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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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당최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마부의 이마와 눈에서 따뜻한 물기가 흘렀다. 그것을 몇 번이고 닦아 낸 그가 자꾸 미끄러지는 고삐를 단단히 손에 쥐었다.
정해진 곳까지 마차만 몰면 큰 보수를 주겠다고 하여 신이 나서 왔거늘.
‘대체 저게 뭐란 말이야……!’
사람이 맞기는 한 건지, 마차에 탄 이는 새카만 연기를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눈은 피를 머금은 듯 붉었고, 몸을 포박한 단단한 밧줄은 비를 맞은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설마 누군가가 소리쳤던 대로 신탁의 마왕인 건 아니겠지.
‘이, 이, 이대로 죽는 건가?!’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자꾸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이 흘러갔다.
마부가 고삐를 쥔 손을 덜덜 떨고 있을 때였다.
쾅!
그의 얼굴 바로 옆에서 레이나의 손이 뚫고 나왔다.
“으아아아악!”
기겁한 마부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고꾸라지자, 놀란 말이 길을 이탈하여 발광하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잠시 뒤, 진정된 마차에서 내린 레이나가 기절한 마부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괜찮아요?”
하지만 당연히도 마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놀라다 못해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부수려던 게 아니라 노크하듯 가볍게 두드려서 잠깐 여관에 들러 씻고 가자고 말하려 했을 뿐이었는데.’
불행히도 ‘이 몸의 주인’이 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힘 조절이 힘들었다.
사실 ‘레이나’는 [이 세계는 사랑의 힘과 함께]라는 게임 속의 악역이었다.
그것도 여자 주인공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알차게 괴롭히다가 사랑의 힘으로 퇴치당하는 최종 보스.
‘거창한 마법도 아니고, 사랑의 힘이라니……. 멋대가리 없어.’
왜 그런 저세상 멋대가리 없는 마법에 당하는 끔찍한 몸의 주인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사정이 길었다.
전생의 자신은 시한부 신세나 다름없었다.
딱히 큰 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타고난 신체가 약했다.
그래도 나름 스무 살까지 살았는데, 더 살지 못해서 아쉽지 않냐고 묻는다면…….
아니. 결코 후회나 미련 따윈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딸들밖에 없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 인생이 그리 좋았을 리 없으니까.
돈은 없는데 치료를 안 해 줄 수도 없고, 치료한다고 낫는 것도 아니고, 호전될 기미조차 안 보이고.
그렇지 않아도 챙겨야 할 자식들이 줄줄이인데, 얼마나 더 살지도 모르는 저 짐 덩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말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병원비를 낼 때마다, 아파서 방에 틀어박힌 자신을 볼 때마다, 부모님의 한숨이 땅이 꺼지듯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몇 년밖에 더 살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건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런 삶이었기에 오히려 수명이 다할 때가 되자 기쁘기까지 했다.
하필이면 가족들이 모두 외출하여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차게 식어 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제발 바라건대,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간절히 바라며 숨을 거둔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눈앞에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형상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것이 망자를 인도하는 죽음의 신이라는 것을.
‘정말 사후 세계라는 게 있었구나.’
감탄하는 것도 잠시, 신은 그녀의 삶을 순식간에 훑곤 짧은 감상을 내놓았다.
- 가장 큰 행복을 느낀 것이 홀로 죽었을 때라니, 썩 가여운 인생이군.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할 거면 애초에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게 해 주든가.
아니면 병원비 걱정 없을 부잣집에 태어나게 해 주든가. 둘 중 하나는 했어야지.
참으로 고맙기도 해라. 그녀는 조소하며 물었다.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평생 신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았으니…… 지옥에 가나요?”
흔히들 그랬다.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불행히도 그녀는 자아가 생겼을 때부터 신을 증오했다.
왜 하필이면 자신만 이런 아픈 몸으로 태어나게 했는지 수도 없이 원망했다.
신이 있다면 자신에게 이런 불행을 몰아 줄 리가 없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신 따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진짜로 신이 있다니. 그럼 평생 신을 증오한 자신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아픈 몸으로 태어나 고통만 받은 것도 억울한데, 지옥에까지 떨어지게 될 줄이야.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악인 인생을 사는구나.
억울해서 울분이 치미는데, 감정 없는 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 아니, 네게 다시 기회를 주겠다.
“기회? 무슨 기회요?”
-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지.
“다시 태어나라고요?”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전보다 나은 몸으로, 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물론 그게 지옥보다야 낫겠지만, 이미 지어 버린 죄 때문에 어차피 그 뒤에 지옥에 가야만 한다면, 불행한 삶을 한 번 더 살고 가는 것보다는 지금 가는 게 나았다.
“싫-”
- 바라는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 주겠다.
그래서 싫다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지옥에 떨어지기는커녕, 바라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겠다는 대답에 그녀의 말이 멈췄다.
‘바라는 모습이라니, 평생 행복하기만 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해도?’
예를 들면-존재 그 자체만으로 모두가 좋아하고, 아껴 주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 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며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딱 한 명 존재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런 운명인 존재가 있기는 했다.
심지어 대가도 없이 갑자기 대단한 능력을 갖게 되어 세상 모두를 구원하기까지 하는.
‘그 사람이 된다면……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한다면, 어쩌면 지금 지은 죄를 씻고 지옥에 가지 않을 수도.’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그녀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뭐든 가능한 건가요? 사실 되고 싶은 사람이 있기는 해요. 살고 싶었어요. 그렇게 행복하게, 멋지게, 대단하게.”
- 좋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말투였으나, 흔쾌한 승낙에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싶어서 몰래 손바닥도 꼬집어 보았다.
죽어서 그런지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꿈이라도 좋았다.
‘그 사람처럼 될 수만 있다면.’
심호흡한 그녀는 실수하지 않게 천천히,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일생일대의 다시없을 기회였다. 최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게임 속 인물까지 세세히 알진 못할 테니까.
“죽기 전에 했던 게임 속의 인물로 다시 살고 싶어요. 제목은 [이 세계는 사랑의 힘과 함께]예요.”
아름다운 그림과 꽉 찬 내용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임이었다.
주인공 이름이 뭐였더라. 아, 이름이 없었지. 처음에 시작할 때 정하는 거였으니까.
여기서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단순히 주인공이라고 해도 되나?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그렇게 설명하면 알아들을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고민하던 그녀는 조금 설명을 보탰다.
“거기에 등장하는 캐릭터인데, 레벨이 999인 최종 흑막 공녀 레이나 루벨라이트가-”
- 알겠다.
레이나 루벨라이트가 처음부터 끝까지 괴롭히지만,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역경을 헤쳐 나가는 ‘여자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말하려 했는데.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끌어서인지, 신은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대답했다.
“아니, 잠-!”
- 바라던 것을 들어주었으니, 이번 삶은 부디 행복하기를.
축복과 함께 신의 몸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 그녀를 감쌌다.
‘잠깐만! 아니야! 기다려!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의 빛에 파묻힌 순간부터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몸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저항해 보려고 눈을 파르르 깜빡이는데,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기다려! 설마 이대로 레이나가 되는 건 아니지? 내 머릿속을 읽고 알아서 여주로 만들어 주는 거지? 신이잖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잠시 뒤, 신은 온데간데없이 새로운 공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음습하고,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잠깐만, 여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레이나가 10년이나 유폐되어 있었던 방이었다.
“안 돼-!”
새로운 인생이 망할 신의 저주와 함께 감옥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