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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44화 (44/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44화

*

성녀와 아덴이 가게 된 곳은 동부 외곽이었다. 동부의 중심지와는 조금 떨어져 있었고, 북부의 경계와 맞닿은 너른 숲이었다.

그곳에 마왕이 마물들을 보낼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왔다고 하였다.

북부 외의 지역에 마물이 나타날 거라는 신탁이 내려온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성녀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닐까 아덴은 추측했다.

신전에서 알려 준 곳에 도착하자마자, 신탁대로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전에도 마물들을 몇 번이나 상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약해 보이는데.’

눈앞의 마물들은 상당히 약해 보였다. 크기도 성인 남자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무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덩치가 작아서 그런지 별것 없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을 몇 번 휘두르자 마물들이 툭 쓰러졌다. 주특기인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마물을 전부 쓰러뜨리면,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마물들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 하는 거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마물들의 습격에 아덴은 슬슬 짜증이 났다.

강하기라도 하면 싸우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지금은 그저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또다시 무더기로 소환된 마물들에 이를 간 아덴이 검에 마법을 실어 크게 휘둘렀다.

단 한 번이었다. 한 번의 움직임에 마물들이 전멸했다.

하지만 이는 잠시뿐이었다. 곧장 새로운 마물들이 소환되었기에 그의 공격은 의미 없는 행동이 되었다.

“하, 쓰레기 같은 마왕 놈! 날 가지고 놀고 있어!”

더는 못 해 먹겠다며 아덴이 커다란 바위에 몸을 걸쳤다.

어차피 쓰러뜨려 봤자 다시 소환될 테니, 괜히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마물이라고는 해도 약한 놈들이라 적당히 피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동행한 성녀는 그럴 수 없었지만.

“꺄, 꺄아아악!”

아덴이 대충 제 근처에 다가오는 마물만 처리하며 상황을 방치해 버리자, 성녀가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에게는 몹시도 약한 마물이었으나, 성녀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고작해야 레벨 5인 그녀는 마물의 좋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시, 신성한 빛!”

그렇다고 성녀가 넋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며칠간 습득한 마법으로 마물들을 열심히 공격했다.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지만.

“신성한 빛! 신성한 빛! 신성한 비이잇……!”

차라리 전혀 통하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그럭저럭 따끔따끔했기에 마물들의 심기만 건드리는 꼴이 되었다.

“꾸룩? 꾸룩-?!”

“퀘엑! 퀘에엑!”

“크아아아악!”

분노한 마물들이 성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였다.

무기까지 꽉 쥔 채 마물들이 성녀를 향해 뛰어올랐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제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하려고 했는데. 더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인정받고 싶었는데. 칭찬받고 싶었는데.

게임 속 주인공이 된다고 근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좌절하며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는데—

화르륵! 펑!

무언가 불타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짜증 난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녀! 대체 뭘 하는 거지?”

감았던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자, 매서운 눈을 한 아덴이 보였다.

남은 적까지 모두 처리한 그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마물을 처리하러 온 게 아니었나? 아까부터 지금까지 성녀가 한 게 뭐가 있지? 비명을 지르는 것? 옆에서 거치적거리는 것?”

정곡을 찔린 성녀는 차마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도움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아덴이 일방적으로 마물을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성녀가 조금이라도 전투에 익숙해질 수 있게 싸우는 법을 알려 주었다면, 틈을 조금만 주었더라면-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돕고 싶었는데 너무 약해서……. 죄, 죄송합니다…….”

결국 성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잘해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잘하지 못해서 스스로도 답답하고 억울했다.

왜 자신은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일까. 언제쯤이면 상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인정받을 수 있을까.

훌쩍이는 그녀를 앞에 둔 아덴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홀로 푸념했다.

“대신관이 마왕의 위치만 알려 줬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바로 마왕을 없애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하는 그의 말에 성녀는 아까 대신관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다름 아닌 마왕의 위치였다.

“부, 북부의 끝이라고는 하셨는데…….”

하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작게 웅얼대자, 용케 말을 알아들은 아덴이 그녀에게 물었다.

“북부의 끝? 누가, 대신관이 그랬나? 마왕이 그곳에 있다고?!”

“아, 네, 네……! 저, 정확한 위치는 듣지 못했지만, 마왕은 북부 끝에 숨어 있다고 하셨어요…….”

아니면 어떻게 하지? 걱정된 성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아주 작은 정보밖에 주지 않았음에도 아덴의 표정이 퍽 밝아졌다.

‘어? 도, 도움이 된 건가?’

그런 생각에 성녀도 눈물을 뚝 그치는데, 갑자기 품에서 소형 이동석을 꺼낸 아덴이 그것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어?!”

어, 어디로 간 거지?! 놀란 성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덴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하여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시 소환되기 시작하는 마물들의 무리였다.

“기, 기, 기, 기사님?!”

성녀의 외침에 새로이 나타난 마물들이 포효했다.

“크아아아악!”

“케에에엑!”

그들은 손에 든 무기를 높이 쳐들고 하나뿐인 목표물, 성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꺄아아아악!”

죽음을 직감한 그녀가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웅크렸다. 그와 동시에 마물들의 무기가 그녀의 몸을 내리쳤다.

“꾸엑?!”

“케켁?!”

하지만 그 어떤 무기도 성녀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마물들이 그녀를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어, 어……?”

어째서……? 당황한 성녀가 얼어붙었다. 마물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때리려고 무기를 휘둘렀지만, 공격이 성공하는 일은 없었다.

“시, 신성한 빛……?”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녀는 주문을 외워 보았다.

“쿠에엑!”

그러자 빛에 맞은 마물이 피부를 긁으며 따가워했다.

마물이라고는 해도 현재 상황 정도는 이해했는지, 놈들이 뒷걸음질 치며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웅크렸던 몸을 일으킨 성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입매가 단단히 다물렸다.

약한 마법이라도 계속 사용하면 치명상을 만들 수 있을 터.

지하 훈련실에서 종일 마법을 썼던 기억을 회상한 그녀가 양손을 뻗어 힘차게 주문을 외웠다.

“신성한 빛! 신성한 빛! 신성한 빛! 신성한 빛! 신성한 빛! 신성한 빛! 신성한 비이잇-!”

“꾸에에에엑!”

“케에에엑!”

*

아덴은 소형 이동석을 사용하여 곧장 북부로 넘어갔다.

혼자 내버려 두고 온 연약한 성녀는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북부 끝에 숨어 있다는 마왕의 위치뿐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북부 끝은 마왕이 수시로 마물을 소환하는 곳인 데다가, 윈터스노우 공작 또한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 상태인데.’

세상에서 윈터스노우 공작만큼 마왕을 증오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은 그저 세상을 어지럽힐 마왕을 막연히 두려워할 뿐이지만, 그는 이미 가족을 잃은 상태였다.

만약 자신이 그런 상황에 직면했다면, 가만히 앉아서 밀려오는 마물만을 상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마왕의 위치를 알아내 복수를 하려고 했겠지.

꽤 합리적인 추론을 거친 아덴은 마왕의 본거지를 공작 성 지척에 있는 북북서의 끝이라고 단정했다.

목적지가 정해졌기에 그는 서둘러 북북서 끝으로 향했다. 말을 빌리고, 소형 이동석도 추가로 사용하였다.

덕분에 그는 머지않아 아이스베리 마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지도상으로는 이곳이 마지막 마을인데. 위로 가는 길이 뚫려 있군.’

북부에서 가장 험난한 지역일 터인데, 어째서 눈이 다 녹아 평탄한 길이 보이는 것인지.

‘아무래도 정확히 찾은 모양이야.’

확신한 아덴은 새벽을 틈타 마왕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신탁의 마왕.

윈터스노우 공작도 지켜만 보고 있는 상황인 듯싶었기에 정정당당하게 쳐들어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그는 달빛마저 흐려진 새카만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내 전신을 검게 물들인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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