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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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적을 환영하기라도 한다는 듯 평탄하고 깨끗한 길에 그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마왕 놈. 얕보고 있군.’
도대체 윈터스노우 공작은 이 비참한 상황을 어떻게 참아 내고 있는 것일까.
아덴이 이를 갈았다. 반드시 마왕을 제 손으로 해치우리라는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윽고 심연의 저택에 도착한 그는 저택 담을 두른 검은색 불꽃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무엇이 그리도 당당하다고 이렇게 대놓고 마법을 사용해 놓은 것인지.
‘역시 얕보고 있어.’
마왕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윈터스노우 공작에게 동정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을 기점으로 제국에서 가장 강한 자의 이름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마왕 놈을 내 손으로 해치울 테니까.’
제 실력을 누구보다 믿는 그가 저택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곤 조심스럽게 담을 넘었다.
혹여나 담을 넘는 과정에서 마왕이 미리 설치해 둔 함정에 걸릴까 봐, 혹은 숨어서 경계를 서는 자가 있을까 봐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방어 마법을 몸에 걸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왕은 담에 특별히 함정 같은 것은 설치하지 않은 듯했다. 경계를 서는 자도 없었다.
사람을 만만하게 봐도 유분수가 있지. 그쯤 되니 기가 차고 자존심이 상했다.
대체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기에 이토록 무방비한 환경을 만들어 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왕에게 지게 된다면 그야말로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할 것이다.
절대로 그리되지 않으리라 다짐한 아덴이 오감을 바짝 곤두세워 은밀하게 움직였다.
만에 하나 벌어질 전투를 대비하여 공격 마법을 혀끝에 감았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와 긴장을 하며 저택 본관 지척까지 숨을 죽이며 다가가는데—
퍽!
아덴의 몸에 돌 같은 무언가가 날아왔다.
“삐이익-!”
괴상한 울음소리는 덤이었다.
‘젠장, 들켰나!’
그는 서둘러 공격 마법을 전방과 후방 전체에 날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맞힌 감각이 없었다. 아니, 사람의 기척 자체가 없었다.
대체 뭐지?! 당황하여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가려는데, 뒤에서 재빠르게 날아온 단검이 아덴의 발치에 떨어졌다.
아무래도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검을 뽑아 뒤를 돌아 휘두르자, 곧장 챙! 소리와 함께 쇠붙이가 맞부딪쳤다.
“뭐야? 꽤 실력자잖아?”
자다 깨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케일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아덴이 할 소리였다. 검을 비틀어 틈을 노려 보려고 했지만 빈틈이 없었다. 녹록지 않았다.
챙! 챙!
허공에서 칼이 몇 번이나 맞부딪쳤다. 실력이 비슷한 탓에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시간 싸움은 좋지 않았다. 그사이에 분명 마왕이 나타날 테니까.
아덴은 검에 마법을 둘렀다. 그의 머리카락을 닮은 회색 불꽃이 칼날을 감쌌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검술 능력이 비등한데, 상대방이 마법까지 곁들이면 지는 건 당연했다.
케일란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2층 창문이 열리며 검은색 불꽃이 날아와 아덴의 몸을 구속했다.
“……뭐야, 새벽에 시끄럽게.”
레이나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잠이 깨지 않는지 눈을 비빈 채였다.
“지, 지, 지금 잠결에 마법 날린 거야?!”
케일란이 기겁했다. 자신이 맞았으면 어쩔 뻔했냐며 그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누군데.”
퍽 나른한 목소리였다. 주문하는 대로 마법이 나갔기에, 잠결이라 한들 빗맞을 일은 없었다.
“지금 그런 말 할 여유가 있어? 너 큰일 날 뻔한 거 몰라? 내가 아니었으면 진즉에 이놈한테 당했을 거라고!”
케일란이 검은 불꽃에 묶여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아덴을 가리켰다.
“내가 너 살려 준 거야, 알아? 흥, 고마워하라고. 큰맘 먹고 베푼 자비니까.”
자랑할 거리가 생겨서인지, 팔짱을 낀 케일란은 몹시도 의기양양해했다.
그에 레이나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굳이 안 그래도 됐는데. 악의를 갖고 저택 본관에 닿으면 불에 태우라고 해 놨으니까.”
“……뭐야?!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잊을 게 따로 있지!”
젠장, 괜히 힘만 뺐네. 머쓱해진 케일란이 짧은 머리카락이 송송 올라온 두피를 긁으며 딴청을 부렸다.
그제야 반쯤 잠이 깬 레이나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사실 저택 본관에 마법을 건 까닭의 반 정도는 케일란 때문이었다.
지금은 순순해 보이는 그였지만, 마음이 돌변하는 순간 바로 태워 버리기 위해.
물론 그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가 침입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 나와 싸워 준 그에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말이었으니까.
“알겠어. 이제 알아둬. 그리고 고마워.”
픽 웃은 레이나가 무려 고맙다고 하자, 얼굴이 머리카락만큼 빨갛게 달아오른 케일란이 괜히 땅을 발로 찼다.
“흠, 흠. 고마운 거 알면 됐-윽?!”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난 아덴이 케일란의 복부를 팔꿈치로 찍고 도주를 시도했다.
“잡아.”
하지만 곧장 레이나가 불꽃으로 밧줄을 만들어 아덴의 전신을 구속했다.
그는 더 이상 미동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야! 근데 얘는 왜 머리털 안 태워? 왜 묶기만 해?”
생각해 보니 짜증이 난다는 듯 케일란이 구시렁거렸다.
만약 아직까지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았다면, 그가 손수 아덴의 머리카락을 뽑아 놓았으리라.
“그거야, 누군가를 다치게 하진 않았으니까.”
“……나 지금 팔꿈치로 찍혔거든?”
“넌 튼튼한 전투 요원이잖아. 안나는 싸움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연약한 사람이고. 네 손짓 한 번에 죽을 수도 있었어.”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반박할 여지가 없었는지, 케일란이 괜히 쓰러진 아덴을 발로 걷어찼다.
“윽!”
입까지 막힌 그가 고통의 신음을 흘림과 동시에, 뒤늦게 저택 현관에서 집사와 안나가 뛰쳐나왔다.
“무, 무슨 일 있었습니까?! 삐이익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어머나, 세상에!”
안나가 바닥에 쓰러진 아덴을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집사 역시 ‘삐이익’ 하는 귀여운 소리를 저 장신의 사내가 낸 것이냐며 당혹스러워했다.
“삐이익?”
그러고 보니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긴 한데. 아니, 그러고 보니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고 깬 것이 맞았다.
마치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알리는 병아리의 외침 같은 소리였다.
‘잠깐만, 삐이익? 어디서 들어 본 소리 같은데.’
삐이익, 삐이익이라……. 삐이익. 삐익. 삑. ……삐이?
“설마……?!”
하얗고 뽀얀 생명체를 떠올린 레이나가 설마 아니겠지 생각하며 헐레벌떡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레이나는 서둘러 바닥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하얀색 눈 뭉치가 보였다.
“삐이야!”
멋대로 삐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루카를 조심스레 확인했다.
“사, 살아 있는 거야……? 죽은 거 아니지……?!”
눈을 감고 있어서 알 길이 없었다. 눈 뭉치라서 숨을 쉬는지도 잘 모르겠고.
게다가 너무 작고 초라해서 만지기가 겁이 났다. 만지면 꼭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런 상태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삐이와 침입자 사이에 서로 접촉이 있었고, 가엾게도 삐이는 미동도 없다는 점이었다.
“……용서 못 해, 이 개 쓰레기 같은 자식!”
레이나의 전신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분노로 일렁이는 불꽃이 저택 지붕까지 크기를 키웠다.
저택 전체를 집어삼킬 듯 커다랗고 음험한 빛을 내는 불꽃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아덴을 덮쳤다.
“으아아아악!”
불꽃에 휩싸인 아덴이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곧 비명은 잦아들었다.
마치 목숨이 끊어지기 전, 단말마라도 내지른 것처럼.
‘설마 죽은 건-아니, 죽인 건 아니겠지? 물론 죽어도 싸긴 하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었기에 지켜보던 일동이 숨을 죽였다.
그러다가 이내 침입자의 뽀얀 살결과 두피가 드러나자, 아무리 화가 나도 그녀가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데려가 가둬.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한 레이나가 삐이를 소중히 안고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한 게 대체 무엇이 있다는 건지. 설마 이번에야말로 모근까지 모두 녹여 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머리털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외의 소중하고 수많은 부분을 잃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리 생각하며 지켜보던 이들이 차마 묻지 못하고 마른침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