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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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로스틴은 동이 트기도 전에 성을 나섰다.
아직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을 저택에 가서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할 생각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녀가 마법으로 길을 뚫어 놓은 덕분에 저택까지 가는 길은 꽤 수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연의 저택 주변이 눈으로 가득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거의 갈 수 없다고 봐도 무방했었는데, 눈이 다 녹은 지금은 수도의 정비된 길만큼이나 다니기 편했다.
마물들을 해치우고 능력을 시험하다 보니 겸사겸사 이루어진 일이었으나, 로스틴은 그녀가 북부를 정복하기 위해 미리 길을 닦아 놓은 것은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
잠시 뒤, 심연의 저택에 도착한 로스틴은 먼저 저택 주변을 면밀하게 살폈다.
지난 방문이 고작해야 2주 전이거늘, 저택 주변은 그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보고받았을 때도 당혹스럽기는 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욱 기가 찼다.
미친 것도 아니고, 동부의 공녀가 북부의 차디찬 땅에서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었다.
물론 체이스의 보고로 이미 들은 바가 있기는 했다. 나무를 베서 온실을 만들었다고.
아니나 다를까, 담 너머 저택 앞마당 쪽에 온실로 추정되는 목조 건물이 세 채 보였다.
매일 농사를 짓고 있다는 보고가 사실이라는 듯, 당혹스러울 정도로 규모가 꽤 컸다.
‘보고에서는 식재료용 채소와 과일 위주라고는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안에서 어떤 독초를 키우고 있을지.
자신조차도 단번에 해치우기 버거운 마물들을 단 한 번의 마법으로 몰아낸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농사짓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고?
아무리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동부를 군림하는 공작가의 공녀가?
말이 되지 않았다. 이 두 눈으로 직접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체이스는 세뇌를 당했을 확률이 높으니.’
만약 체이스의 보고와는 다른 것이 한 뿌리라도 발견된다면,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당장 저택 너머로 뛰어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았지만, 하필이면 저택에 기거하는 이가 미혼의 여성 귀족이었다.
아무리 북부에서는 공작의 권위가 절대적이라 해도 미혼 여성의 저택에 함부로 들어갈 순 없었다. 보는 이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아쉬운 대로 로스틴은 저택을 빙 두른 담을 면밀하게 확인했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담벼락 근처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검은 연기. 아니, 불꽃인가.’
일전에도 보았던 공녀의 마법이었다.
그때보단 색이 옅은, 보일 듯 말 듯 한 불투명한 불꽃이 담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추측건대 온도가 높을수록 색이 짙어지는 모양이었다.
로스틴이 불꽃 속에 손을 완전히 넣어 보았다.
‘……따뜻하군. 그것도 상당히.’
저주를 받은 동생이 혹여나 녹아 버리기라도 할까 봐 따뜻함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 그였기에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온기였다.
괜한 감상에 젖어 옛 생각까지 떠올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담 너머에서 눈에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인 탓에 로스틴의 사고가 아주 잠깐 마비되었다.
“……!”
대체, 왜, 어째서? 하얀색 눈 뭉치가 여기에 있는 것인지.
잘못 보았나 싶어서 로스틴은 제 눈을 비볐다.
하지만 하필이면 사방이 검은색투성이여서 더더욱 잘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로스틴은 저도 모르게 훌쩍 담을 넘어 저택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하얀색 몸뚱이를 가진 눈 토끼가 온실 근처에서 팔자 좋게 늘어져 곤히 자는 모습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루카?”
로스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온기에 푹 녹아 폭풍 수면을 취하고 있던 눈덩이가 화들짝 놀라 번쩍 눈을 떴다.
“……!”
“……?!”
부른 사람도 놀라고, 불린 사람도 놀랐다.
두 생명체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녘, 서로를 응시하는 형제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서로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불행히도 지금은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로스틴이 루카에게 물었다.
“대체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루카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는데,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는 입조차도 없었다.
그렇다고 궁금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는 형이야말로 여긴 무슨 일인데?
“삐, 삐이……?”
라고 물었으나, 통할 리가 없었다.
대충 분위기상 말귀를 알아들은 로스틴이 알 필요 없으니 빨리 성으로 돌아가라고 대답하려던 때였다.
그는 뒤늦게 몹시도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로스틴의 눈이 흔들렸다.
“루카, 너……?”
어째서, 어째서 루카는 불꽃 속에서도 녹지 않고 있는 것인가.
눈 뭉치일 때의 루카는 주변 환경이 10도 이상이 되면 몸이 녹아내렸다.
그 때문에 루카는 일 년 내내 차디찬 바람이 부는 북부를 떠날 수가 없었다.
공작 성의 난방을 최소한으로 한 것도, 신전의 도움을 받아서 그나마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는 여름을 없앤 것도.
이로 인해 피해를 본 북부의 주민들에게 매년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가족이자 사랑하는 동생인 루카가 녹아서 사라져 버릴까 봐.
이 추운 북부에 영원히 혼자 남겨져 버릴까 봐.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따뜻한 불꽃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 있는 건지.
손을 넣어 만져 본 불꽃은 인간의 체온과 엇비슷할 정도로 높았는데. 그런데 왜, 어째서?
로스틴의 눈이 루카에게서 한참이나 떨어지지 않았다. 놀라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저택 현관이 열리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정말? 오늘 아침은 꽃 샐러드와 포크 미트볼이라고?”
“예. 어젯밤에 미리 육포를 해동하여 불려 놓았습니다. 그걸 다져서 막 수확한 각종 야채를 섞은 뒤에-”
“잠깐.”
온실로 향하며 열심히 오늘의 아침 메뉴를 설명하는 미아의 앞을 레이나의 손이 가로막았다.
그제야 미아는 낯선 방문객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손에 검은 불꽃을 피워 낸 레이나가 당장이라도 공격을 개시할 것처럼 날카롭게 물었다.
“뭐야, 넌?”
그때까지 루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로스틴이 레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초대도 받지 않고 타인의 저택에 함부로 침입한 상태였기에, 애써 동요하는 감정을 잠재운 그가 예를 갖춰 묵례한 뒤 대답했다.
“로스틴 윈터스노우. 지난번에 만났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군. 일단 저택에 함부로 들어온 건……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보기 드문 생명체를 쫓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그의 등 뒤에서 동이 트기 시작해 얼굴이 잘 안 보였는데, 눈이 빛에 적응해 이제 그의 잘난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단으로 침입한 게 미안하긴 한 모양이었다.
사과까지 받은 마당에 더 추궁하고 싶진 않았다.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죄를 사한 레이나가 이만 나가 달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래?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 그럼 이만 나가 주겠어? 이제부터 아침 식사를 만들 거라서 바쁘거든.”
정확히는 구경만 할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요리를 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꽤 바빴다. 중간중간 맛도 봐 줘야 했다.
하지만 로스틴은 아직 돌아갈 수 없었다. 루카가 여기에 있었기에.
그는 바닥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제 동생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걸 전하는 게 늦어졌군.”
레이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로스틴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세금 체납에 따른 ‘심연의 저택’ 소유권 변경 알림.
윈터스노우 공작령 제727호 조세법에 따라, 5년 이상 세금을 체납한 ‘심연의 저택’의 소유권을 윈터스노우 공작으로 변경함.]
……네? 뭐라고요? 갑자기요?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의 등장에 손에 힘이 풀린 레이나가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루벨라이트 공작이 세금을 체납해서 저택이 넘어갔다는 말이야……?
갑자기 누가 머리를 망치로 때리기라도 한 것같이 머릿속이 멍했다.
그럼 공작은 왜 자신을 여기로 쫓아낸 건데? 세금조차 내지 않아서 빼앗긴 저택에 대체 왜?
답은 정해져 있었다.
죽길 바랐으니까. 다시는 보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 북부에서도 가장 끝에 자리한 이 심연의 저택이었을 것이다.
“이런 XX.”
레이나가 아주 오랜만에 욕을 입에 담았다.
‘앗, 눈을 떠 보니 악역이 되어 갇혀 있었습니다.’일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두 달 만이었다.
‘어쩐지 운이 너무 좋더라니, 이런 빅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