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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21화 (21/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21화

이 빌어먹을 세상아. 꼭 얘한테 이래야만 해?

출생부터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집까지 빼앗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의식주 정도는 확보를 해 줘야 갱생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왜 자꾸 악의 길로 몰아넣는 건데?

갑자기 뜻 모를 말을 내뱉더니 이를 갈며 분노하는 레이나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녀는 바닥에 볼품없이 떨어진 망할 놈의 서류를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로스틴을 째려보았다.

“좀 일찍 알려 주지 그랬어?”

저택 주변을 정리하고, 온실을 세 개나 만드는 동안 대체 뭘 하다가 지금 와서 이러는 건데.

“그건 사과하지. 설마 누군가가 이곳에서 터를 잡을 줄은 몰라서, 알리는 게 늦어졌다.”

그건 그랬다. 어떤 미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추운 곳에서 살겠다고 제 발로 기어 오겠는가.

빡치게도 로스틴이 두 번째 사과와 함께 그럴듯한 변명까지 해 댔기에 레이나는 더는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레이나의 머릿속에 양손과 귀가 사라진 초대 공작의 황금 동상이 떠올랐다.

아직 줄 신체(?)는 많았다. 세금이 밀렸다면 납부하면 그만이었다.

“얼마면 돼?”

“무엇이?”

“밀린 세금. 이자까지 쳐서 다 낼게.”

그러니까 좀 봐줘. 방금 전까지 자신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여주인공 외엔 없을 거라며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로스틴은 단호했다.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레이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이미 소유권이 넘어온 상황이라서 이제 와 세금을 낸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하.”

나쁜 새끼! 어차피 자신의 불꽃이 없다면 다시 버려진 저택이 될 텐데, 왜 저렇게 비싸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얼만데? 저택을 다시 살게. 머리 정도면 돼? 몸통은? 둘 다 주면 돼?”

“……머리? 몸통? 대체 뭔 소리지? 안됐지만 저택을 팔 생각은 없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말이지.”

“그걸 왜 네가 판단해? 가서 내가 그렇게 제안했다고 네 아버지께 말씀드려.”

일개 공작 영식 주제에 어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를 언급하는 레이나에 로스틴의 미간에 금이 갔다.

누가 보아도 확연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닌 밤중에 축객령을 맞은 레이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건 말로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최소 저 잘난 머리털이라도 태워야 했다.

레이나가 공격 태세를 갖추어 로스틴 역시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였다.

“삐이-!”

구석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카가 번쩍 날아올라 레이나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삐이-! 삐이익! 삑!”

그러고는 로스틴을 향해 날을 세웠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것 같았다.

“……지금 나한테 화를, 내는 건가?”

로스틴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루카가 친형인 자신에게 화를 낸다고? 그 반대가 아니라?

편을 들어 주지는 못할망정, 갑작스러운 형제의 배신에 로스틴은 전의를 상실했다.

냉랭한 그의 마음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그가 검에서 손을 치우자 레이나 역시 김이 샜다는 듯 불꽃을 꺼뜨렸다.

그녀가 어깨 위에 앉은 루카의 머리를 가볍게 톡 치며 물었다.

“너, 혹시 전에 보았던 삐약이야?”

지난번엔 부리나케 도망치더니, 추워서 용기를 내어 다시 왔나.

그러다가 자신이 싸움에 휘말린 것 같아서 주제에 도와주려고 한 거고?

웃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몹시 귀여웠다.

“……너, 이리 와.”

레이나와 꽁냥대는 루카가 못마땅했던지 로스틴이 제 동생을 불렀다.

대체 누구의 어깨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루카는 로스틴에게 가기는커녕, 싫다는 듯 레이나에게 더 바싹 붙어서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숨기까지 했다.

“응? 뭐야, 간지러워.”

“……!”

루카가…… 미친 것일까. 그래, 최소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누가 인사만 해도 흥! 콧방귀를 끼며 달아나기 바빴으면서, 애교 따위를 부린다고?

심지어 검은 마법을 부리며 자신을 적대하는 공녀에게?

“이리 안 와?”

레이나가 자신을 공격하려고 했을 때보다 더 짜증이 난 로스틴이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봐도 매우 성질이 나 보였다.

왜 저 콧대 높아 보이는 공작 영식이 이 눈 뭉치 마물에게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재밌네. 설마 아까 쫓던 희귀한 생명체가 얘인가?’

몰랐는데 천연기념물(?)인 모양이었다. 레이나는 보란 듯이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난폭하기도 해라. 어떻게 이 작고 귀여운 아이에게 소리를 지를 수가 있지?”

그러면서 루카의 전신에 따뜻한 불꽃을 선물했다.

눈으로 만들어진 몸에다가 불꽃을 두르는 끔찍한 모습에 로스틴이 놀라서 당장 제 동생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루카는 녹지 않았다. 아까 보았던 것처럼.

불꽃을 두른 루카가 레이나의 어깨에 앉아 가만히 제 형을 응시했다.

그것은 로스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보아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가 제 동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시선 교환으로 이어졌다. 레이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침묵이 지속되자 그녀가 로스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알겠으니까 이만 돌아가 줘. 아침도 안 먹은 사람에게 나가라고 하는 건 너무 무례하잖아? 내 조건을 공작님께 말씀드리는 것도 잊지 말고.”

맞는 말이었다. 다 알면서 눌어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알게 되었으니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 마땅했다.

물론 레이나가 왜 자신을 공작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불에 녹지 않는 루카를 보아 버린 그에게 그런 사소한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여기선 한발 물러서고, 공작 성에서 루카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했다.

“……그렇게 하지.”

가볍게 묵례한 로스틴이 등을 돌렸다.

그가 저택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레이나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루카가 폴짝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응? 가는 거야?”

의아해서 묻자, 빼꼼 고개를 든 루카가 새카맣고 동그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렇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되묻기도 전에 폴짝 뛰어 저택 밖으로 뛰어갔기에 루카와 레이나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오늘따라 친근하게 구나 싶었더니, 역시 매정한 눈 뭉치네.”

흥, 그래도 귀엽지만. 작게 웃은 레이나는 로스틴이 흘리고 간 서류를 주워 들었다. 다시 보아도 짜증 나는 서류였다.

뭐 이딴 법이 다 있나 싶다가도, 고작 세금 몇 푼 내지 않아서 저택을 빼앗긴 루벨라이트 공작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절대 저택을 빼앗기지 않겠어. 머리와 몸통, 팔까지 주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윈터스노우 공작과 교섭해서 저택을 지켜 낼 것이다.

굳은 다짐을 하며 서류를 불태워 버린 레이나가 멍한 얼굴로 굳어 있는 미아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어서 아침을 만들자는 재촉이었다.

*

공작 성으로 돌아온 로스틴은 집무실에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심연의 저택에서 돌아오는 내내 불꽃에 휩싸였던 루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곤히 자고 있었어. 마치 따뜻한 이불이라도 덮고 있는 것처럼 퍼져서.’

그런 모습의 루카는 처음이었다. 아니,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저주에 걸린 뒤로는 늘 차가운 곳에서만 지냈기에, 그가 아는 루카는 늘 웅크리고만 있었다.

‘공녀의 불꽃에는 녹지 않고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지난번 새벽에도 몰래 공작 성을 빠져나갔던 건가.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공녀와 구면인 듯했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화를 냈다니.’

로스틴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니, 불편함을 넘어서 미안함과 측은지심, 그리고 죄책감까지 들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분명 불꽃인데, 왜 녹지 않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공녀의 불꽃이 루카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더는 그녀를 내쫓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아깐 너무 무례했나.’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그녀는 루벨라이트 공작이 쫓아내서 여기로 왔을 터인데, 다짜고짜 서류를 내밀며 나가라고 할 것까진 없었다.

‘사과해야 하는 거겠지. 이럴 땐…….’

아직도 그녀의 정체가 불명확하여 안심이 되진 않았지만, 루카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다.

‘그리고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당장 저택부터 돌려줘야겠군. 공녀의 이름으로.’

결심한 로스틴이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세금을 내지 않아 소유권이 변경되었지만, 공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자비를 베풀겠다는 내용이었다.

‘단, 세금이 밀렸던 전적이 있으니 이제부터 1년 치 세금을 나누어 매주 납부할 것.’

오늘처럼 무단 침입할 순 없기에 합법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저택에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내쫓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정체를 캐는 것도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었다.

검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마왕뿐이라고 하였으니, 정말 그녀가 마왕일 경우엔 해치워서 저주를 풀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루카가 공녀의 마법에는 녹지 않는 것도 어쩌면 본인이 건 저주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생각해 보니 퍽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역시 공녀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시급해 보였다.

혹여나 레이나가 당장이라도 저택을 버리고 떠날까 봐 로스틴은 서류 작성을 서둘렀다.

그러다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뜻밖의 손님이 그의 영지에서 발견된 것이다.

“공작님, 숲에 고립되었던 자들을 구조했습니다.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집사와 하인, 총 두 명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그게 하필이면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사람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 숲에 갇혀 추위에 떨던 것을 구조한 참이었다.

원래는 총 셋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한 명은 이미 동사한 뒤였다.

나머지 둘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아 성에서 치료해야 할 것 같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이쪽의 환경을 잘 몰라 현지인을 고용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지리에 능숙한 북부인들도 종종 길을 잃곤 하는데 말입니다.”

두 사람의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취조한 뒤 돌려보내겠다는 기사의 보고에, 로스틴이 동행하겠다며 깃펜을 놓고 일어났다.

“공작님까지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집사가 귀족 출신이기는 하지만 하급이고, 나머지 한 명은 단순한 하인일 뿐이었습니다.”

“아니, 집사라는 자에게 물어볼 게 있다.”

그에 기사는 곧장 집사가 쉬고 있는 방으로 로스틴을 안내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군.”

불행히도 집사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전신에 동상을 입은 탓에 피부 곳곳이 벗겨지고, 물집과 염증이 생겨 있었다.

“며칠이나 고립되어 있었던 거지?”

“발견했을 당시에는 이미 반쯤 사경을 헤매고 있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상태로 보아 아마 나흘쯤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괴사할 가능성도 있겠군.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괴사 가능성은 다소 있습니다만, 의식은 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사 쪽은 말이지요.”

죽은 이의 의복은 물론, 살아남은 하인의 옷까지 모두 집사가 혼자 입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는 어떻게든 홀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모양이었다.

아직 인사조차 하지 못한 자이거늘, 벌써 호감도가 바닥을 쳤다.

아무리 공녀의 정체가 궁금해도, 이딴 놈을 살려서 물어봐야 할까.

“집사는 정신 차리면 내보내. 회복은 다른 곳에서 하라고 하고.”

보통은 영지 내에서 조난당한 자는 무료로 치료해 주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비용을 청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시간을 낭비했군.’

로스틴이 몸을 돌렸다.

집사가 깨어나든 말든 이제는 관심이 없어졌다. 공녀의 정체는 스스로 알아내면 될 일이었다.

한데 그때, 하필이면 때를 맞춰 집사가 의식을 찾았다.

채 눈을 다 뜨지도 못한 그는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며 헛소리를 했다.

“주, 주, 죽었는지……! 화, 확인, 확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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