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37화
상황이 상황인 탓에 다들 어제처럼 그가 눈물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한참이나 눈물이 멎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케일란은 방에서 홀로 울며 아침을 먹어야만 했다.
눈물을 흩뿌리던 케일란이 제 방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쾌적한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레이나를 비롯한 저택의 식구들은 늘 그랬듯 행복해하며 음식을 흡입했고, 로스틴과 그의 부하들은 기대 이상의 맛에 잠시 말을 잃었다.
“어때? 맛있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레이나가 우쭐대며 물었다.
얼떨결에 동석하게 된 로스틴의 부하 둘이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그렇다며 즉답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황성에서 먹었던 음식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군.”
재료나 종류가 풍부한 것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왜일까.
“요리사의 솜씨가 좋으니까.”
레이나의 시선이 미아에게 향했다. 요즘 들어 매일매일 칭찬만 받는 미아가 붉게 핀 뺨을 긁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더는 과찬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어린 요리사에 로스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꽤 젊은 것 같은데, 어디서 기술을 배운 거지? 아니, 어떻게 이런 요리사를 구할 수 있었던 거지?”
그는 이제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왜 자꾸 이 극한 오지에 있는 저택에 사람이 늘어나는 건지. 그것도 필요한 인재만 쏙쏙 골라서 말이다.
“사실 우리 집사의 여식이야. 수도에 있는 요리 학교로 유학을 떠났는데, 여자라고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하더라고.”
“……여자라서 문전박대를 했다고?”
로스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게임 속에서는 등장도 하지 않는 엑스트라면서, 그럭저럭 생각이 트여 있는 모양이었다.
“응. 웃기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사가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되었어. 그리고 미아의 실력을 알아본 내가 그녀를 믿고 채용하게 되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약간의 허세가 곁들여져 있었다.
“부럽지?”
레이나가 물었으나, 상대에게선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로스틴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역시 공작 성 내부에서 하녀들을 제외한 여성을 본 기억이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는 남자의 직업이었고, 머리를 쓰는 일이나 보좌관 역시 그러했다. 성에서 여자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가 전부였다.
굳이 성별을 따질 필요가 없을 텐데,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당연하게도.
“……그래, 부럽군.”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내, 지금이라도 깨닫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로스틴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레이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식사를 재개했다.
물론, 만에 하나 로스틴이 미아에게 공작 성으로 이직할 것을 제안하진 않을까 살피기도 하면서.
다행히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런 경우 없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즐거운 식사 시간이 끝이 나고, 레이나는 기분 좋게 로스틴과 독대할 수 있었다.
서류와 금화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로스틴이 아무렇지 않게 건넨 서류를 유심히, 아주 자세히 훑기 시작했다.
“응?”
그런데 시작부터 이상했다. 그녀가 눈을 비빈 뒤 서류를 다시 확인하곤 로스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름 틀린 거 아니지?”
왜 서류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까. 원래 소유주는 루벨라이트 공작인데.
만약 실수라면 레이나는 뜬금없이 저택을 얻게 된 셈이었다.
때문에 굳이 묻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테지만, 모르는 척 넘어갈 순 없었다.
작은 실수로 인해 로스틴이나, 혹은 이 서류를 작성했을지 모르는 그의 부관 중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게 싫었다.
그녀가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짜? 진짜 맞아? 내 이름이 적혀 있는데? 원래 소유주는 내가 아니었잖아.”
괜찮은 거 맞냐고. 대신 책임질 사람 없냐고. 확실하게 하라고.
걱정하는 레이나에게 로스틴이 쐐기를 박았다.
“세금을 내지 않아 소유권이 변경된 시점에서 저택을 어떻게 할지는 루벨라이트 공작과 무관한 일이 되었다.”
그러니 저택을 그녀에게 넘기겠다는 뜻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레이나가 양손으로 제 뺨을 감쌌다.
“그럼 나, 지금 내 집 마련한 거야? 이 저택, 정말 내 거 되는 거야?”
무늬만 공녀 아니고, 저택 가진 공녀 되는 거 맞아?
벌써 몇 번째 같은 질문을 하고 있거늘, 흥분한 레이나가 퍽 귀엽게 보였던 로스틴이 입꼬리를 올리며 긍정했다.
“서류에 서명을 마친 뒤에.”
“당장 할게!”
서명할 공간을 찾는 레이나의 눈이 번뜩였다. 다행히 여느 서류와 마찬가지로 서명란은 맨 마지막 줄에 있었다.
“루벨, 라이트, 레이나. 이거 맞아? 내 이름 이거 맞지? 된 거야?”
레이나의 몸이 되었을 때 자동으로 언어를 습득한 참이었지만, 글을 작성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대로 잘 썼는지 걱정하며 묻자, 로스틴이 이를 유심히 확인해 주었다.
“그래. 틀리지 않게 잘 썼다. 공녀께선 생각보다 글씨를 꽤 잘 쓰는군.”
괜히 사람이 호감을 갖게 만드는 칭찬도 함께였다.
정말이지, 왜 이런 좋은 남자가 엑스트라인 걸까.
이제 로스틴의 정체를 알 법도 한데, 아직도 이를 모르는 레이나가 동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서류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여기, 동상의 팔다리로 바꿔 온 돈.”
갑자기 얻게 된 집문서에 감동하는 레이나를 앞에 둔 로스틴이 부관들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부관들이 마차에 실어 놓았던 대량의 주머니를 응접실로 차례차례 들고 왔다.
“뭐야…… 이게 다?”
왜 이렇게 많아……?
분명 잘라 준 금덩이는 네 개 모두 합쳐도 자신보다 작았는데.
어째서 정수기 물통만 한 주머니들이 열 몇 개나 응접실에 쌓이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은화로 바꿔 온 건 아니지?”
아무래도 금보다는 은이 더 사용하기 편할 테니까 말이다.
“당장 사용할 수 있도록 은화와 동화도 소량 가져오긴 했지만, 대부분 금화다. 전부 은화로 바꿔 왔다면 마차 한 대로는 어림도 없었겠지.”
“하지만 내가 준 건 이만큼이었는데…….”
왜 그게 이마아아안큼으로 불어난 건데. 한 열 배쯤 불어났잖아.
“아아, 금의 순도가 다르니까. 공녀께서 주신 금은 황성에서나 쓸 법한 불순물 없는 순수한 금이고, 시중에 유통되는 금화는 그렇지 않지.”
현실에서도 14k, 18k, 24k 등등 불순물의 비율에 따라서 등급이 나뉘어 있듯, 이곳에서도 그런 모양이었다.
혁혁하다 못해 역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운 초대 루벨라이트 공작의 동상은 고맙게도 불순물 하나 없는 깨끗한 황금이었고, 시중에 유통되는 금화는 그렇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금으로 된 것들만 골라서 가져올걸. 괜히 보석 조각상 같은 걸 달라고 했어.”
이미 벼락부자가 된 레이나였지만, 괜히 아까웠다. 기회를 잘 노리고 비싼 것만 가져올걸 그랬다며 뒤늦게 후회했다.
그런 그녀에게 로스틴이 호기심을 보였다.
“보석 조각상? 어떤 것들이지?”
얘가 감정 같은 것도 할 수 있나?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귀한 것들만 보고 자랐을 테니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보여 줄게. 공작가를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들. 얼만지 한번 봐 줘.”
레이나는 다시금 로스틴의 손을 붙잡고 보물을 쌓아 놓은 방으로 향했다.
그 때문에 로스틴은 재차 당황했다. 대체 왜 레이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꾸 손을 막 잡는지 모를 일이었다.
손을 잡아서 싫다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무렇지도 않게’가 초점이었다.
어째서 그녀는 미혼의 남자 손을 막 잡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건지, 왜 자신만 계속 당황하고 놀라고 신경을 쓰는 것인지.
……떠올린 것도 웃기지만, 혹시 다른 남자 손도 이렇게 막 잡는지 등등.
아니, 무엇보다 자신은 왜 이딴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지가 제일 의문이었다.
그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레이나가 금은보화를 소개했다.
“여기야. 여기에 다 모아 놨어. 내 전 재산.”
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겠지만, 로스틴에게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이 큰 저택을 자신에게 돌려주기까지 한 터라 신뢰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큰 착각이었으나, 다행히 가진 것이 너무 많은 로스틴은 소소한 레이나의 재산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금이나 보석 같은 것보다는 아직도 레이나에게 잡혀 있는 제 손이 더 신경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