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43화
그때였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요. 오히려 더 좋아질 일만 남으신 것 같습니다.”
얼굴에 흙을 묻히고 손에는 모종삽을 든 체이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본래 직업은 기사인 그였으나, 이제는 훌륭한 농부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는 무급이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그렇게 되어 버린 그가 말을 이었다.
“대단한 능력과 재산, 신분, 공녀님을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다 갖추셨는데 뭐가 그리도 불안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북부의 공작과 나름 괜찮은 관계까지 맺었기에 신변의 위협도 없었다.
이제 막 세상에 나타난 성녀가 레벨을 1,000까지 다 올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응? 잠깐만.’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레이나는 문득 뜻밖의 묘안이 떠올랐다.
‘성녀가 레벨을 올려서 문제가 되는 거면, 레벨을 못 올리게 막아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정해진 스토리대로 방해를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녀가 레벨을 올릴 장소를 미리 없애 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를테면 서부 사막의 던전이나, 북부의 미궁같이 험난한 곳.’
상당히 높이 레벨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진입조차 버거워서 북부의 대공과 함께 깼던 북부 미궁이 특히 그러했다.
‘내가 깨 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괜찮은 생각이었다. 혼자는 조금 무서우니, 북부의 대공과 함께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북부의 대공과 아직 안면도 트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앞으로 공작님께 잘 보여야지. 결심한 레이나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 알겠어. 걱정은 여기까지 할게. 아, 참. 그리고 급여는-”
“제가 관리해도 될까요, 공녀님?”
얼마가 좋겠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베로니카가 빠르게 레이나의 말을 끊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을 보았을 때, 또 터무니없이 큰 금액을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도와주겠다고 온 사람들인데 짜게 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넉넉하게 주되, 상식적인 범위 내에서 지급하고 싶었다. 제발.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로스틴이 바꿔다 준 금화를 보고 그동안 급여를 너무 많이 주었구나 생각했던 레이나였기에, 냉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앞으로 온실 쪽은 전부 베로니카가 맡아 줘.”
*
성녀는 오랜만에 대신관과 독대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마법을 익히고 레벨을 올린 덕분인 것 같았다.
매일매일 지하 훈련실에서 땀에 절어 훈련만 하던 그녀는 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단장을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치장에 시간이 걸린 탓일까. 대신관은 이미 식당에 와 있었다.
가뜩이나 시간도 없을 텐데, 자신 때문에 괜한 시간을 허비했을까 봐 미안해진 그녀는 이마가 땅에 닿을 것처럼 허리를 깊게 숙여 사과했다.
“대, 대신관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온 참이니까요. 그리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관은 오늘도 친절하고 다정했다. 그가 손수 성녀의 몸을 바로 세워 자리까지 에스코트했다.
때문에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는 것도 처음인데, 심지어 첫눈에 반한 사람이 그렇게 해 주고 있었다.
“조금 이르지만 식사를 시작할까요? 최근 들어 계속 바빠, 이렇게 제대로 식사하는 것이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아! 네, 네……!”
그러셨구나. 바쁘셨구나.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는 말 같아 성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스스로의 업적을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난 며칠간 얼마나 많이 마법을 연습하고, 또 늘었는지 말하려는데, 식전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대신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전 내에서만 계시다 보니 생각했던 만큼 성장하지 못하신 것 같아서, 성녀님을 도와줄 기사를 한 명 불렀습니다.”
“아…….”
서둘러서 자랑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대신관은 그녀의 업적을 전혀 좋게 평가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정말 열심히 했는데. 나름 레벨도 5까지 올렸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레벨이 오르는 게 똑똑히 보였다.
비록 하루에 한 번 정도의 긴 텀이었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다.
체력이나 마력, 행운, 매력이 올랐다는 알림 창이 뜨는 것도 신기했고.
그러나 그 정도로는 대신관의 마음에 들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미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아 그녀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
도와줄 사람을 붙여 준다는데 갑자기 기운이 없어진 성녀에, 대신관이 의문의 눈빛을 띠었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것일까. 돌이켜보았지만 달리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상한 성격이군.’
스스로를 탓하는 성녀와는 다르게 대신관은 그녀의 성격을 탓하고 넘어갔다.
“실력이 출중한 자이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성녀님도 많은 성장을 하시겠지요. 기대가 큽니다.”
그러면서 대신관이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 미소를 정면에서 마주하게 된 성녀가 다시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성녀는 생각보다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소심한 것이 단점이었지만, 반대로 괜한 의견을 피력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닫고 있는다는 장점이 되기도 했다.
“그럼 식사를 시작할까요?”
“……아, 네!”
그 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당은 정적에 휩싸였다.
성녀는 오랜만에 만난 대신관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까처럼 착각하여 실수라도 할까 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대신관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는 그저 식사가 끝나기 전에 기사가 도착하여 시간 낭비 없이 다음 업무로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침묵이 계속 이어졌기에, 결국 참지 못한 성녀가 최대한 실수하지 않을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저어, 그런데 마왕이라는 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요?”
굳이 성녀가 알 필요 없는 질문이었지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다.
물로 입을 깨끗이 헹군 대신관이 퍽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마왕은 현재 북부 끝에 숨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힘을 키우며 수하들을 부려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죠.”
“정말 제가 그를 이길 수 있을까요……?”
“그럼요. 성녀님만이 마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영 자신이 없어 보였기에 대신관이 힘을 내라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그에 그녀가 조금 힘이 들어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쯤 되니 무의미한 질문이나 하는 그녀가 조금 귀찮았다. 빨리 일을 마치고 식당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디저트가 나온 직후,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대신관보다 훌쩍 키가 큰 그는 장발의 짙은 회색 머리카락과 눈, 그리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이름은 아덴 크로니클.
크로니클 자작가의 차남이었다.
사실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이었으나,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익힌 덕분에 꽤나 이름을 알리는 중이었다.
아덴은 어디서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미간을 찌푸리며 나타났다.
빠른 걸음으로 대신관에게 다가온 그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마왕의 위치를 말하십시오.”
그에 막 디저트를 한 입 먹은 대신관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미리 말하지 않았던가요? 안타깝게도 오늘 제가 경을 부른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성녀님과 함께 마물을 해치워 달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 불렀습니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를 모르겠군요. 마왕의 위치를 말해 주신다면 제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그가 완고하게 대신관의 부탁을 거절했다. 지척에 있는 성녀에게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성녀가 조금이라도 이름을 떨친 뒤에야 붙여 주려고 했는데.’
그는 실력이 괜찮은 마검사였지만, 무능한 사람을 경멸했기에 지금의 성녀에겐 버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붙여 주는 것도 애매했다. 애초에 지금 당장 시간이 빈 사람이 그밖에 없기도 했고.
대신관이 디저트를 한 입 더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반이나 더 남아 있었기에 어딘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쩔 수 없군요. 알려 드리겠습니다. 단, 성녀님과 함께 이번 일을 무사히 마치고 오면 그때 말하도록 하죠.”
대신관은 제 할 말만 마치곤 빠르게 식당을 벗어났다.
눈앞에서 갑작스럽게 오간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성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있자, 그제야 그녀에게 시선을 돌린 아덴이 처음보다 더 불쾌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뭘 하는 거죠? 방금 못 들었습니까? 빨리 이동해야 하니 일어나십시오.”
“아, 네, 네……!”
화들짝 놀란 성녀가 엉덩이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녀를 한 차례 못마땅하게 본 아덴이 먼저 성큼성큼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성녀가 헐레벌떡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