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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49화 (49/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49화

*

금고는 1층에 만들게 되었다.

크기도 크기거니와 튼튼하게 만들려면 대량의 금속이 필요한데, 그 무게를 견디려면 1층에 만들 수밖엔 없었다.

“문을 이중으로 한다고 하셨는데, 문뿐만 아니라 금고 전체를 이중으로 만드는 건 어떨까요? 공녀님의 불꽃을 견딜 만한 금속을 찾아보겠습니다.”

뜻밖의 좋은 의견에 레이나가 솔깃했다. 그러게? 전체를 다 불꽃으로 두르면 절대 침입하지 못하겠네.

“좋은 생각인데? 그리고 금속은 괜찮아. 금속은 태우지 말라고 불꽃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거든. 물건을 훔치려는 자에게만 공격하라고 한다든가.”

그러니까 그냥 튼튼한 걸 쓰면 된다는 설명에 에일린의 눈이 흥미를 띠었다.

“오호, 정말인가요? 공녀님의 그 불꽃, 엄청난 능력이군요. 굳이 제 금고가 필요 없을 정도로요.”

“아냐, 그래도 금고는 있어야 해. 무념무상인 놈이 찾아올 줄 어떻게 알아. 능력이 통하지 않는 놈이 있을 수도 있고.”

세상엔 온갖 기괴한 사람들이 넘친다며 레이나가 혀를 찼다.

에일린은 어쩐지 레이나의 말이 재미있었다. 첫인상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내로 크기를 재고, 재료를 준비해서 다시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좋아. 그럼 일단 점심부터 먹자. 우리 요리사가 엄청 대단하거든. 먹고 놀라지 마.”

“오호? 그런가요? 공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에일린이 정말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레이나와 함께 식당으로 향한 그녀는 문득 주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미아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도록 해. 거긴 미아의 공간이니까.”

“괜찮습니다.”

마침 식전 음료를 가져오던 미아가 흔쾌히 승낙했다. 그에 에일린이 냉큼 미아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은 쿵짝이 잘 맞았다. 주방 시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처음 만난 탓에 미아는 퍽 신이 나 보였다.

“오, 확실히 그렇게 바꾸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사실 팔이 조금 아팠거든요. 화구가 더 있으면 좋기도 하겠고요.”

“확실히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이네요. 그리고 여기도-”

식당과 주방 사이에 벽이 있어 잘 들리진 않았지만, 에일린의 제안이 미아에게 퍽 도움이 되는 듯싶었다.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은 레이나가 주방에 불쑥 머리를 들이밀고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일린, 혹시 주방도 고쳐 줄 수 있어?”

“예. 지금은 금고의 수요가 많아 금고만 만들고 있지만, 원래 이런저런 것들을 다 만들었답니다.”

“그래? 그럼 둘이 상의해서 편한 대로 고쳐 줄래?”

사실 현 주방은 대충 불만 가져다 놓은 상태라서 쓰기 불편한 게 당연했다.

“저장고 같은 것도 있으면 좋겠다. 수확한 채소나 과일을 싱싱하게 저장할 공간.”

지금도 있긴 했지만, 점점 더 수확량이 많아져서 조만간 부족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 외에도 레이나가 생각나는 것을 하나하나 읊었다.

다행히 늘 바빴던 에일린의 시간이 마침 비어 있었기에, 그녀가 전부 고쳐 보겠다며 의지를 보였다.

“최근 들어 금고만 만들어서 재미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흥미가 생기네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대체 어떤 불행이 찾아오려고 이렇게 운이 좋은 걸까 생각하며 레이나가 식당에 다시 자리했다.

머지않아 식사가 차려지자 레이나는 케일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덴한테 식사 좀 가져다줄래?”

“엥, 내가? 왜? 굳이?”

방금 막 음식을 흡입하려던 참인데. 왜 하필 자신이냐며 케일란이 불평했다.

“네가 여기서 제일 강하잖아. 아덴이 도망치려고 하면 어떻게 해?”

“……어, 내, 내가 강한 건 맞긴 하지.”

그래도 빨리 먹고 싶었는데. 칭찬을 받은 탓에 케일란이 어쩔 수 없다고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칫.”

미세하게 뺨이 붉어진 상태였다. 하여간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다. 레이나가 속으로 웃었다.

그는 미아에게서 음식을 받아 아덴을 가둔 방으로 향했다.

빨리 주고 돌아가고 싶었기에, 다짜고짜 문을 열곤 음식을 냅다 아덴의 앞에 내려놓았다.

“야, 죄수. 먹어라. 식사다.”

“이 더러운 마왕의 개! 내가 이따위 음식을 먹을 것 같나? 뭐가 들었을 줄 알고?!”

그러나 아덴의 살기는 대단했다. 이에 케일란이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마왕의 개라니, 말 가려서 해. 그리고 걘 마왕이 아니라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장녀야. 게다가 귀한 음식에 뭘 넣을 필요가 있겠냐? 그냥 죽이면 되는데.”

그럴 바엔 자신이 두 그릇 먹고 말지, 굳이 음식에 뭘 넣어서 망칠 필요는 없었다.

“웃기고 있군. 머리카락과 눈썹도 없는 놈의 말을 내가 신뢰할 것 같나?”

아덴이 인신공격하며 비아냥거렸다.

다른 것도 딱히 참지 않지만, 그것만큼은 절대 참지 못하는 케일란이 발끈했다.

“우씨! 그게 무슨 상관인데? 네 꼴도 정상은 아니거든? 그리고 나, 이래 봬도 모어 백작가의 삼남이야! 너 따위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귀한 몸이라고!”

“네가? 모어 가문의 삼남이라면, 설마 케일란 모어?”

“그래!”

서로 안면이 있었던 탓에 아덴은 뒤늦게 그가 케일란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케일란의 전신을 훑으며 물었다.

“그런데 꼴이 왜 그 모양이지?”

“네 꼴도 만만치 않거든?”

그럴 리가. 아덴의 눈빛이 그리 말했다. 갇혀만 있는 탓에 스스로를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번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튼 먹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안 먹고 굶어 죽으면 너만 손해지, 뭐.”

때문에 대충 대화를 끝내고 문을 닫으려던 그는 문득 예전의 자신이 떠올라 한 가지 충고를 덧붙였다.

“야, 스푼 같은 거 자세히 들여다보지 마.”

“……? 무슨 뜻이지?”

“난 말했다.”

경고는 했으니 따르든 말든 마음대로 해.

쾅! 철컥.

거세게 문을 닫은 케일란이 잠금장치까지 잠그곤 서둘러 식당으로 사라졌다.

분명 주의를 주었건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아덴이 스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이 떠나갈 정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레이나에게 에일린을 소개시켜 준 로스틴은 먼저 공작 성으로 돌아갔다.

왜 점심도 먹지 않고 가느냐며 서운해하던 레이나가 눈에 밟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일이 꽤 밀려 있었다.

‘영지민에게 줄 보상금 확인이 오늘까지였던가.’

여름을 없앤 대가로 북부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매년 지급하게 된 보상금이었다.

심지어 북부에서는 소득세도 걷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어찌 유지할 수 있겠냐고 의문을 갖는 자들은 없었다.

대대손손 혁혁한 공을 세운 윈터스노우 가문은 보석 광산과 곡창 지대,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부동산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북부를 지켜 준다는 명목으로 제국에서 매년 막대한 지원금까지 받기도 했다.

때문에 넘치면 넘쳤지,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계속 돈이 늘어나기만 하는 상태였다.

그러한 연유로 북부에서는 주민들에게 여유롭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었고, 오늘까지 확인을 마쳐야 했다.

물론 그건 오늘의 일이었고,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있었다.

일을 나눠 가질 공작 부인이나 가족도 없었기에 영지에 관련된 일은 모두 로스틴 혼자 처리해야 했다.

게다가 레이나와 미궁에 다녀오기로 한 돌발 약속도 있었다.

그 전에 급한 일은 처리해 두어야 했기에, 로스틴이 서둘러 집무실로 향하고 있던 때였다.

“어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인이 집무실에서 나오며 허공에 대고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일이지?”

로스틴이 물었다.

“고, 공작님! 그게 실은 누가 집무실 벽에 낙서를 해 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닦아도 잘 안 지워져서 새 도구를 가지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낙서?”

대체 어떤 정신 이상자가 감히 자신의 집무실에 낙서를?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심기가 불편해진 로스틴이 서둘러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하인의 말대로 벽에 적힌 커다란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나 괜찮아.

마치 아이가 쓴 것처럼 삐뚤빼뚤 못생긴 글자였다.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건만, 로스틴은 누가 낙서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분명 하얗고 조그맣고 귀여운 무언가겠지.

그렇지 않아도 기절했다고 하여 걱정이 되었는데, 괜찮다니 다행이었다.

로스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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