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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81화 (완결) (281/281)

◈281화. 5. 에필로그 (2)

-네, 고마워요. 다린.

엠버넷은 그제야 만족한 듯 나직하게 웃었다. 목소리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목소리일 것 같았다.

-난 당신을 만나 행복했어요.

내 몸에서 천천히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엠버넷의 영혼이었다.

우리는 잠자코 서로를 마주했다.

“엠버넷,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저 성으로 가요. 저곳엔, 그분이 있어요.”

로아타 황제라고 말하지 않아도 엠버넷은 바로 이해한 것 같았다. 그녀의 두 눈이 커지더니, 이내 인자하게 웃었다.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어요.”

고개를 숙인 내 기사님이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이내 천천히 사라졌다.

그녀가 남긴 바람마저 이 북부의 서늘함에 어울리지 않게 따뜻했다.

말없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노라면, 어깨로 다정한 체온이 닿았다.

“……괜찮은가?”

“……응.”

나는 라이칸의 품에 안겨 한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요, 갈 곳이 한 곳 더 있어요.”

오늘은 래빗도 나도 바쁠 것 같다.

래빗은 오늘 그리운 얼굴을 보겠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익숙한 분수대였다.

바로 ‘둑스’의 분수대였으니까.

‘오늘도 사람이 많구나.’

나는 라이칸과 함께 줄을 선 채 차례를 기다렸다.

그렇게 내 차례가 되어 천천히 분수대에 손을 담갔을 때였다.

“어어, 저기 아가씨 물은 만지면 안…… 헉!”

물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인간!

이전에도 한 번 온 적 있는 둑스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살랑살랑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둑스가 있었다.

-내 영역에 왔구나! 그렇지 않아도 보고 있었다 컁!

“응, 안녕. 둑스.”

둑스가 내게 폴짝 뛰어왔고, 나는 그대로 작은 여우를 꼬옥 안아주었다.

“이렇게 보는 건 오랜만이지? 내 이 모습은 처음 보겠네? 바로 알아봤구나.”

-당연하다! 이 몸은 신! 영혼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컁!

그렇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신일 거야. 요정 그런 놈들과 다르게 말이야.

나는 오랜만에 요정 놈들을 욕하며 둑스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둑스, 오늘 나는 너와의 계약을 종료하러 왔어.”

-그게 무슨 말이냐……? 컁! 인간, 어디론가 가는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이곳에 없었던 3개월 동안 요정에게 들었다.

둑스와의 소환 계약은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가능했으며, 내가 이대로 둑스와 소환 계약을 유지하면 둑스가 힘을 회복하고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는 데 힘이 더 들 거라고.

“이런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고자 해.”

둑스는 말간 눈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이상하구나, 인간. 너는 왜 욕심내지 않아? 컁, 이 몸의 힘은 커다란 힘이다.

“맞아, 하지만 더는 내게 그런 힘은 필요하지 않게 됐으니까.”

더는 기를 쓰고 생존할 필요도, 위험도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친구가 자유롭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이 계약에는 요정이 관여했다.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들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우리의 계약이 해지되고 네가 자유롭게 된다고 해서, 우리가 친구가 아닌 건 아니니까.”

-……인간, 너는 내 친구와 같은 말을 해, 컁.

둑스의 친구,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던 사람.

“응, 하지만 나는 그 친구처럼 돌아가진 않을 거야. 이 세계에 있을 테니.”

-놀러 가도 돼?

“물론이야.”

이렇게 말하는 순간 빛이 뿜어져 나왔다.

둑스와 나 사이에 연결된 황금색 끈이 보였다. 그것은 곧 마치 칼을 댄 것처럼 뚝 끊어졌다.

동시에 둑스의 몸에서 황금빛이 맴돌았다.

“아, 그리고 그간 계약의 대가로 어떤 위대한 존재가 네 신격을 되찾게 해준대.”

-컁, 요정이구나.

“응.”

둑스는 땅으로 내려와 빙글빙글 돌더니 꼬리를 흔들었다. 둑스의 몸이 조금 전보다 더 커진 기분이 들었다. 아마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인간! 몸에 힘이 넘쳐!

“응, 잘됐다.”

-인간, 이렇게 욕심 없는 인간은 친구를 빼고 처음이다!

“그래?”

-그래서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 컁!

“내 소원……?”

-응, 네 몸 안에 남아있는 힘의 주인은 어떡하고 싶어? 컁, 이 몸이 지금 상태라면 꺼내줄 수 있다, 컁!

내 눈이 잘게 흔들렸다.

내 몸에 남은 힘이라면.

-그 엄청난 마력 말이다!

그건, 발데르의 힘이었다.

“정말…… 꺼내줄 수 있어? 정말로?”

-지금 이 몸이라면 가능하다, 컁.

입술이 떨려왔다.

이렇게 나를 도와준 이들에게 사례하는 건 지난 3개월간 협상 끝에 뜯어낸, 아니 얻어낸 쾌거였다. 그런데 이 쾌거가…….

내게 남은 마지막 후회와 미련을 지워줄 수 있다니.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니.

-인간, 원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와줘.”

* * *

발데르는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이곳은 모든 것이 멈춰버린 세상이었다. 아무것도 없으며, 있는 것이라곤 허상을 덧씌운 것뿐.

드넓은 세상에 자신 홀로 존재했다.

외로움은 없었다.

그에게는 권태감과 나른한 만족감 그리고 그리움만이 존재했다.

‘얼마나 지났더라, 시간이…….’

발데르는 눈을 깜빡였다.

잠을 자도 눈을 감았다 떠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건 동시에 자신이 여기에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잊게 된다는 소리와 같았다.

뛰는 법을 잊었고, 다음엔 걷는 법을 잊었다.

언젠가 앉는 법도 눕는 법도 잊는다면.

그 다음은 숨 쉬는 법을 잊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렇게 발데르는 천천히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잊다가 언젠가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나면 당신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울지 말아요.”

그러나 시간이 멈춘 세상 속에서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오히려 시간이 멈추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한 건, 당신의 얼굴이었다.

“……사실 거짓말했어요.”

오랫동안 그는 마음 한구석으로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복수를 위해 움직였지만,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친구를 기억한다는 외로움은 어딜 가나 그를 쫓아왔다.

“당신은 운명을 거절하면 죽잖아요? 그건 싫어요. 그리고 달린, 말했듯 나는 남기를 원해요.”

때로는 자신이 미쳐간다 생각했을 때, 나타났던 사람.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외로움을 견뎌오던 사람.

그와 다르게 의연하고 단단하던 사람이었다.

가냘픈 외모 속 흘러나오는 의지에 끌리고 만 것은 불가항력이었으리라.

“나를 버려요.”

거짓말이었다. 그녀의 선택을 돕기 위해서 진심을 숨겼다.

사실은 살고 싶었다. 그녀의 옆에서, 곁에서. 오래도록.

당신을 보고 싶었노라고.

“약속할게요.”

시간이 멈춘 이 세상에서 나는 불가능을 믿고 있어요, 달린.

당신이 언젠가 나를 데리러 오는 날이 올 거라고.

저 꽉 닫힌 하늘이 열리는 날…….

거짓말처럼 당신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하염없이 영원히 하늘만 바라보겠지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초점 없던 발데르의 눈이 커졌다.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하늘이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몹시도 푸른 하늘이었지만 일렁거림이 존재하는 기묘한 하늘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을 상징하듯 낮도 밤도 아닌 형벌과도 같은 하늘이 무너진 자리, 조각난 하늘 사이에 누군가 둥실 떠 있었다.

낯선 머리색,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대마법사는 영혼을 볼 수 있다.

발데르의 입으로 오랫동안 잊었던 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달린.”

자신을 바라보던 여성이 생글 웃었다.

“한 번에 알아봐 줬네요?”

여성은 자신을 다린이라고 소개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가 생을 포기하고서 돕고자 했던 그 사람이었다.

“당신들은 모두 나를 한 번에 알아봐서 참 신기해요.”

다린이 발데르에게 다가왔다.

누운 채로 멍하니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신에게.

“고마워요. 그리고 힘들었죠? 미안해요.”

가느다란 손이 뻗어졌다.

“약속, 지키러 왔어요.”

불가능이 다가왔다.

이것을 뭐라고 하더라……?

발데르는 느릿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에서 한 단어를 떠올렸다.

그래, 기적이다.

“함께 돌아갈까요?”

그의 손이 다린의 손을 잡는 순간 따뜻한 빛이 퍼져 나왔다.

발데르는 깨달았다. 아니, 이미 깨달았던 사실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역시, 나의 기적 같은 사람이에요.

다린은 그렇게 마음에 걸리던 마지막 가시를 뽑아냈다.

약속은 지켜졌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는 약속. 그리고 당신을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

“발데르.”

다린은 활짝 웃었다. 얼굴은 바뀌었지만 언젠가 발데르가 반하고 말았던 그 미소 그대로.

“우리, 우리 세상에서 다시 봐요!”

* *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난 분수대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것도 하체는 분수대에 들어간 채로.

흠뻑 젖은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시감이 들었다. 젖은 옷을 보며 푸흐, 작게 미소지었다.

투둑, 흘러내린 물이 머리로 튀었다. 마치 누군가 꼬리로 물을 친 것처럼 말이다.

난 이것이 둑스의 장난임을 깨닫고 더욱 크게 미소했다.

“고마워, 둑스.”

내 작은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또 한 번 물방울이 머리를 적셨다. 뺨으로 부드러운 꼬리 같은 것이 스친 것 같기도 했다.

“다린.”

어깨로 다정한 체온이 닿는다.

돌아보면 나처럼 분수대로 들어온 라이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게 허락을 구하고는 함께 분수대를 나왔다.

나는 라이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씨익 웃었다.

“마지막 소원을 이뤘어요.”

“그런가.”

아마, 지금쯤 마탑은 오랫동안 잊었던 주인을 다시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고인 마력이 많은 탓에 그가 돌아가는 장소는 마탑이 될 거라고 둑스가 말해주었으니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또한 발데르의 존재가 돌아왔을 것이다.

잊혀진 시간에서 돌아왔다는 건 그런 거니까.

“흐응, 안 놀라요? 나 마지막 소원은 다른 남자를 위해 써버렸는데.”

“괜찮아.”

라이칸이 나를 향했다. 쑥스러운 얼굴 대신에 평온하고도 태연한 표정.

하지만 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곧 미소가 스쳤다. 나만이 볼 수 있는 행복감에 젖은 얼굴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그대의 마음엔 내가 있을 테니까.”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많이 성장했네요, 우리 황자님. 아직은 질투쟁이면서.”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맞아요, 질투해주는 것도 좋더라. 더 힘내봐요.”

“힘은…….”

라이칸이 잠시 하늘을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뭐라 하는지 들리지 않아서 재차 물으니 귀를 빨갛게 물들이면서 부러 침착하게 다듬은 표정으로 말했다.

“……침대에서 내도록 하지.”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르른 하늘, 시원한 바람이 부는 이곳에 어디선가 봄 내음이 스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품에서 내려와 라이칸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래요, 우리 이제 갈까요?”

그의 손을 뺨에 올린 채로 웃는 내 얼굴은, 지금 내 눈에 비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과 같으리라.

“결혼식 하러.”

아주 행복한 얼굴 말이야.

띠리링-.

[요정은 ‘다린’의 결혼을 축하하고 싶어요!]

[요정은 ‘다린’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당신에게는 요정의 축복이 함께합니다!]

꺼져, 이놈들아.

나는 찡그리며 이 세상의 절대자를 노려보았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지?”

“아뇨.”

행복해서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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