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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24화 (24/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24화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야? 그 아저씨는.”

다친 것 같은데, 왜 불쌍하게 내동댕이치고 난리지?

뜻밖의 질문이었던 모양인지 로스틴의 대답이 한 박자 느렸다.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집사다.”

“아…… 그래?”

그의 얼굴을 보았던 때라고는 북부로 쫓겨나기 직전 아주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보물을 챙기느라 바빠서 남의 얼굴 따위 볼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딱히 취향도 아닌 아저씨의 얼굴 따위 알 바 아니었다.

그게 루벨라이트 공작저에서 본 것이라면 더더욱.

“집사의 얼굴을 왜 내게 보이는 건데? 아니,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자신을 이곳으로 내쫓은 가문의 집사를 보고 뭐 어쩌라는 거지, 싶었다.

로스틴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자는 공녀를 아주 잘 아는 듯했는데, 공녀는 초면인 것처럼 말하는군.”

“그거야 지금까지 몇 번 보지 못했으니까. 혹시 집사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그래서 책임지라고 따지는 건가?

그렇지 않은 이상 저 모양, 저 꼴의 사람을 데리고 와서 추궁할 리가 없었다.

“그래, 이자가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하였다.”

“거,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모, 모, 몰랐습니다! 고, 공녀님의 말씀대로 저는 공녀님을 몇 번 뵙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집사는 모르쇠를 선택했다.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엇을 몰랐는데?”

“공녀께서 마법을 사용하는 걸 몰랐다고 하더군.”

그제야 레이나는 집사가 왜 그리 거짓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문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려 유폐했다가 북부에 버리기까지 했으니,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사실 이건 레이나의 입장에서도 굳이 세세하게 털어놓지 않는 편이 나았다.

자세히 설명해 봤자, 마왕으로 태어난 운명이라는 걸 자백하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러니 차라리 집에서 조용히 지내서 집사가 몰랐을 거라며 편을 드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대충 그렇게 둘러대며 그의 편을 들까 고민하는데, 이어진 로스틴의 말이 레이나의 이성을 시험했다.

“그것참 이상하군. 성인이 될 때까지 같은 저택에서 지낸 공녀를 몇 번밖에 보지 못했는데, 암살 의뢰까지 했다라.”

“암살?”

무슨 소리야, 그건 또. 갑자기 무섭게 암살이라니.

레이나가 로스틴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집사가 기겁하며 사실을 부정했다.

“아, 아닙니다! 아, 암살이라니요! 제가, 제가 왜 그,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북부에는 황제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특권이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그러니 비밀은 없다는 뜻이었다. 네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다고.

그에 집사는 서둘러 변명했다.

“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 애초에 정체를 숨긴 채 의뢰를 맡기면 아무리 공작 각하라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잘도 알고 있군. 이번에 공녀를 죽여 달라고 했던 의뢰인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익명으로 의뢰를 한다면 정체를 숨길 수야 있지.”

로스틴의 입매가 비틀렸다. 주어만 없을 뿐, 거의 자백에 가까웠다.

그제야 집사는 자신이 얄팍한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저, 저, 저는, 그,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 맨몸으로 날 여기까지 내쫓아 놓고 가만히 둘 리가 없다고 생각하긴 했어.”

레이나가 차갑게 말했다. 집사가 애써 부정했지만 이미 결과는 나온 뒤였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죽을 판인데, 암살까지 하려 했다고?’

너무나도 루벨라이트 공작가에서 할 법한 짓이라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고작해야 8살이었던 날 유폐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레이나의 몸에서 화르륵 불꽃이 타올랐다. 휘몰아치는 불꽃에 그녀의 은발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와 함께 분노로 잠식되기 시작한 머릿속에 그간 사라졌던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찾기 시작했다.

- 죽, 여……! 죽여, 라……! 마왕이여……! 죽여라! 반역자, 를!

목소리가 명령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를 일깨우며 다시금 운명에 따르라는 듯.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악행은 그녀의 행실로 기억될 것이며, 천재지변마저도 그녀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어차피 그런 취급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마왕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편이 마음 편하겠지.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오가는 음산한 말과 생각에 레이나의 자줏빛 눈이 번뜩였다.

집사를 압박하고 레이나의 반응을 떠보려던 로스틴은 뜻밖의 상황에 검을 빼 들었다.

기사들 역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레이나의 부하들은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했다.

그 사이에서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집사만이 숨이라도 넘어갈 듯 꺽꺽대었다.

“죄, 죄, 죄, 죄송, 죄송합니다! 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 부디 살려 주, 주십-!”

레이나가 그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모두가 숨을 죽여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화르륵!

그녀에게서 뻗어 나간 불꽃이 집사의 전신을 감쌌다.

“으아아아아악-!”

집사가 절규했다. 불꽃에 휩싸인 그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끔찍한 광경에 모두가 입을 가린 채 경악했다. 이건 변명할 여지가 없는 마왕의 짓이 분명했다.

그때, 몸에서 불씨를 털어 낸 레이나가 차가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엄살떨지 말고 일어나.”

그녀의 시선이 아직도 고통스러워하는 집사에게 향했다.

그제야 로스틴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집사가 불꽃을 맞은 지 꽤 되었는데, 화상을 입기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스틴은 여전히 바닥을 뒹구는 집사의 옷깃을 잡아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집사의 몸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집사를 붙든 로스틴의 손에까지 온기가 채워졌다. 아까 루카가 쉬고 있던 불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기도 전에 동상 따위에 걸려서 죽으면 곤란하니까. 방금 자백까지 마쳤으니 데려가서 엄벌을 내려 줘. 귀족 살인 미수죄니까 최소 무기 징역 정도는 때려 줬으면 좋겠어.”

그제야 집사의 발광이 멈추었다. 얼어붙었던 몸에 온기가 도는 것을 깨달은 그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뭐 해, 포박 안 하고. 구경났어?”

레이나의 질책 어린 말에 굳어 있던 기사들이 로스틴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로스틴이 집사의 옷깃을 놓으며 그를 바닥으로 내던지자, 기사들은 그것을 대답으로 여기고 집사를 다시 구속하여 짐마차에 실었다.

로스틴은 평정심을 되찾은 레이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응시하더니, 불꽃에 닿았던 손을 쥐었다 펴며 물었다.

“대체 왜 살려 준 거지?”

“전에도 말했잖아. 나 살인마 아니라고. 굳이 나서서 죽여야 해? 눈앞에 처벌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우문현답이었다.

레이나가 지금 당장 광분하여 집사를 죽이지 않더라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백까지 마친 그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공녀는…….”

신탁의 마왕이잖아. 아니, 마왕인 것 같은데. 맞을 텐데.

심증과 물증이 그리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지. 왜 예상 밖의 행동만 하는 것인지.

로스틴이 차마 뒷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자, 레이나의 입매가 비틀렸다.

사실 예전부터 그가 뭘 물어보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검은색 마법을 쓰는 사람일 뿐이야. 신탁인지, 나발인지처럼 누군가를 죽일 생각이나 마음 따위 전혀 없어. 온실이나 잔뜩 지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을 뿐이라고.”

애초에 신탁이 절대적이라는 것도 웃겼다. 그걸 막연하게 믿는 사람들도 이상했고.

그래서 확실하게 부정하니, 로스틴이 조용히 검을 검집 안에 넣었다.

“……그렇군.”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의 무례를 저지를 순 없었기에 이만 사과하고 물러나야 할 시간이었다.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다. 내가 쫓던 자와 공녀가 연관되어 있어서 찾아오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무례를 저지른 것 같아. 사과하지.”

“알면 됐어. 그쪽이 그렇게 나오니 딱히 기분이 나쁘지도 않거든.”

체이스를 마구 부려 먹고 있어서 결코 너그럽지 않은 성격인 줄 알았는데.

로스틴이 생각한 레이나와 실제 레이나는 일치하는 부분이 단 한 곳도 없었다.

마치 그의 추측이 처음부터 모두 틀렸다고 증명하는 것처럼.

정말 자신이 틀린 것인지, 이제 그녀의 정체를 그만 의심해야 하는지 로스틴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안하면 내 부탁 좀 들어줘. 아까 그쪽이 흔쾌히 들어주겠다고 한 거기도 해.”

레이나는 이리 와 보라는 듯 로스틴과 기사들에게 손짓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남정네들이 영문도 모른 채 따랐다.

그녀가 저택 1층 홀에 대충 놓아두었던 동상을 가리켰다.

“황금이나 보석을 돈으로 바꿔 준다고 했지? 이 황금 동상의 일부를 돈으로 바꿔다 줘.”

그러면서 불꽃을 날려 위대한 초대 공작의 황금 동상 양팔과 양다리를 깨끗하게 절단했다.

쿵! 소리와 함께 몸통과 얼굴만 남은 초대 공작의 동상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헉?!”

“……?!”

동상의 정체를 알아본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도 그럴 것이, 초대 황제와 함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초대 루벨라이트 공작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 엄청난 분의 동상을 사지 분리해 버리다니. 심지어 어째서인지 귀가 없었다. 코도 없었고.

‘대체 무슨 짓을……!’

이것만큼은 매사에 덤덤했던 로스틴 역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가 기사들과 함께 말없이 분리된 동상을 보고 있자, 동상의 몸통을 발로 밀어 구석으로 치운 레이나가 팔과 다리를 가리켰다.

“이것들을 가져가서 돈으로 바꿔다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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