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6화
거지도 이런 거지가 없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니 꼴이 아주 말이 아니었다.
‘……마부 아저씨, 다시 봤어. 토하지 않은 게 용하네. 일단 씻자.’
이대로 있다간 자신부터 토할 것만 같았으니까.
레이나는 속에서 무언가 역류할 것 같은 느낌을 애써 참으며 아까 찾았던 욕실로 서둘러 이동했다.
그곳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대형 욕조는 물론이고, 얼어붙은 비누, 얼어붙은 샴푸 같은 목욕 용품들이 잔뜩 구비되어 있었다.
힘으로 그것들을 빠르게 해동한 뒤 욕조에 눈을 잔뜩 넣고 녹이자, 따끈한 목욕물이 완성되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 거적때기 같은 옷을 벗고 욕조 속으로 뛰어들었다.
“와, 이런 미친……!”
따뜻한 물이 몸을 싹 감쌌다. 검은 불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전신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가 바로 천국인가.’
더러운 몸 때문에 물이 금방 지저분해졌지만, 괜찮았다.
조금 귀찮아도 밖에 널린 눈을 다시 퍼 와서 녹이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게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목욕을 마친 레이나는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 낸 뒤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세상이 이리도 쾌적했다니.’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상쾌함이란 말인가.
게다가 불편할 줄 알았던 드레스가 생각보다 편했다.
원래 따뜻해 보이는 털옷을 입으려고 했지만, 너무 커서 울며 겨자 먹기로 드레스를 입은 건데.
자신이 너무 말라서인지, 너무 딱 붙지도 않고 움직이기 수월했다.
“……심지어 너무 예쁘잖아? 옷 말고, 내가.”
대체 아까 그 상거지는 뭐였던 걸까. 환각이었나. 못 본 걸로 하자.
싶을 정도로 더러움을 씻어 낸 레이나는 너무 예뻤다.
‘게임에서 표독스럽게 저주를 내리거나, 분노하고 화를 내던 모습밖엔 기억에 없어서 잘 몰랐는데.’
늘 화사한 꽃 배경을 깔아 주던 여자 주인공과는 다른 느낌으로 몹시 예뻤다.
‘머리 색 뭐야, 이거. 솜브레인지, 옴브레인지, 투톤인지 아무튼 그거 같잖아?’
원래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머리 색은 대대로 붉었는데, 갑자기 생긴 거대한 마력 때문에 색이 바래 버린 레이나는 은발과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게다가 피로 물든 줄 알았던 눈은 알고 보니 짙은 자주색이었다. 그것이 은발과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풍겼다.
10년이나 갇혀 지낸 탓에 피부가 너무 하얗고, 심히 말라 있기는 했지만, 그러한 단점들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레이나의 겉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때문에 한참이나 거울 속 모습에 매료되어 있던 그녀는, 뒤늦게 마부가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봐! 마부! 어디 있어?”
육포 몇 개를 챙겨 현관 쪽으로 서둘러 가자 다행히 바로 마부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이 저택을 탐험하고, 씻고, 말리고, 거울에 빠져 있는 동안 내내 짐을 옮겼는지 얇은 겉옷 위로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도, 도, 도, 동상이 너무 무, 무거워서 시, 시간이 걸렸, 습니다.”
추위를 이기지 못한 그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겨우겨우 말했다.
마부의 뒤로 공작에게서 뜯어 온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의 말대로 분명 혼자서는 옮기기 힘들 정도로 크고 무거워 보였다.
아니, 대체 어떻게 옮긴 건가 싶을 만큼 몹시 무거웠을 것이 분명했다.
‘……사람이 참 왜 이렇게 성실하면서도 미련한 거야?’
너무 무거우면 나중에 하든지, 무겁다고 말하든지.
미안한 마음에 괜히 푸념한 그녀는 챙겨 둔 육포를 그에게 건넸다.
“빨리 먹어. 배를 곯아 쓰러지면 내가 힘들어지니까.”
그는 레이나가 내민 육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먹지 않고 쥐고만 있기에 노려보자 그가 허겁지겁 육포를 삼켰다.
그게 또 왜 그렇게 불쌍해 보이는지.
‘아, 정말. 이런 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은데! 평범한 아저씨한테 대하듯 하고 싶은데, 그러면 또 살려 달라고 할 거 아냐.’
주먹을 꽉 쥐고 마음을 다잡은 레이나는 최대한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1층 오른쪽에 식량 창고가 있어. 번거롭고 귀찮게 내가 챙겨 주기 전에 알아서 챙겨 먹도록.”
하세요. 아저씨, 몸 망치니까.
라는 말은 속으로만 덧붙인 그녀가 그에게 따뜻한 옷과 침실, 욕실이 있는 장소를 차례대로 일러 주었다.
입 안에 육포를 가득 넣고 냅다 고개만 끄덕였기에 알아들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병 걸리지 않게 주의해. 따뜻한 물 받아 놨으니까 씻고, 따뜻한 옷 입고, 따뜻한 방에서 자고. 알겠어?”
여기까지 해 두었으니 알아서 잘 지내겠지. 아, 마지막으로.
“까먹을 수도 있으니 급여는 지금 미리 지급해 둘게.”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급하게 떠나야 할지도 모르니, 급여는 지금 지급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현찰은 없으니 언제든 바로 돈으로 바꿀 만한 걸로 주는 게 좋겠지.
‘그럴 만한 게…….’
주변을 둘러보자 마침 있었다. 레이나는 초대 공작의 황금 동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게 어느 정도 가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이니까 비싸겠지. 이걸 다 주는 건 좀 오버 같고, 대충 이 정도면 되려나.’
동상의 손목을 움켜쥔 그녀가 힘을 사용해 손과 팔을 분리했다.
힘 조절이 아직 미숙해서인지 중간에서 녹은 금이 바닥으로 주르륵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레이나는 동상에서 떨어져 나온 손을 마부에게 휙 던졌다.
“가져.”
“헉!”
갑자기 두 손 가득 황금 덩어리를 받게 된 마부가 기겁했다.
‘이게 급여라고……?!’
평생을 벌어도-아니, 평생을 넘어 다음 생의 다음 생까지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손가락 하나 가질 수 없을 텐데.
‘그런 엄청난 금액을 급여라고 아무렇지 않게 준다고? 내가,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심지어 동상의 손도 문제였다. 이 손의 주인은 초대 황제와 함께 건국 신화를 완성한 위대한 영웅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위대한 분의 손을, 그것도 정성스레 분리한 것도 아니고 대충 아무렇게나 떼어 내 급여로 받게 되다니.
누군가가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격분할 일이었다. 아니, 당장 목이 날아갈지도.
마부가 손목이 절단된 동상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의 레이나를 번갈아 보았다.
‘대체 저분은……!’
뭐지. 뭐 하는 사람이지.
신탁의 마왕인가 싶었더니 자신을 구해 주고, 갑자기 초대 공작의 황금 손을 급여랍시고 주며 고용하겠다니.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마부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직 뭐가 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드디어 찾았다, 내 주군!’
이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곳이었다. 마부에게 평생 직장이 생겼다.
*
자신도 모르게 충성심 가득한 부하를 얻게 된 레이나는 그가 편히 먹고 쉴 수 있도록 ‘미천한 것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다.’는 말을 흘린 뒤,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웠다.
“너는 여길 치우고 쉬든지 말든지 해. 단, 내가 돌아왔을 때 다시 눈에 띄었다간 가만두지 않겠어.”
“예, 예, 예! 다, 다녀오십시오!”
마부가 185도로 허리를 숙여 레이나를 배웅했다.
좋은 방법인 것 같지는 않지만, 신탁 때문에 생긴 이미지 때문에 막돼먹고 재수 없게 말을 해야 의사소통이 잘되었다.
사실 지난 생에서도 몸이 아파 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어떻게 해야 착하게 말하는지도 잘 몰랐기에 내심 편했다.
‘그나저나 어디 가지? 자기에는 너무 시간이 이르고, 저택 안은 이제 둘러볼 곳이 없는데.’
아무래도 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부가 저택 안을 편하게 둘러볼 시간도 필요할 테니.
그리 결심하며 문밖으로 나선 레이나는 1초 만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추워.”
뭐가 이렇게 추운 거람. 능력이 없었다면 바로 얼어 버렸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였다.
마부는 여길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짐을 옮긴 거야? 그 오랜 시간 동안?
‘어휴, 정말. 미련 곰탱이 같으니라고. 사람이 조금 약은 구석이 있어야지. 왜 이러는 거야, 정말? 미안해 죽겠네.’
괜히 짜증이 난 레이나는 투덜대며 불꽃을 여러 개 만들어 곳곳에 설치했다.
“마부는 물론이고, 지나가는 동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어떤 생명체에게도 해를 끼치면 안 돼. 물론 눈보라에 절대 꺼지면 안 돼. 밤에 길을 잃지 않게, 은은한 빛도 좀 내 봐. 알겠어?”
무리한 주문에 불꽃은 대답이 없었으나, 레이나는 계속해서 그것들에게 분노를 내포한 주문을 읊조렸다.
저택 안팎에 몸을 녹일 불꽃을 만들고, 구조를 파악하고, 알려 주고, 걱정하기까지.
당최 누가 하인인지 모르겠다고 맛집 욕쟁이 할머니처럼 구시렁대며 한참을 움직이자, 저택 주변이 봄처럼 따뜻해졌다.
‘이 정도면 마부도 따뜻하게 일할 수 있겠지.’
번거롭기는 했지만, 더는 마부의 불쌍한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기지개를 펴니 우두둑 전신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이만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아, 맞다. 말. 계속 같이 저택 안에서 살 순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마구간에 따뜻한 불꽃 수십 개를 깐 레이나가 말들까지 마구간으로 옮긴 뒤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아까 점찍어 둔 제일 화려하고 큰 방 침대에 온몸을 날려 뛰어들었다.
해동된 이불에서 냉동실 냄새가 났지만, 눕자마자 잠이 솔솔 쏟아졌다.
푹신한 침대에 눕는 것이 너무 오랜만인 데다가 새벽부터 끌려다녀 피곤했던 모양이다.
‘……내일은 냄새도 좀 어떻게 해 달라고 명령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