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25화
이런 걸 바꿔 달라고 할 줄 알았다면, 그러겠다고 하지 않았을 텐데.
불행히도 이미 승낙한 뒤였다. 그것도 몹시 흔쾌히.
게다가 눈앞의 레이나가 너무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겠다. 약속한 것이니 그렇게 하지.”
로스틴은 기사들에게 초대 공작의 팔다리를 마차에 실으라고 지시했다.
기사들이 불경을 저지르는 얼굴로 황금 신체를 마차로 옮겼다.
그사이 레이나와 단둘이 남게 된 로스틴이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 8살 때 유폐되었다고 했는데, 사실인가?”
단순히 개인 정보를 캐기 위함은 아니었다. 집사를 취조할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그녀의 검은 마법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인 이유도 배제할 순 없었지만, 로스틴은 최대한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맞아. 내게 마법이 발현되자마자 그렇게 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이나 저택 지하에 유폐되어 있다가 갑자기 쫓겨난 거야. 바로 얼마 전에 말이지.”
그 외의 다른 건 없다는 듯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더 궁금한 건?”
그녀가 마왕인지 아닌지 외엔 궁금한 게 없었던 탓에 고개를 저으려던 그는 문득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이 하나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능하다면 공녀가 만든 온실을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아직 온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걸 확실하게 확인해야 공녀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체이스가 세뇌를 당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그거야 쉽지. 이리 와.”
다행히 레이나는 흔쾌히 로스틴의 부탁을 승낙했다.
아니, 오히려 어딘가 신이 나 보였다. 마치 아끼던 것을 자랑하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베로니카!”
로스틴과 함께 밖으로 나간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택 현관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로니카를 불렀다.
이름을 불릴 줄 몰랐던 모양인지, 화들짝 놀란 그녀가 서둘러 레이나에게 달려왔다.
“예, 공녀님.”
“수석 정원사인 네가 만든 온실을 안내해 주겠어? 궁금하다고 하네.”
“예? 제가요?”
감히 공작님께?
베로니카가 기겁했다. 로스틴은 눈을 끔뻑였다.
그와 베로니카는 서로 구면이었다.
공작 성에서 가장 가까운 아이스베리 마을에는 주민이 많지 않아서 모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베로니카의 남편과 아들 둘 다 공작 성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응. 난 소개할 정도의 지식은 없으니까. 작물에 관한 건 베로니카의 전문 분야잖아?”
맞는 말이었다. 온실은 베로니카의 주도하에 관리되고 있었고, 레이나는 매일 한량처럼 기웃대며 구경만 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연유로 뜻밖의 시간을 갖게 된 로스틴과 베로니카가 뻘쭘한 인사를 나눴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공녀의 수석 정원사가 되었다고?”
“예? 아, 예…….”
“……그대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다니, 미처 몰랐어. 공녀께서 보는 눈이 있었던 모양이야.”
“아닙니다. 공녀님께서 좋게 봐주신 덕분입니다…….”
두 사람의 말꼬리에 묘한 여운이 따라붙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이루어진 뜻밖의 만남 때문에 생겨난 어색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언제 뚝딱거렸냐는 듯, 곧 베로니카가 능숙하게 온실을 소개했다.
불꽃으로 기온을 조절한 것은 물론이고, 갖가지 작물에 맞는 적절한 온도와 영양분, 수분을 공급하고 있다는 설명과, 새로 주문한 작물들이 도착하기 전에 온실을 하나 더 지을 예정이라는 것까지.
공녀가 보는 눈이 있다고 했던 것은 사실 반쯤 빈말이었는데, 그것이 진심이 될 만큼 로스틴은 베로니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직은 비교적 재배하기 쉬운 작물들뿐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수석 정원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작물 재배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주위에 수상한 식물이 없나 샅샅이 살펴보던 로스틴이 어느새 베로니카의 설명에 빠져들어 고개를 끄덕이게 될 정도로.
온실 전반에 대한 설명을 끝마친 베로니카에게 로스틴이 물었다.
“그대는 언제부터 작물 공부를 한 거지?”
“딱히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라 원래 알고 있었죠.”
아니,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주변에 작물이 널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재배하고 관리하는 것을 세세히 알긴 어려웠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을까.
묻지 않아도 답은 알 수 있었다.
결혼하여 북부로 왔기 때문에, 더는 능력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레이나를 만나 그 기회가 주어졌을 테고.
아마 베로니카 외의 여성들도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로스틴은 레이나처럼 그런 이들을 도울 방법일랑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정작 영주는 자신이거늘, 오히려 마왕으로 의심받는 공녀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에 괜히 입맛이 썼다.
“공녀를 만나게 되어 천운이었군. 그대를 만나게 된 공녀 또한.”
“전자는 맞는 말이십니다만, 후자는 과찬이십니다.”
온실의 확인까지 모두 끝냈기에 로스틴은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만면에 미소를 띤 레이나가 손까지 흔들며 로스틴을 배웅했다.
“금덩어리 바꾸고 영수증도 챙겨 와 주겠어? 잔돈도 챙겨 주면 고마울 거야.”
물론 따뜻한 배웅이 아닌 퍽 계산적인 배웅이기는 했다.
그러나 레이나에 대한 의심이 어느 정도 사라진 상황이었기에, 로스틴은 픽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소유권 변경에 관한 서류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가 막 제 집무실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다시 돌아갈까 싶었지만, 이미 하루에 두 번이나 저택에 찾아간 참이었다.
스토커도 아니고, 급한 것도 아니고, 이 이상 방문하는 것은 이상했다.
게다가 레이나와 눈치 싸움을 하다가 추가된 조건이 있었기에 서류의 내용을 변경해야 했다.
초대 루벨라이트 공작의 팔다리도 금화로 바꿔야만 했고.
‘아니, 그 전에 집사를 심문하고 루벨라이트 공작에게 연락을 보내는 게 맞겠어.’
루벨라이트 공작에게는 예전부터 안 좋은 감정이 쌓여 있던 차였다.
한 번쯤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일의 우선순위를 정한 로스틴은 집사를 가둔 감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중간에서 하얗고 동그란 루카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루카.”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제 방으로 돌아가고 있던 루카가 화들짝 놀라 제 몸의 다섯 배나 되는 높이를 뛰어올랐다.
그러다가 자신을 부른 이가 제 형이라는 것을 확인하곤 왜 아는 척을 하냐며 화를 냈다.
“삐, 삐-!”
“괜찮아.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돌아온 건가? 공녀의 저택에서?”
보나 마나 또 잔소리하겠지, 싶었다. 루카가 알 게 뭐냐며 고개를 팩 돌리곤 눈을 감았다.
이름하여 ‘안 들려’ 상태였다.
지은 죄가 있는 탓에 삐진 척하며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은 루카였으나, 로스틴은 그렇지 않았다.
몸을 낮춰 시선을 애써 루카에게 맞춘 로스틴이 퍽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가고 싶으면 가도 돼.”
“……?”
잘못 들었나 싶어진 루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제 형을 보았다.
설마 낚시는 아니겠지. 의심하는데, 진심인 듯 로스틴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 대신 오늘처럼 위험하게 혼자 가지는 말도록. 가고 싶을 땐 말해. 데려다줄 테니.”
뭐야, 형 왜 이래? 뭐 잘못 먹었어? 새카만 눈을 끔뻑인 루카가 로스틴의 얼굴을 살폈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지만, 딱히 변함이 없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안색도 썩 괜찮았다. 못 먹을 걸 먹은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루카의 눈이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진의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제 얼굴을 샅샅이 훑는 루카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은 로스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엔 사정도 모르고 무작정 화를 내서 미안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게 하지.”
“……!”
형이 지금, 사과한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 루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 더 동생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그는 늘 딱 한 번만 루카를 쓰다듬었다.
혹여나 자신의 체온 때문에 녹아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서.
“…….”
“…….”
아주 잠깐, 정적이 일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불행을 껴안은 형제는 말없이 시선을, 그리고 감정을 교환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 흥 콧방귀를 끼며 로스틴을 무시한 루카가 자신의 방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형제의 대화는 끝이 났다.
‘알아들었으려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고 해 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작은 루카에게 밖은 위험하니까.’
한숨을 내쉰 로스틴이 다시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문 뒤에서 조용히 숨어 있던 루카의 새카만 눈에서 도르르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내 그것을 힘차게 털어 낸 루카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침대 위에 올라가 새근새근 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