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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48화 (48/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48화

*

다행히 금고 장인은 1층 홀에서 쉬고 있었다.

레이나와 로스틴이 아덴을 보러 간 사이, 눈치 빠른 미아가 다과까지 챙겨 준 상태였다.

“이제야 제 존재를 떠올리셨나 보네요, 공작님.”

부드럽고 폭신한 케이크를 한 접시 비운 그녀가 두 사람을 마주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일린이라고 합니다. 금고가 필요하시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정중한 예를 갖춘 인사였지만, 긴장한 눈빛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레이나의 검은색 불꽃 때문이었다.

머릿속이 조금 혼란스러웠으나, 로스틴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럴 땐 괜히 나서며 묻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잘못했다간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읽었지만, 대충 넘어간 레이나가 대답했다.

“응, 맞아. 아주 튼튼하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커다란 금고가 필요해. 앞으로 내 모든 재산을 금고에 넣어 둘 예정이거든.”

“모든 재산을 넣을 수 있는 커다란 금고요? 그럼 방 하나를 금고로 개조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크고 튼튼하게만 만들어 준다면 뭘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좋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성격의 의뢰자에 에일린의 눈이 빛났다.

크고 튼튼하기만 하면 뭘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다니. 가진 능력을 모두 활용하여 남의 돈으로 뿌듯함을 채울 기회였다.

“아, 그리고 문을 이중으로 해 줄래? 혹시 모르니 문과 문 사이에 함정을 만들 거거든.”

“어떤 함정이죠?”

“이거.”

레이나가 손에서 불꽃을 피웠다.

그쯤 되니 더는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보란 듯이 대놓고 보여 주는데, 묻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에일린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그 불꽃은…….”

“나 마왕 아니야. 그냥 불꽃이 검은색일 뿐이야. 내 낙은 누워서 디저트를 먹으며 온실이 풍성해지는 걸 구경하는 것뿐이라고. 여기 이 공작님이 증인이야. 그렇지?”

다다다다. 이제는 아주 변명이 술술 나왔다.

하도 질문을 받다 보니 자다가도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뜻밖의 화살이 날아왔으나 전혀 동요하지 않은 로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연이다. 신탁에서 검은 불꽃을 사용하는 사람이 오직 마왕뿐이라고 하진 않았으니까. 마왕도, 공녀도 검은색 불꽃을 사용하는 거겠지.”

오, 뭐야. 앞뒤가 꽉꽉 닫힌 대단한 논리인데?

로스틴은 그런 식으로 레이나의 불꽃을 납득한 모양이었다.

“딱히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마법 색상 하나 때문에 마왕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레이나는 감탄했다. 자신의 논리는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인데, 그의 대답은 퍽 합리적이었다.

그것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울릴 정도로 말이다.

‘물론 내가 진짜 마왕으로 태어난 게 맞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나 결단코 로스틴의 부모에게 해를 끼치거나, 세상에 마물을 불러온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대단한 능력도 없었다. 이따금 머릿속에서 음험한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힘을 줘서 쫓아내니 조용해지기도 했고.

두 사람이 합심하여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에일린이 퍽 맑아진 눈빛으로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니 그런 거겠지요.”

이 세상에 그만큼 마왕을 증오하는 자도 없을 테니까.

“그럼 저는 저택을 좀 둘러보겠습니다. 금고를 어디에 어떻게 만들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좋아. 마음대로 막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돼. 점심 식사 때까진 돌아오고. 멋진 금고를 기대할게, 에일린.”

무엇이든 허락한다는 말에 에일린이 꾸벅 예를 차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여러모로 기분이 좋아진 레이나가 로스틴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그럼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 삐이나 보러 갈까?”

삐이라니. 이름이 진짜 삐이가 되어 버렸구나, 루카.

루카의 까칠한 성격을 아는 로스틴은 괜히 마음이 아팠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냉정하게만 구는 루카가 레이나에게는 조금 정을 붙인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다.

그러한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불현듯 아까 하다 만 주제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뭘 도와줘야 하는 거지?”

“아아, 미궁을 다녀오고 싶어. 북부 산맥에 있는 미궁.”

“……설마,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한 그 미궁을 말하는 건가?”

그동안 용감무쌍한 기사들과 용병들이 비밀을 파헤치려고 수도 없이 탐험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한 곳이었다.

미궁의 위험성 때문에 지금은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런 무시무시한 곳에 다녀오고 싶다니. 제정신인 걸까.

순간적으로 로스틴은 레이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응, 맞아. 거기.”

“대체 왜지? 누워서 디저트를 먹으며 온실이 풍성해지는 걸 구경하는 게 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방금 전에 한 말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미궁이라니.

이 세상은 물론, 저세상 마물까지 모두 모여 있다는 그곳에 대체 왜.

로스틴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왕이나 찾을 법한 장소에 레이나가 가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걸 뭘 어떻게 설명하지. 고심하던 그녀가 최대한 간결하게 대답했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미궁엘 가야 내가 살 수 있어.”

“……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

“아마도.”

“…….”

로스틴이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그는 곧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게 하지.”

“뭐? 정말?”

“그래, 그래야 내 잘못이 사라진다고 했으니, 별수 없지. 게다가 미리 고맙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너무 심각하게 고민해서 거절할 줄 알았는데.

게임상에서도 여주가 공작을 구해 주고, 잠깐이지만 아픈 동생을 치유해 주어서 미궁을 허락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아니, 그럼 얼굴이라도 좀 확실하게 보여 주지.’

남주 후보가 아니라서 그런지 흐리멍덩한 얼굴로만 그려 놓았었기에, 당연히 로스틴과 공작을 같은 사람이라고 연관 지을 수 없었다.

비중도 전무했다. 여주가 미궁을 탐험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주들과 스토리를 진행하는 동안 로스틴은 옆에서 계속 싸우며 칼과 방패 노릇만 하고 있었다.

‘뭐야, 불쌍하잖아? 심지어 남주 후보들보다 로스틴이 천만 배는 더 잘생겼는데.’

그녀는 지금 남주 후보 중 두 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하나는 반 대머리가 되어 저택을 열심히 쓸고 닦는 중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대머리가 되어 갇혀 있는 상태였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로스틴이 억만 배는 나아.’

둘에게 머리카락이 있다고 해도 로스틴이 훨씬 나았다.

어른스럽고, 진중하고, 최연소 공작이고, 말한 것은 꼭 지키고, 잘 도와주고, 착하고, 배려 있고, 이해심 깊고, 잘생겼고, 키도 크고, 듬직하고, 능력이 있기까지.

로스틴에 대한 레이나의 평가가 급상승했다.

그러고 보니 첫 만남이 조금 까칠해서 그렇지, 꽤 이상형에 가까웠다.

이상한 마법을 쓰는 외지인에 대한 경계라고 생각하면 처음의 적대심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사정을 알고 나서는 저택도 준 상태였다.

오해가 풀렸음에도 체이스를 데려가지 않고 농부로 사용하게 내버려 두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 고마운 것들이 떠올라 레이나가 로스틴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런 레이나의 뺨을 찔러 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자제한 로스틴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 대신 한 가지는 약속하고 가도록 하지.”

“약속? 음, 뭔데? 들어 보고.”

“위험해지면 바로 나오기로.”

아니, 약속하지 않더라도 위험해지면 곧장 레이나를 들고 튈 생각이었다.

“물론이야. 내 목숨을 지키려고 가는 곳인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어. 북부의 훌륭한 공작을 잃게 만들기도 싫고.”

레이나가 로스틴의 새파란 눈을 빤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로스틴 역시 진심이라고 열렬히 주장하는 그녀의 자줏빛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절대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했다.

“흠, 흠. 도착했네.”

그러다가 살짝 민망해진 레이나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삐이! 잘 있었어?”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채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안타깝게도 삐이는 그곳에 없었다.

“가 버렸나.”

“창문이 열려 있군. 외벽을 타고 나간 모양이야.”

공작 성에서도 종종 있던 일이었다. 처음에는 몹시도 걱정한 로스틴이었으나, 주의를 줘도 매번 그랬기에 이제는 포기한 상태였다.

“아쉽다. 이제부터 같이 지낼 수 있나 싶었는데.”

레이나가 섭섭해하며 괜히 창문 밖을 기웃거렸다. 혹여나 삐이의 흔적이 남아 있기라도 할까 봐.

그런 그녀의 뒤에 서서 함께 밖을 확인한 로스틴이 이내 시선을 내리고는 레이나에게 말했다.

“잘해 줘서 고맙다.”

“삐이에게? 고마울 게 뭐가 있어. 날 지켜 준 소중한 존재인데 당연한 일이지.”

“그런가.”

로스틴이 되물었다.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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