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28화
대신관이 도대체 왜 여기에? 당황한 공작의 사고가 멈췄다.
레이나의 능력이 발현되기 전, 황성 신년 축제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의 대신관은 어린 레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으로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고 축복까지 내렸다.
아무리 공작가의 장녀라고는 해도 고작해야 여자아이에게 무슨 저런 말을 하나 싶었는데.
그리 생각한 것이 우습게도 레이나는 정말로 ‘대단한’ 인물이 되었다. 물론, 좋은 뜻의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사소한 만남이 전부인데, 그가 왜 공작저에 왔는지 의문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공작이 서둘러 대신관을 모시라며 하인들을 닦달했다.
잠시 뒤, 새하얀 제복을 입은 대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 한 명의 성기사만을 대동한 그는 자신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이는 공작을 보곤 큰 눈을 곱게 접었다.
“멋진 저택이군요. 취향이 고상하십니다.”
“칭찬 감사드립니다, 대신관님.”
신기하게도 대신관은 10년 전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동안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그때 그 모습에서 한 치의 변함도 없었다.
20대 초반의 선한 인상을 가진 말갛고 하얀 청년.
청색의 동글동글한 눈과 곱슬기가 있는 금발 때문인지 어딘가 유약한 이미지가 있었다.
그렇다고 위압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그가 자리에 앉는 공작을 유심히 보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뱉었다.
“왜 아직도 살아 있을까요. 신탁대로라면 이미 죽었어야 했는데.”
“……예?”
감이 전혀 잡히지 않는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한 모금 차를 마신 대신관이 공작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녀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공작의 장녀 말입니다.”
대신관이 웃으며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레이나를 언급하여 놀란 공작이 찻잔을 엎었다.
하인이 곧장 그것을 치우려 했으나, 공작은 오히려 그를 물렸다.
“괘, 괜찮으니 어서 나가!”
옷에도 찻물이 튄 상태라 의아해하는 눈치였으나, 화까지 내며 썩 나가라고 하였기에 하인은 서둘러 응접실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응접실에 대신관과 둘만 남게 된 공작은 찻잔에 아주 조금 남은 홍차를 단번에 들이켠 뒤,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 그것을 왜, 왜…… 물으시는지요.”
“지금쯤 대단한 인물이 되어 세상을 소란스럽게 해야 하는데, 소식이 없어서 말이지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공작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확실하지 않아 무얼, 어떻게 되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유폐가 끝난 뒤 내버린 곳이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다른 어딘가로 훌쩍 사라져 버린 걸까요?”
이상하네. 분명 유폐가 끝나자마자 공작을 죽이고, 가문을 차지하는 운명이었는데.
대신관이 고개를 갸웃대었다. 마치 일어나야 마땅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 이상하다는 듯.
‘대체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무리 신에게서 만물을 예언받는 대신관이라지만, 어떻게 자신이 레이나를 유폐했던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뒤에 이어진 끔찍한 말은 또 무엇인지.
‘레이나가 날 죽인 뒤 가문을 차지할 운명이었다고?’
공작의 말문이 턱 막혔다.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그러나 대신관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차를 음미하고, 과일을 맛볼 뿐이었다.
머릿속이 창백해져 한참이나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공작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대신관님께서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모르쇠를 선택한 그에게 대신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제대로 잘 말씀드린 것 같은데 이상하네요. 그럼 이걸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요.”
황태자 전하께라도 여쭤봐야 하나. 이어진 말에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 안 됩니다!”
누구에게 알려진들 큰 문제였지만, 황태자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황제의 하나뿐인 아들인 그는 너무나도 호기롭고 거친 성격이었다.
그에게 알려질 바엔 차라리 대신관에게 모든 걸 말하는 나았다.
어차피 대신관은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는 듯했으니.
공작은 사색이 되어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가 태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한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거의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모르는 건 공녀의 행방과 공작이 아직 죽지 않은 이유 정도겠죠.”
죽음을 입에 담은 사람치고는 태평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공작이 더듬대며 다시 물었다.
“제, 제, 제가 주, 죽을 운명이었습니까……?”
“예. 유폐했던 공녀를 마주한 그 순간에요. 그러니까, 대략 한 달 전쯤?”
아삭,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대답하는 대신관의 말투가 퍽 가벼웠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공작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전신에서 끔찍한 검은 연기를 내뿜는 레이나를 마주쳤던 그 밤.
짧은 순간이었지만 죽음을 생각했었다. 분노한 그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예상과는 달리 물건만 챙겨 저택을 떠났다.
그런데 그날 죽을 운명이었다니. 예감이 진실이었다니.
“그럼 대체 왜, 왜 저는 죽지 않았던 것인지요……!”
혹은 다시 죽을 운명이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 공작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당장이라도 레이나가 나타나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것만 같았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공녀의 행방을 물은 것이고요.”
답답한 질문만 반복되는 상황이었으나, 대신관의 표정엔 잔잔한 미소만이 전부였다.
“알려 드리면, 알려 드리면 저는, 살 수 있는 겁니까? 예?! 제가 살 방법이 있습니까?!”
공작이 절박하게 물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뭐든 할 것처럼 말이다.
대신관은 제발 알려 달라고 호소하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대신관이 과일을 하나 집어 들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누군가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그 대신? 대신관이 잠시 말을 멈추었기에 공작이 침을 꼴깍 삼켰다.
뒷말을 이을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자, 조급해진 공작의 상체가 쏟아질 듯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 대신, 저와 자주 부딪치게 된다면 앞으로 닥칠 운명을 조금 더 빨리 알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니 협조하라는 뜻이었다. 죽음을 피하고 싶다면 노예처럼 자신의 옆에 붙어서 수발을 들며 신탁을 기다리라고.
“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발 그렇게 하게 해 주십시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릎을 꿇어서라도 시켜 달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어낸 대신관이 그제야 들고 있던 과일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대화를 이어 나갈 자세를 취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지요.”
웃음기를 지운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공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한 달 전, 공작의 목숨을 앗아 가지 않은 그녀는 어디서 무얼 하는 거죠? 제가 모르는 것을 모두 알려 주십시오. 하나도 빠짐없이.”
*
새벽부터 돌발 상황이 많아 서류를 전혀 보지 못했던 로스틴이 늦게까지 격무에 시달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자정 전까지는 전부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또 레이나를 찾아갈 예정이었기에 오늘 다 끝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도 격무에 시달릴 테니까. 이틀 연속은 싫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로스틴의 계획대로 일정이 진행되는 일은 없었다.
저녁 식사도 미룬 로스틴이 집중하여 서류를 검토하는데, 문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각하! 대신관께서 오셨습니다! 빨리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관께서?”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다니.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거늘.
다급한 용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깃펜을 내려놓은 로스틴이 알겠다며 집무실을 나섰다.
“어디에 계시지?”
“구금당한 집사가 있는 방으로 향하셨습니다!”
“……대신관께서? 집사에게?”
어째서? 단박에 이해가 되지 않는 조합이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그가 왜 자신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집사를 찾아간다는 말인지.
까닭은 모르겠지만, 당장 대신관을 만날 필요가 있었다.
로스틴이 서둘러 집사를 가둔 방으로 향하며 하인에게 물었다.
“그 밖에 할 말은? 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나?”
“아! 루벨라이트 공작님께서도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그 순간, 로스틴의 발걸음이 멈췄다.
루벨라이트 공작이라니, 조금 아까 쫓겨난 그가 대신관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고?
‘대체 왜?’
대신관과 집사보다 더 이해되지 않는 조합이었다.
빨리 그들이 향한 곳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걸음을 재촉하자, 뒤를 따른 하인이 설명을 보탰다.
“각하께 먼저 보고를 드릴 테니 잠시 기다려 달라 부탁드렸습니다만, 루벨라이트 공작님께서 화를 내시곤 대신관님과 함께 막무가내로 집사의 방으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