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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31화 (31/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31화

“그쪽이 여긴 무슨 일로……?”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으로 레이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신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 로스틴을 보았다.

로스틴이 레이나를 힐끗 돌아보며 대답했다.

“걱정되어서.”

“아,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제가 그렇게 연약한 사람도 아니고요.”

대신관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미안해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래서입니다. 대신관께서 약하지 않으시니까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말뜻을 알아들은 대신관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렇군요. 이상하네요. 왜 그렇게 되셨을까요.”

굳이 대답하지 않은 로스틴의 시선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떠는 루벨라이트 공작에게로 향했다.

옷과 머리카락, 그리고 설명하기 싫은 그 외의 털까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한 차례 겪은 바가 있었기에 누가 그랬는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저 정도면 양호한 수준의 복수이기도 하고.

표정을 굳힌 그가 입고 있던 제 코트를 벗어 공작에게 던졌다.

“입으십시오, 루벨라이트 공작.”

“……!”

패닉에 빠진 상태였던 모양인지,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은 공작이 대신관의 뒤로 숨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도와주기는커녕 내내 방치만 한 사람이거늘, 하필이면 숨어도 그런 곳에 숨다니.

아니나 다를까. 공작을 힐끗 돌아본 대신관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털과 옷만 사라졌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압니다. 걱정도 안 했고. 공녀께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마치 전적으로 레이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녀가 공작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고.

‘……뭐야,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니. 누가 그런 소릴 하래. 사람 놀라게.’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법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오해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난번에 마물을 해치웠을 때도 그렇고, 다른 때도 그렇고.

자신이 누군가를 해친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겠지.

‘뭐, 신뢰가 쌓였다고 보면 되려나.’

친분으로 쌓인 신뢰 말고, 상대방에 대해서 조금 잘 파악하게 된, 뭐 그런 거.

‘그치. 같은 동네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레이나와는 달리, 대신관은 로스틴의 말투가 아까부터 거슬렸다.

그동안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그가 대체 왜 공녀와 친분을 다졌는지 의문이 들었다.

대신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눈앞의 남자가, 상황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신탁을 틀어지게 하다못해 일을 점점 이상하게 만드는 원흉인 레이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여러모로 흥미롭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섞인 불쾌한 시선이었다.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장식품도 아닌데 왜 자꾸 쳐다봐? 기분 나쁘니까 그만 좀 가 주겠어? 저 아저씨 벌벌 떠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두 번이나 살려 줬으니까 각자 알아서 살고 싶었다. 그녀가 어서 공작을 데리고 썩 물러나라며 손을 내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부디 신의 축복과 함께 평안하시기를.”

“다시 만날 일 없어. 보고 싶지도 않으니 오지 마. 오기만 해 봐.”

만나기 싫다고 거듭 강조하는 매몰찬 레이나의 대답에 대신관이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저택을 빠져나가는 대신관의 뒤를 루벨라이트 공작이 허겁지겁 따라갔다.

그들은 왔을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어디 다친 곳은?”

로스틴이 레이나를 살피며 물었다.

그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황당해하며 대답했다.

“있을 것 같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상대가 대신관이기도 했고.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행히 아직까진 날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뭐, 조만간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마왕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주인공이 소환되었으니, 아마 곧 예정대로 여주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레이나는 소환된 여자 주인공과 잘 지낼 자신이 있었다.

아니, 애초에 마주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냥 이곳에서 조용히 살면 마주칠 일 자체가 없을 테니까.

게다가 게임 스토리와는 달리 아직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상하게 보내지도 않은 마물이 나타난 일은 있었지만, 걔들이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바로 치워 버렸기에 악명이 퍼지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적당히, 조용히, 유유자적하게 지낼 거야.’

여주가 미치지 않고서야, 북부에 틀어박혀 농사만 짓는 사람에게 덤비진 않겠지.

마물을 보낸 가짜 마왕이 존재한다는 변수가 있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대체 왜 스토리대로 진행이 되고 있는지 물어보질 못했네.’

마물을 누가 보낸 건지 대신관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 가라고 하기 전에 물어볼걸.’

하지만 이미 대신관은 떠난 뒤였다.

다시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선전 포고까지 했고, 그다지 좋은 인상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지나간 일을 빠르게 단념하는데, 로스틴이 물었다.

“종종 공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어.”

“그냥 괜찮다는 뜻이야. 다 괜찮을 예정이라는 말.”

지금 잘되고 있는데 굳이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쓸데없는 얘기는 여기까지라며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진짜 왜 온 거야? 오늘 벌써 세 번째인데.”

아무리 같은 동네 사람이라고는 해도 과했다. 게다가 따져 보면 같은 동네라고 볼 수도 없었다.

확실히 기별도 없이 하루에 세 번이나 방문한 것은 이상했기에, 로스틴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신관의 뒤를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대신관의 뒤를 왜 쫓아? 무슨 죄라도 지었어?”

“……그가 루벨라이트 공작의 집사를 죽였다. 대신관은 반역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모든 죄를 사면받게 되어 있으니, 죄를 지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뭐라고……? 집사를 죽였다고?”

이렇게 갑자기 죽었다고? 심지어 대신관이 죽였어? 근데 죄도 아니야?

“왜?”

“……글쎄. 아마도 루벨라이트 공작에게 부탁을 받아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았을 테지. 증거이자 증인인 집사를 죽여서라도.”

“그건 알겠는데, 왜 그걸 대신관이 해? 좋은 사람 아니었어? 아무리 부탁을 받았다고 해도 대신관이 사람을 죽이다니, 이상하잖아?”

“모르겠다.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어서 그의 뒤를 따라온 거라.”

하나부터 열까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레이나의 반응에, 로스틴이 자신 역시 의문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집사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하였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게 되었군.”

집사의 죽음으로 인해 레이나를 암살하려 했던 사건이 묻혔다는 점이었다.

“그쪽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도와주고 있었던 일인데.”

로스틴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도 못했을 일이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꽤 많이 좋은 놈이잖아?’

암살자를 대신 처리해 준 것도 모자라, 동상을 금화로 바꿔 준다고도 했고, 저택의 소유권을 넘겨주기까지 했으니까.

“미안하다는 말 남발하지 마. 명색이 공작 영식인데 좀 더 당당해지라고.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공작 영식 아닌데. 공작인데.

하지만 그리 말하기에는 레이나가 너무나도 쓸데없이 맑게 웃고 있었다. 오해를 정정할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알겠다. 오늘 건에 대해선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지. 이만 가 보겠다.”

그러자 잘 가라며 레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로스틴은 저도 모르게 얼굴 근처에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물론, 금세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손을 서둘러 내리고는 휙 뒤를 돌아 저택을 떠나기는 했지만.

*

심연의 저택을 떠난 대신관은 곧장 신전으로 돌아갔다.

정보를 얻을 겸, 기분 전환도 하려고 오랜만에 외출한 것인데, 그런 것치고는 영양가도 없고 불쾌했다.

게다가.

“저, 저, 저, 저를 주, 죽일 거, 것입니다……! 그, 그 악마가!”

옆에는 아직도 루벨라이트 공작이 붙어 있었다.

왜 공작이라는 작자가 이토록 겁이 많고 쓸모가 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왕을 낳은 것치고는 배포도 없었고.

‘역시 초반에 죽었어야 했는데. 모든 것이 신탁대로 잘 흘러갔어야 했는데.’

쓸데없이 살아남아서 이토록 자신을 귀찮게 하다니.

아주 잠깐, 공작에게 눈을 흘긴 대신관이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되찾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신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작께서 심신이 지치신 듯하니 정중히 모셔 주십시오. 회복하는 대로 공작저로 돌려보내고.”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대신관님! 저,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공작이 애원했지만 신관들은 가차 없었다. 그렇게 그는 신관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체 왜 저런 멍청이가 동부를 군림하는 공작인 건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지 의문이었다.

‘저자의 멍청한 씨를 받아 어리석은 짓을 반복했어야 할 마왕도 이상하게 아주 조금 멀쩡해 보였고.’

풀지 못한 의문이 잔뜩 있었으나, 공작이나마 눈앞에서 치워 다행이었다.

이 이상 그를 마주했다간 제 손으로 죽였을 테니까.

대신관은 잔물결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공간으로 향했다.

원래 피로를 느끼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불쾌한 일을 겪어 혼자 조용히 쉬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공간에는 이미 선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 거칠어 보이는 외형만큼 시끄럽고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의 남자가.

“대신관! 혹시 뭐 시킬 일 없어? 좀이 쑤셔서 말이야. 마물이든 뭐든 손봐 주고 싶은데.”

그가 감히 대신관의 옥좌를 차지하고는 함부로 말을 뱉었다.

안 그래도 곧 이세계에서 데려올 성녀에게 제일 먼저 붙여 줄 생각이라 슬슬 연락을 취할까 했는데, 이렇게 미리 와 버리다니.

조금 기다리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지. 시간이 남으니 그에게 일거리를 주는 수밖에.

마침 기분도 상한 참이었기에 잘되었다 싶었다.

“있습니다. 아주 큰 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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