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8화 (18/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8화

체이스는 베로니카가 시키는 대로 땅을 파고 모종을 심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작업이라서 처음에는 모종을 꺾어 버리기도 했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섬세한 손길로 모종을 심을 수 있었다.

그사이 레이나는 무엇을 했냐 하면, 새참을 만들었다. 어쩌다 보니 그녀는 요리 담당이 되어 있었다.

부하들(?) 사이에 끼어서 모종을 심는 것은 뭔가 아닌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할 일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레이나는 해동한 육포와 감자, 당근, 양파 등을 넣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본 수프를 만들었다.

현대의 음식보다는 맛이 떨어졌지만, 못 먹을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육포라도 고기는 고기. 푹 끓이니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애초에 향신료를 넣은 고깃국이라는 게 평민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기에, 집사와 베로니카는 꽤 만족해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익숙하게 식사를 시작한 세 사람 사이에서 수프를 처음 먹게 된 체이스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향신료가 들어간 겁니까? 고기도요? 매일 드셨던 게 이거였습니까……?!”

맛있는 냄새가 나긴 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찰하다 보니 무엇을 먹는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고깃국이라니. 심지어 향신료까지 잔뜩 들어가 있다니!

제길, 진즉 모습을 드러내고 일을 도우며 정정당당하게 염탐할걸!

괜히 언 육포만 뜯으면서 고생했다며 체이스가 뒤늦게 후회했다. 그럼에도 손에 꼭 쥔 수저는 놓치지 않았다.

‘공작님께서 챙겨 주시는 식사가 부실한가.’

그가 열심히 음식을 퍼먹는 것을 지켜보며 아주 잠깐 공작을 의심하던 베로니카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그쪽이 지난번에 보냈던 편지의 답신이 도착했는데, 주는 걸 깜빡했어.”

집사는 반색하며 편지를 받아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그 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아마도 그를 슬프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려 한 공작이 그의 가족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리 없을 테니까.

집사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레이나가 피곤하다며 괜히 자리를 뜨려 했을 때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집사가 놀라 편지까지 놓치며 소리쳤다.

“여기로 오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로 오다니, 뭐가? 설마 집사의 어여쁜 딸과 부인의 시신이?

반사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편지에 쓰인 내용은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고, 공녀님! 제 가족들이 저를 따라서 북부로 오겠다고 합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돈은 있으니까 아이스베리 마을에 집이라도 마련해 줘야 하나?

자신은 무려 공녀님과 함께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가족들을 맞이할 여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간을 찌푸린 레이나가 바닥에 떨어진 집사의 편지를 주워 들어 읽었다.

“……사정이 생겨서 수도 유학을 중단하고, 루벨라이트 공작령으로 돌아갈까 했는데, 마침 잘되었네요.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게요. ……뭐? 가족이 수도에 있었어? 루벨라이트 공작령이 아니고?”

아주아주 다행히도 집사의 가족은 무사했다.

편지의 내용이 짧아 정확히 유추할 순 없었지만, 딸의 유학 덕분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집사가 공작의 일을 맡기 바로 직전에 가족들이 수도로 가서, 추적을 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집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잣말했다.

“아니, 아니, 어째서?! 유학을 간 지 이제 막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정말 살아 있다니, 타이밍 한번 엄청나게 좋네.’

집사는 어떻게든 살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의 가족들 역시.

“베, 베로니카! 혹시 마을에 남는 집 없습니까? 제 가족들이 북부로 오게 될 것 같은데!”

“남는 집? 없어. 애초에 여기는 방문객이 올 만한 곳이 못 돼서 그런 건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아이스베리 마을은 오로지 공작가의 기사와 사용인,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지낼 공간만이 전부였다.

애초에 목적 자체가 그리했기에, 여분의 집은 필요 없었다. 있어 봤자 번거롭게 관리만 더 늘 뿐이고.

“이를 어쩐다……!”

“뭐, 일단 찾아는 보겠네. 집까지는 모르겠지만, 방이라면 있을지도 모르니.”

“오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집사는 베로니카가 생명의 은인이라도 된다는 듯 허리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이스베리 마을에는 남는 집은커녕 방도 없었다.

당연했다. 보온을 유지하기 위해 있는 공간을 없애기도 바쁜데, 쓰지도 않는 방을 남겨 둔다니. 세상에 다시없을 사치였다.

그럼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집사를 이상하게 여긴 레이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어쩌기는? 여기서 같이 지내면 되잖아.”

“예?!”

“왜, 싫어? 방도 많은데 그냥 여기서 지내. 같이 지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본인들은 아마 모르겠지만, 겨우 살아남은 목숨이니 최대한 근처에 두는 것이 좋았다.

괜히 떨어진 곳에서 지내게 했다가 덜컥 죽기라도 하면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정말 방이 많이 남아돌았기에 몇 명이 오든 상관없었고, 난방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 식구들까지 여기서 지내게 할 수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집사는 사색이 되었다. 그가 이 이상의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절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참으로 극단적인 사람이었다. 그냥 된다고 할 때 받지, 좀.

“제 가족들까지 짐이 되게 할 순 없습니다. 우선 최대한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짐 아니라니까. 무슨 짐이야, 또.

집사가 눈물이라도 뿜어낼 기세였기에, 레이나는 그냥 알아서 하라며 자포자기했다.

“……마음대로 해.”

그러나 불행히도 집사는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집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구할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편지가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정오, 그의 가족들이 심연의 저택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거칠고 추운 북북서 끝까지 가겠다는 마차가 없어, 손수 마차를 몰기까지 해서.

*

“여보!”

마차가 멈추자마자 집사의 부인이 안에서 뛰쳐나와 남편의 품에 안겨 울었다.

유약해 보이는 집사의 이미지와 맞게, 어딘가 여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집사는 놀랄 새도 없이 제 부인을 품에 안고 만남의 기쁨을 눈물로 짜냈다.

누가 가족 아니랄까 봐, 참으로 비슷한 게 많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인사도 잊은 채 부둥켜안은 두 사람을 레이나가 구경하는 사이, 서둘러 마차를 주차한 한 여성이 조용히 레이나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아니, 고개까지 숙였는데 얼굴이 레이나의 정면에 있을 만큼 몹시도 키가 컸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벨라이트 공녀님. 아버지께서 큰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미아라고 합니다.”

집사의 딸? 분명 15살이라고 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키가 커……?’

지난번에 잠깐 만났던 로스틴만큼 컸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너무나 의젓했다. 부둥켜안고 우는 부모님을 대신하여 사과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중한 인사를 받았으니 이제 대답할 차례였다.

“수도에 유학을 갔었다고 들었는데, 사정이 생겼다고?”

“예. 루벨라이트 공작령에서는 더는 배울 것이 없어서 수도의 유명한 요리 학교에 다니려 했는데, 여자에게는 알려 줄 것이 없다고 하여 일찍이 접게 되었습니다.”

뭐야, 요즘 세상에? 미쳤어?

라고 하기에는 중세의 유럽을 모티브로 한 게임이니 그럴 만도 했다. 너무 쓸데없는 고증을 한 셈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에 괜히 마음고생했겠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겠어.”

“예. 북북서 끝까지 가겠다는 마차가 없어서 어떻게 하나 발을 동동 굴렀는데, 아버지께서 편지와 함께 보내 주신 금붙이로 마차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작해야 15살인데 마차를 손수 몰기까지 하다니. 평소 마부의 행실을 생각하면 도무지 믿기 힘든 듬직한 딸이었다.

게다가 요리라니. 더는 배울 것이 없어서 수도로 유학까지 갈 정도라고?

‘……요리, 유학. 흐음? 흐으음? 흐으으음? 흐으으으음?!’

턱 끝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레이나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도, 집사에게도, 그리고 집사의 가족들에게도.

그녀가 미아의 어깨를 살포시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여기서 함께 지내면서 요리할래? 이래 봬도 앞으로 여러 가지 식재료가 생길 예정이거든. 네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좋아.”

15살의 미성년자라는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요리로 유학을 떠났을 정도라니 어느 정도 실력은 있을 것이다.

‘최소한 육포와 향신료를 대충 때려 넣어 요리를 만드는 나보다는 낫겠지.’

사실 집사와 베로니카는 나름 레이나가 만든 음식을 좋아했지만, 현대의 음식을 경험해 본 그녀로서는 영 불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대충 만든 인간용 개죽 같달까.’

맛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양새가 몹시 별로였고, 고기는 질겼으며, 무엇보다 매일 똑같은 것밖에 만들 수 없어 물렸다.

게다가 집사의 가족들은 머물 집이 없었다. 아니, 집은커녕 당장 몸을 누일 방 한 칸도 구할 수도 없었다.

‘여긴 널린 게 방이니까. 겸사겸사 함께 지내며 요리도 해 주면 되잖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생색내며 맛있는 음식까지 먹을 기회인데, 놓칠 수야 없었다.

‘요리라는 명분이 생겼으니 집사도 더는 미안해하지 않을 테고, 나도 마음이 편할 테고.’

갑작스러운 전속 요리사 제안에 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요리 학교에서도 쫓겨났는걸요. 감히 저따위가 고귀하신 공녀님의 요리를 맡을 수는 없습니다.”

아냐, 네가 아니면 감히 고귀하신 공녀가 부하들의 새참을 만들어야 해서 그래.

그러나 미아는 꽤 고집이 세 보였다. 쓸데없이 말이다. 좋은 제안이 들어오면 모르는 척 받기도 해야지. 지금처럼.

“그래? 여자라서 쫓겨난 게 아니라, 실력이 없어서 쫓겨난 거였어?”

그래서 일부러 도발하자, 미아의 입술이 한일자로 꾹 닫혔다.

“………그건 아닙니다. 저는 제 실력에 자부심이 있습니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만들어 봐. 그런 말을 할 만큼의 실력인지 확인해야겠으니까.”

주방은 저쪽. 재료는 저기서 아무거나 써도 돼.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레이나는 주방과 식재료 창고의 위치, 그리고 불의 사용법 등을 구구절절 세세히 알려 주었다.

솔직히 맛은 평범해도 괜찮았다. 그냥 같은 재료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 수만 있으면 되었다.

열악한 환경치고는 나름 잘 구비된 식재료와 꺼지지 않는 검은 불꽃에 놀란 미아였으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자존심만큼은 황제급이었던 모양인지, 레이나에게 제대로 된 솜씨를 보여 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곧장 요리에 나섰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