 식이네요.”
라이칸에게는 일주일 전에 청혼을 받았다.
사실 귀족들이 약혼식을 올리고 몇 년간 시간을 갖다가 결혼하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는 그 과정을 생략하기로 했다.
어차피 서로를 잘 아니까 말이다.
내 손에는 예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놈이 울게꾼.”
“네? 뭐라고 하셨어요, 황녀님?”
“아니다.”
래빗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창문을 보며 예쁘게 웃었다.
“여행이 기대돼.”
* * *
북부로 오는 길은 매우 빨랐다.
하나뿐인 딸이 북부로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되자, 황제와 황태자가 온갖 편의를 동원해서 북부로 빠르고 안전하게 보내준 탓이었다.
‘역시, 수저 중 수저는 황실 수저…….’
휴고와 떠났던 여정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는데, 이건 뭐 퍼스트 클래스 석에 앉아 가는 것처럼 편안했달까.
“라이칸, 이제 표정 풀어요.”
“……나는 풀고 있다.”
북부로 간다는 사실에 조금 뾰로통함을 숨기지 못하는 예비 남편이었지만, 그마저도 귀엽게 보이니 중증이었다.
그렇게 북부에 도착했을 때, 휴고가 직접 우리를 환대했다. 마침 그가 몬스터 토벌 때문에 북부에 있을 시기였다.
“와, 정말 성대한 환영이었어요.”
“북부인들은 영애를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음…… 아하하, 하하하하하.”
내가 이제 분홍 머리도 아닌데, 달린의 모습도 아닌데 왜 환대받는 거죠?
‘닮긴 닮았으니까.’
나는 슬쩍 웃으며 라이칸의 손을 잡았다.
휴고는 빙긋 웃으며 성 안내를 했다. 라이칸이 내 눈을 가리며 움직이고 말이다.
“보지 마라.”
“엄, 진정해요, 라이칸.”
그렇게 방을 배정받고 휴식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래빗과 각자 나뉘어 움직이게 되었다.
래빗은 휴고를 따라서 가볼 곳이 있다고 했다.
“함께 갈까요?”
“……아니, 괜찮다.”
드물게도 래빗이 혼자 있고 싶어 했기에 나는 황녀님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대신 나 또한 온몸을 둘둘 휘감고 성안의 마법사에게 부탁해 모습까지 바꾸기로 했다.
“오, 예비, 크흠 아니, 영애 아니십니까?”
“앗, 리바.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어찌 된 게 분명 나는 지금 다린의 모습으로 있는데 다들 알아서 달린으로 생각하더라.
머리가 갈색이 된 달린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두 번째 퀘스트에서 열심히 신뢰도를 올렸던 마법사 리바의 도움으로 모습을 변장한 채 라이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곳도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대는 그렇겠군.”
“아하하, 아직도 삐진 거예요?”
“그 말엔 어폐가 있다, 나는 삐진 적이 없으니까.”
“그래요, 튀어나온 입술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할까.”
나는 얼른 그의 옷을 잡아당겨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는 쪽 입을 맞췄다.
“뽀뽀해주고 싶을 만큼?”
라이칸의 귀가 화륵 타올랐다.
그럼에도 표정만은 본래 가진 까칠한 얼굴 그대로였다가, 이내 내 목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입맞춤으로는 모자라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에서 진한 시간을 보내고는 나왔다.
나는 멀쩡한데, 라이칸은 옷을 벗고 싶어 할 정도로 더운 것 같지만 말이다.
“……왜, 항상 그대만 멀쩡한 거지?”
“음, 내가 더 라이칸을 사랑해서요?”
자기만 쑥스러움을 느끼는 것에 불만을 표하는 예비 남편님께 이렇게 말했더니 귀가 아주 터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까칠한 척하는 게 참 귀여우시더라.
‘요즘은 아주 아기 냥이가 따로 없다니까.’
나는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북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기억나는 곳도 있었고 새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어느 곳에 걸음을 멈췄다.
인적이 드문 마을 한편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엠버넷 씨, 들려요?’
요정은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나는 더는 요정의 사도도, 대리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다린이 된 내 몸에는 요정이 남겨준 힘이 남아있었다.
바로 ‘빙의’ 말이다.
-네, 들려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달린.
‘네, 이제는 제 이름은 다린이지만요.’
-그런가요? 그렇군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떠 바로 첫 메인 퀘스트에 들어갔을 때 큰 힘이 되어주던 기사님이었다.
나는 오늘 이 북부에 마지막 숙제를 하러 왔다.
‘엠버넷, 난 오늘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러 왔어요.’
-…….
잠시 침묵하던 엠버넷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이 사려 깊은 기사는 마치 많은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고요하게 대답했다.
-달린, 아니, 다린. 나는 그대에게 도움이 되었나요?
이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따뜻하고 다정했다.
‘……물론이에요.’
나는 어느새 눈을 축축히 적신 눈물을 닦으며 속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게 있어 두 번째로 좋아하는 기사님이에요. 최고는 로아타 황제님이에요 미안해요.’
-너무나 이해되는 말인걸요.
엠버넷이 작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귀를 둥둥 울린다.
-저도 그러니까요.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이 사람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보내면 다시 보지 못할 테지만…… 이것은 또한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당신 또한 다음 생에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상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어떤 위대한 존재가 당신의 다음 삶은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린, 한 가지만 조심스럽게 바랄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나는 이 우직한 기사님의 충정을 얕보았던 게 아닐까.
-……제가 받을 수 있는 행복한 삶은, 다시 태어나신 황제 폐하께 넘겨드릴 수 있나요?
‘…….’
나는 다시금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끕끕 울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약속, 할게요. 당신도, 래빗도, 아니 로아타 황제님의 이번 삶도 행복해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