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8화 (58/231)

058화

어느 공략 팀이든 가장 침착하고 차분하고 이성적인 헌터가 리더를 맡는다.

민간인들은 가장 강한 헌터가 리더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강함은 상관없었다.

서지한의 공략 팀의 리더도 강한 공격계 헌터인 서지한이 아니라 가장 신중한 성격인 방어계 반서후가 리더를 맡았으니까.

팀의 성향은 리더의 성향에 따라 크게 나뉜다.

리더가 휴식 없이 전투, 전투, 전투만 외치는 전투광이면 칼질하다가 지쳐서 다 죽는 꼴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리더는 언제나 가장 신중하고 걱정 많은 사람이 맡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지한은 내가 리더에 적절한 타입이라고 했는데, 욕인지 칭찬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왜냐면 ‘쓸데없이 걱정 많은’ 사람이 리더로 좋다고 했거든. 으음.

“야, 너 진짜 뒈지고 싶냐?”

단숨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얼굴에 살기를 띤 반서진이 성큼성큼 걸어서 백대만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멱살이라도 잡을 분위기라 나는 그저 조마조마했다.

아니, 입장한 지 5분도 안됐는데 이렇게 싸운다고요? 진짜?

“야? 너 지금 야라고 했어?”

“아이고, 우리 리더님 귀가 멀었나. 이래서야 몬스터 소리도 못 듣고 뒈지시겠습니다?”

“계집애가 입이 이렇게 더러워서야.”

“뭐? 너 말 다했어?”

노희망이나 노미래가 그나마 이 자리의 최연장자들이니 좀 말려줬으면 좋겠는데 둘 다 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어이쿠, 노희망은 인벤토리에서 술병도 하나 꺼내서 마시고 있었다.

그 사이 분위기는 점점 더 나빠져서 서로 주먹질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망했다, 망했어.

이 팀은 망했어.

한탄하는 나와 달리 서지한은 눈을 반짝이며 홍미진진해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소곤소곤 물었더니 그가 씩 웃었다.

- 이렇게까지 개판이면 오히려 흥미롭지 않아? 그냥 즐겨.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 하잖아. 팝콘 가져왔어?

“가져왔겠습니까.”

- 아쉽네. 과자라도 먹어.

“됐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으니 서지한은 어디서 났는지 투명한 유령 팝콘을 꺼내고 영화관 안경까지 쓰며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저기, 옷만 갈아입을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거 어디서 났어요?

“누가 좀 말려줬으면 좋겠는데.”

- 곧 을 거야.

누구요?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서지한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한 땅울림이 느껴졌다.

두두두두 하는 미세한 진동.

백번 양보해도 사람이 낼 만한 기척이 아니다.

땅울림이 더 강해지자 한바탕 하려던 백대만과 반서진도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울림이 느껴지는 방향이다.

멍하니 앉아 있던 노미래도 긴장해서 무기를 꺼내 쥐는 와중에, 노희망은 남은 술을 알뜰하게 다 마시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백대만과 반서진의 싸움을 말려줄 충왕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카만 독니를 자랑하는 거대 거미였다.

하나, 둘, 셋…….

빠르게 세어보니 열세 마리 정도 된다.

- 여기 몬스터는 다 독충이야. 해독 포션 미리 마셔뒀으니 별로 걱정할 건 없어. 대부분 말랑말랑해.

별로 말랑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심드렁하게 말하는 랭킹 1위의 말과 달리 열세 마리의 거대 거미는 마치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아까와 달리 확연하게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사기 고양 발동.”

노희망이 뭔가 스킬을 사용했는지 팀원들의 몸에 잠시 빛이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약간 침착해지고 전투에 집중이 잘되는 느낌이다.

몸도 좀 가벼워진 것 같고.

아주, 아주 아주 미미했지만.

노희망, 그래도 보조계 헌터 맞는구나.

모두들 언제 꺼냈는지 저마다 무기 같을 것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맨손인 것은 나와 노희망 뿐이었다.

아, 노희망도 다 마신 술병을 깨서 쥐고 있긴 하다.

그, 술병의 단면이 날카롭긴 하는데.

그걸 사람에게 향하면 흉기로 분류되어서 형량이 올라가긴 하는데, 아니, 그게…….

백대만은 무슨 흉악한 안마봉 같은 철퇴를, 반서진은 기다란 손톱이 있는 너클을 끼고 있었다.

노미래도 희미하게 빛나는 방패를 끼고 있었는데, 저 빛은 아마 스킬 효과인 것 같았다.

나도 뭔가 무기를 장만할 걸 그랬나.

하지만 마켓에 올라와 있는 장비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지만 가만히 보니 저것도 그냥 아이템이 아니라 일반 무기들인데, 그거라도 좀 사둘 걸 그랬나 보다.

“더럽게 많네!”

백대만이 반 욕설 같은 것을 내뱉으며 쉼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서지한은 말랑하다고 했지만 이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 같다.

최선두에 있는 백대만, 반서진은 벌써 힘에 부친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이 거미와 마구 뒤엉켜 싸우면서 위험해지는 순간마다 노미래가 나섰다.

그의 방패에 닿은 몬스터는 잠깐이지만 전투 의지를 잃은 듯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이 거미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있어서 숫자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난전의 틈에서 나는 충왕포를 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워낙 딱 붙어서 싸우고 있는 탓에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해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두 집단이 살짝 뒤로 물러선 순간을 노려 충왕포를 날렸다.

손으로 쏘는 약한 버전으로.

내 손에서 뻗어나간 빛줄기는 열세 마리의 거미 중 후미에 있던 놈에게 직격 했다.

통통한 배가 그대로 터져 죽었다.

내장인지 뭔지 이런저런 부산물이 튀어나오고 흘러나온 독액으로 바닥이 약간 부식되었다.

이어서 2 격, 3 격을 날려주자 거미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앞에서 막아주는 선이 있으니 조준하고 쏘기만 하면 되어서 편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숫자가 줄어든 거미가 마침내 두 마리 남았다.

거의 딱 맞게 내 마력도 다 썼다.

마력 회복 포션을 마시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비교적 여유롭게 전투를 끝냈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빌어먹을!”

이미 체력이 거의 바닥났는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백대만이 거칠게 소리쳤다.

이유는 나도 곧 알 수 있었다.

이 거미들이 들어온 통로 뒤편에 후속부대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전갈이군.

이래서야 끝이 없겠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력 회복 포션을 따서 마셨다.

“물러서요. 다 이쪽으로!”

나는 손을 치켜들고 충왕포를 발동했다.

뒤돌아본 세 사람은 내 손에서 빛나는 힘을 보고 뭔가 느꼈는지 재빨리 현장에서 몸을 뺐다.

그리고 이어서 나의 충왕포가 작렬했다.

통로의 천장 부분에.

콰이앙!

빛줄기가 천장의 암석지대를 박살 냈다.

바위가 떨어지는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숨 막히는 기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먼지가 가라앉은 후 살펴보니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던 통로는 돌과 바위로 꽉 막힌 상태였다.

불운한 몇 마리가 깔려 죽었는지 돌 사이로 벌레 다리 같은 것이 조금 보인다.

그래도 건너편에 아직 꽤 많은 숫자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체력을 회복할 시간은 벌었다.

“일단, 임시 바리케이드라고 생각하고. 여기 캠프 꾸리죠.”

조용히 건넨 내 제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행히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났네요.”

“어쩐지 좀 지치더라.”

반서진이 드물게 픽 웃으며 내 말을 받아주었다.

좋아. 분위기 나쁘지 않아. 제발 이대로만 가자.

그러나 백대만이 내 바람을 배신하며 이죽거렸다.

“벌써 지친다고? 이래서…….”

리더라는 자각은 어딘가 가져다 버린 건가?

싸움이 나지 않도록 조율해도 모자랄 판에 팀원에게 계속 시비를 걸다니?

2차전이 시작되면 어쩌나 했는데 반서진은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숨이나 쉬고 말해라. 얼굴 터지겠다.”

그 말대로 백대만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발광구 불빛 아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번들거렸다.

오히려 반서진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데 내색하지 않으려는 티가 났다.

이러다 또 싸우겠네.

어차피 말려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나대로 캠핑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인벤토리에서 던전 모닥불을 꺼내 자리에 놓고 불을 피웠다.

마켓에서 10만 원 정도에 거래되는 던전 모닥불은 한번 설치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회수할 수 있어서 편리했다.

불을 피울 때 유독 가스가 나오지도 않고.

게다가 안에 넣는 장작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특수 효과를 제공하기도 했다.

특수효과는 모닥불의 온기를 쬐면 얻을 수 있는데, 장작은 주로 가르니드 장작이 많이 사용된다.

제일 저렴하고 흔하고 효과가 무난해서.

가르니드 장작의 특수효과는 전체적인 신체 컨디션 개선이다.

나에게는 지난번 수왕류 던전에서 얻은 가르니드 원목이 많이 있었지만 워낙 통나무 그대로라 장작으로 쓰긴 적절치 않아서 따로 가르니드 장작을 좀 샀다.

그 김에 원목도 약간 팔아치우고.

아무튼 이만 한 땔감을 인벤토리를 거의 소모하지 않고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 장작은 충분히 쓸 만했다.

가격도 크게 비싸지 않고.

“가르니드 태웠네.”

뭔가 왁왁 거리는 백대만을 무시하고 반서진이 불가에 다가앉았다.

타오르는 녹색 불빛 아래 몬스터들의 체액으로 얼룩진 얼굴이 보였다.

비척비척 걸어오는 백대만의 모습도 그녀와 비슷했다.

“닦으세요.”

인벤토리에서 물티슈를 꺼내 건넸다.

반서진은 잠시 나와 물티슈를 번갈아 보더니 약간 떨떠름하게 몇 장 뽑아 갔다.

백대만에게도 건넸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싸울 건데 지금 닦아봐야. 뭐, 깔끔 떠는 누구는 좀 다른 거 같지만.”

계속되는 백대만의 신경 긁기에 반서진은 아예 상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 태도에 백대만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좀 풀렸다.

그리고 고주망태가 된 노희망이 슬쩍 다가앉았다.

모닥불 옆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마력 사용으로 피로해진 머리와 지친 몸이 약간씩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나도 노미래는 올 생각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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