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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9화 (9/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화

“……히익!”

“꾸엑?!”

대체 왜 저런 몰골이……?

공포와 두려움, 분노에 치를 떨던 이들이 모두 굳었다.

레이나를 토벌하기 위해 달려 나가려던 로스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혹여나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의심한 그가 우뚝 멈춰 서서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갑자기 두피에 느껴지는 차디찬 바람에, 수북했던-그러나 이제는 매끈해진 머리와 몸을 매만지던 인간형 마물들이 거품을 물고 포효하다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전의를 잃게 만든 것도 모자라 삶의 의미까지 잃게 한 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혼잣말했다.

“무장 해제만 시킬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됐네.”

아무리 그래도 대머리로 만든 건 좀 심했나?

그러게, 누가 아무한테나 막 덤비래?

새벽부터 갖은 노동을 하다가 이제 막 쉬려고 했는데,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려.

- 어째서……?!

머릿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어째서 죽이지 않은 거지!

목소리가 분노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에 몹시도 분개하고 있었다.

네가 뭔데요.

“굳이 죽일 필요가 있어? 덤비지 못하게 만들면 그만이지.”

- 그래도 죽이는 게 편했을 것을!

아니, 뭔 소리야? 미쳤어? 편하긴 뭐가 편해?

“죽이면 사체도 치워야 하는데, 그걸 누가 하겠어?”

추위에 벌벌 떨며 동상에 걸려 쓰러질 마부?

아니, 분명 자신일 것이다.

혀를 차고 불만을 토로하며 몇 날 며칠에 걸쳐 하나하나 다 치우겠지.

그런 레이나의 속마음과 머릿속에서 오가는 대화를 모르는 마부는 뜻밖의 감동을 받았다.

“공녀님……!”

당연히 하인인 자신이 치울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웃기지도 않아. 그러지도 못하는 몸이면서.’

굳이 시켜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종일 밖에서 바들바들 떨다가 기절이나 하겠지.

애초에 자신은 지금 게임의 최종 보스가 아닌, 욕쟁이 할머니 루트로 가고 있는 것이 확실했기에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살인마도 아닌데, 굳이 죽일 필요가 어딨어.”

물론 치우기 귀찮다는 마음이 99%였으나, 그 누구도 레이나의 머릿속에서 분개하는 목소리와 그녀의 마음까진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한편, 마물을 토벌하러 온 기사들은 한쪽에서 열심히 수군댔다.

‘뭐야, 뭔데!’

‘왜 마왕이 마물을 대머리로 만든 건데……?!’

‘세상에 다시없을 끔찍한 짓인 것은 맞지만, 마물을 몰아내다니. 설마 마왕이 아닌 건가?’

‘그, 그런 모양인데?’

검은 마법을 쓰는 걸 보면 마왕이 맞는 것 같은데.

왜 마왕이 마물들에게 수치심을 주고 몰아낸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넌 뭐지?”

로스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문과 의심이 가득한 그의 눈이 빠르게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이건 또 뭐야.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팔짱을 낀 레이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레이나 루벨라이트.”

그러고는 로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그를 훑어보았다.

‘뭐야, 좀 생겼네. 키도 크고.’

사실 좀 생긴 게 아니었다. 팔짱을 낀 팔이 아주 조금 움찔거릴 정도로 훌륭한 얼굴이었다.

흑발에 짙은 푸른 눈, 쓸데없이 분위기 있는 깊은 눈매와 주차 잘된 이목구비.

잡티 하나 없이 흰 피부임에도 불구하고 큰 키와 탄탄한 체격 덕분에 남자다운 매력이 물씬 풍겼다.

이런 만남이 아니었다면 앞에 앉혀 두고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좀 구경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로 생겼으면 남주 후보급인데.’

하찮은 조연의 외형에 이렇게 정성을 쏟을 리가 없을 테니까.

물론 상대가 잘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공손해지는 건 아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반말에는 반말.

“그러는 넌?”

보란 듯이 눈을 치켜뜨며 묻자, 관찰하듯 레이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로스틴이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로스틴 윈터스노우.”

로스틴 윈터스노우?

남주 후보 중에 저런 이름은 없었는데. ……설마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북부 지방을 다스리는 ‘윈터스노우’라는 성을 제외하면 말이다.

‘혹시 공작의 아들인 건가? 비중이 전혀 없는 공작 영식쯤?’

그럴 가능성이 컸다. 이 게임 속의 귀족들은 대부분 반반한 얼굴을 갖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또래로 보이니 공작일 리는 없을 테고, 공작 영식이 맞을 것이다.

그럼 뭐, 반말해도 되지. 쟤도 공작 영식, 자신도 공작 영애.

빠르게 납득한 레이나가 일말의 불편함을 떨쳐 냈다.

“혹시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장녀인가? 주디스 루벨라이트 공작 부인의 여식인.”

레이나는 프롤로그에만 잠깐 언급되었던 어머니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맞겠지. 공작가의 장녀냐고 물었으니까.

“그래, 맞아. 그런데 그걸 네가 왜 물어?”

그냥 공작가의 장녀냐고 물으면 될 것을.

왜 굳이 10년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인가.

어떻게 보면 꽤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

자신이 정말 레이나라면 아픈 기억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자 로스틴이 차분히 대답했다.

“안면이 있었다. 공작 부인께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심연의 저택에서 지내셨으니까.”

뭐야. 아는 사이였어? 고작해야 프롤로그에 한 줄 언급된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인데?

게임에선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엑스트라와 엑스트라의 관계 따위, 딱히 알 필요가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닮았군.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제외한다면.”

그가 레이나의 얼굴을 다시금 찬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신원을 확인해서인지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물론 아직 검은 힘을 사용한 것에 대한 의심은 가시지 않았지만.

‘모녀지간이라 체형까지 비슷했나 보지? 그래서 옷이 얼추 맞았던 건가.’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안에 고급스러운 드레스와 장신구가 잔뜩 있었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전 공작 부인은 단순히 핍박을 받아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라,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심연의 저택으로 쫓겨나게 되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게 아니었을까.

‘……그냥 죽일 걸 그랬나.’

레이나의 눈이 빨갛게 타올랐다. 겨우 이름을 알게 된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생각보다 공작이 더 나쁜 놈인 것 같아서, ‘차라리 세상에서 없애는 편이 더 이롭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공작에게 검은 불꽃을 쏟아붓는 상상을 빠르게 마친 레이나가 할 말이 가득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스틴에게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무장한 기사들과 함께 몰려왔으니 아마도 마물을 퇴치하러 왔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건 자신이 해치웠으니 이만 남의 집에서 꺼져 달라는 말투로 묻자, 로스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힘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레이나는 아직도 자신이 검은 연기를 주체하지 못한 채 내뿜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이거? 단순한 화염 마법인데, ……혹시 마법 처음 봐?”

누가 봐도 네가 신탁의 마왕이냐는 질문이었으나, 모르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으니 로스틴이 더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근데 굳이 왜 물어? 뭐가 궁금한 건데?”

제대로 물으라며 레이나가 손바닥 위에 검은 불꽃을 피웠다.

어둠보다 새카만 마법이 신전의 신탁대로 몹시나 음습하고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바로 직전, 그녀가 보란 듯이 마물들을 내쫓았던 걸 본 참이었다. 심지어 루벨라이트 공작 영애라는 멀쩡한 신분까지.

물어볼 것이 산더미였지만, 영지를 지켜 준 영애에게 이 이상의 추궁이나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의심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지금 상황에 맞게 예를 차린 뒤, 확실한 증거를 찾을 때까지는 지켜봐야 할 듯했다.

“……마물들을 막아 줘서 고맙다고 하려던 참이었다. 뿔뿔이 흩어져서 하나하나 찾아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지만, 병력은 지켜 냈으니까.”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선 마물이라고는 해도, 인간형 마물인 탓에 전신의 털을 잃은 수치스러움에 흩어진 모양이었다.

번거롭기는 해도 뭉쳐 있는 놈들을 상대하는 것보단 전력 손실이 적을 것이다.

더불어 이 추위에 헐벗은 상태라면,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해도 알아서 동사할 가능성이 컸고.

쓸데없이 말이 길었으나, 어쨌든 고맙다는 말이었다.

레이나 덕분에 그 누구도 다치지 않은 채 빠르게 상황이 정리되었으니까.

이에 로스틴과 기사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입꼬리를 올린 레이나가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던 불꽃을 로스틴의 뒤에 있던 기사에게 던졌다.

“……?!”

불꽃을 정면으로 받은 기사가 빠르게 몸을 피했으나,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 이미 늦은 뒤였다.

“인사는 됐어. 감히 우리 집에 쳐들어오려던 놈들을 손봐 준 것뿐이니까. 그것보다 너, 아까부터 입술이 새파래. 불꽃은 두세 시간쯤 지나면 알아서 꺼질 테니 가져가.”

그러면서 레이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돌려 저택 안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방금 누군가를 공격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무방비한 행동이었다.

아니, 공격이 맞는 건가?!

모두의 시선이 불꽃을 맞은 기사에게 쏠렸다.

정수리 위에 검은 불꽃을 띄운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머리 위를 매만지며 말을 더듬었다.

“따, 따뜻합니다……! 꼭 난로 같습니다…….”

따뜻한 기운으로 갑자기 체온이 오른 탓인지, 양 뺨을 붉게 물들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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