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2화
“1초라도 늦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걸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역시 늦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허세를 부리며 지하실에서 나온 카르만은 헐레벌떡 소형 이동석을 사용하였다.
도착한 곳은 방금 전 집사에게 알려 주었던 장소였다. 다행히 지하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서둘러 품 안에서 종이 하나를 더 꺼낸 카르만은 붉은색 이파리를 가진 나무 밑에 그것을 파묻었다.
당장 도망쳐야 마땅했지만, 거액을 얻게 된 탓인지 전신이 후들거렸다.
나무 옆에 철퍼덕 주저앉은 그가 크게 웃으며 혼잣말했다.
“하, 하하! 하하하하! 이렇게나 쉽게 이 큰돈을 얻다니!”
짧은 시간 궁리하여 계획한 것이 이토록 잘 풀리다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큰 웃음으로 제 기분을 한껏 표출한 카르만이 품에서 소형 이동석을 꺼냈다.
이제 이 엄청난 금화를 가지고 지긋지긋한 북부를 떠날 시간이었다.
‘잘 있어라, 북부여! 다시는 보는 일이 없기를.’
그리고 그 생각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카르만의 지척에서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조금 전까지 집사와 함께 있던 왜소한 남자였다.
나무 밑에서 카르만이 묻은 종이를 회수한 그가 가방까지 챙겨 다시 소형 이동석을 사용했다.
지하실로 돌아온 남자는 회수한 종이를 집사에게 넘겼다.
“쯧쯧, 가방에 추적 마법을 달아 놓은 것도 모르고 어설픈 꾀를 부리다니. 멍청한 놈.”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다. 어차피 레이나에 관해 아는 자는 모두 없애야만 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종이를 펼쳐 장소를 확인한 집사가 홀로 감탄에 젖어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죽일 수 없을 테니, 부나방처럼 뛰어들어 죽음으로 소식을 알리기를 바라며 보낸 의뢰서건만. ……설마 진짜 해치울 줄이야.”
감시를 붙이면 계속해서 비용을 지급해야 하기에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지금 상황과 어울리진 않지만, 어쨌든 의뢰를 수락한 자들이 반대로 레이나에게 제거당해 연락이 끊기는 것만큼 확실한 감시 방법도 없었다.
남는 비용을 자신의 몫으로 돌릴 수도 있었고.
‘나름 궁리하여 선택한 방법이 이토록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물론 아직 시신 확인이 남아 있었지만, 검은 불꽃에 대한 언급을 보면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서둘러 확인하러 가야겠다고 판단한 집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이나를 옮긴 마부의 가족은 아직 처리하지 못했으나, 레이나 자체를 해치워 버렸으니 더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레이나의 시신을 확인하고, 공작으로부터 거액의 포상과 함께 인정을 받을 행복한 시간뿐이었다.
*
처음으로 있는 힘껏 힘을 사용한 레이나는 사흘이나 잔 뒤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색이 된 마부의 얼굴이었다.
새파랗게 질려서 레이나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던 그는 그녀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자 기겁하며 뒤로 넘어갔다.
“고, 고, 고, 고, 공녀님! 깨, 깨어나셨군요!”
그래서인지 마부가 자신을 반기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었다.
물수건까지 대어 준 것을 보면 꽤나 신경 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저리도 식겁하는 걸까.
오히려 놀라야 하는 것은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서 그의 얼굴을 본 자신인데.
미간을 찌푸린 레이나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물었다.
“왜 그런 반응이야? 혹시 죽길 바랐어?”
물론 그렇다고 대답하더라도 어찌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레이나는 누가 뭐래도 평화주의자였다.
그저 그 정도로 자신이 싫다면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부는 거칠게 도리질하며 즉답했다.
“그,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래?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정말입니다! 공녀님께서 깨어나시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이쯤에서 사실은 집으로 엄청나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도 괜찮은데.
그러나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주장하니 이 이상 되물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언제까지고 가족들의 부고를 숨길 수도 없어 집으로 보내긴 해야 하는데. 지금이 타이밍 같은데.
하지만 본인이 저렇게나 싫어하니 뭐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으쓱인 레이나가 기지개하여 근육을 풀었다.
우드득, 어깨 근육이 시원하게 풀어져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공녀님, 씻으시겠습니까? 곧장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옆에서 마부가 기세등등하게 물었다.
아저씨가 씻을 물을 어떻게 준비할 건데요.
퍽 호기로웠지만, 어차피 자신이 하게 될 일이었기에 웃기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됐어. 어차피 넌 물을 녹이지도 못하잖아.”
레이나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하인인지 모를 정도인데, 무슨.
평소에는 이 정도 핀잔이면 주눅이 들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마부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방법을 찾았습니다!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부턴 모두 제가 하겠습니다!”
“흐음?”
며칠 알고 지낸 게 전부지만, 의도치 않게 마부의 무능력을 빠삭하게 알게 된 레이나의 눈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그래? 그럼 해 보든지.”
신뢰감 0의 눈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마부가 재빨리 방을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나가 버리니까 괜히 걱정이 되었다.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침대에서 벗어난 레이나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빼꼼 밖을 내다보았다.
분명 저택 안과 밖을 열심히 오가며 통에 눈을 담아 옮기고 있겠지 생각하며.
‘뭐야, 아저씨 어디 갔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나오지? 중간에 계단에서 넘어졌나?’
늘 새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던 그였기에 무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5분-아니, 체감상 10분은 더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마부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정말 넘어져 크게 다치기라도 했나 싶어 걱정된 레이나가 서둘러 방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몹시도 멀쩡한 상태의 마부가 아래층에서 뛰어 올라왔다.
“어! 공녀님! 어떻게 아시고! 마침 욕실에 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어서 씻으시지요!”
응? 진짜?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나가 앞장선 마부의 뒤를 어리둥절 따라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건가 했더니. 마부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커다란 물통을 만들어 미리 눈을 받아 놓았던 모양이다.
나름 불순물을 거르기 위한 그물망까지 설치해서 말이다.
욕조보다 훨씬 크고 깊어서 대량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듯했다.
‘흐음, 대충 욕조의 서너 배쯤 되려나?’
더 이상 목욕하다가 다시 밖에 나가서 번거롭게 눈을 퍼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꽤 그럴듯하잖아?’
반신반의한 레이나는 물이 가득 담긴 통 속에 제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욕실에도 불꽃을 설치해 둔 덕에 물이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잘 만들었네. 물도 안 새는 것 같고.’
어리바리한 줄 알았더니, 제법 물건을 만드는 솜씨가 좋았다.
목욕을 하기에는 물이 조금 미지근하다는 것만 빼고는.
온도를 맞추기 위해 레이나는 물통 속에 그럭저럭 뜨거운 불꽃을 하나 떨구었다.
그제야 온도가 조금 더 올라가며 목욕하기 적절한 물이 완성되었다.
“오오오오! 역시……!”
다 만들어 놓은 물통에 생색내듯 불꽃 하나를 넣은 것뿐인데, 마부가 괜히 과장하며 감탄했다.
역시는 뭘 역시예요, 아저씨가 다 해 놓고.
“잘 만들었네. 이제부터 내가 물 준비할 필요도 없겠고. 고생했어.”
그래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칭찬하자, 마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누가 보면 매일 구박만 하다가 선심 쓰듯 칭찬한 줄 알겠네.
“이만 나가 봐. 찝찝해서 목욕해야겠어.”
손을 휘휘 내저으니 곧장 욕실을 나가려던 마부가 헐레벌떡 뒤를 돌며 말했다.
“아! 공녀님. 씻으실 동안 잠깐 외출을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여기 오래 머물게 될 것 같아서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은데…….”
“가족?”
마부의 가족이라면 진즉 공작에게 처리를 당했을 터인데, 편지라니.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이렇게 혹독한 환경에서도 가족에게 연락하겠다는 마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레이나가 생각에 잠겨 대답이 없자, 마부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며칠 전에 공녀님께서 눈을 다 녹여 주신 덕분에 마을까지 길이 뻥 뚫렸거든요. 예전 같았으면 갈 엄두조차 못 냈을 텐데, 이제는 그럭저럭 다녀올 만할 것 같습니다. 씻으실 동안 서둘러 달려갔다 오겠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길까지 뚫려 있다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아마도 그의 가족들은 불행한 일을 당했겠지만, 100%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초를 치는 것도 이상했다.
레이나는 무심한 얼굴로 마부의 손과 발에 따뜻한 불꽃을 둘러 주었다.
“말 타고 가. 그리고 굳이 빨리 돌아올 필요 없어. 딱히 시킬 일도 없고, 오랜만에 혼자 느긋한 목욕을 즐기고 싶거든.”
“공녀님……!”
레이나의 바다보다 넓은 마음씨에 마부가 감동을 받았다. 그의 충성심에 불이 지펴졌다.
그가 없는 마법이라도 사용해서 서둘러 마을에 다녀오겠다고 다짐하며 꾸벅 허리를 숙이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레이나가 욕실을 벗어나 1층 홀로 내려갔다.
“참. 미안한데 장 좀 봐 와. 신선한 음식이 먹고 싶거든. 이를테면 샐러드? 과일? 뭐가 되었든 좋아. 신선한 거.”
그러면서 얼마 전 한쪽 손이 사라진 황금 동상의 다른 쪽 손을 박살 내 마부에게 던졌다.
“이걸로 대충 알아서 사 와.”
“헉…… 예, 예……?!”
레이나는 제 할 말만 끝내고 다시 무심하게 사라졌다.
얼떨결에 황금 손을 받게 된 마부는 자신이 지금 샐러드 농장과 과일 농장을 사 오라는 지시를 받았던가 하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