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51화
*
로스틴의 활약으로 마물은 곧 정리되었다.
분위기만 살피려고 온 것인데, 피해 하나 입지 않고 마물들은 다 물리쳐 버렸기에 두 사람은 조금 더 전진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 뒤로 한 시간가량 더 미궁을 돌아보았지만, 비슷한 상황의 반복일 뿐이었다.
마물이 등장하고, 로스틴이 해치우고, 레이나는 뒤에서 감상하기.
피해는 없었으나, 꽤 돌아다녀 지친 두 사람은 잠시 쉬며 도시락을 먹었다.
그사이 레이나가 내내 의문이었던 것을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세? 훈련을 많이 한 거야? 이렇게 센데 왜 미궁을 그냥 내버려 뒀어? 네가 다 파괴하면 되잖아. 북부가 안전하도록.”
굳이 막아 놓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로스틴 혼자서도 충분히 미궁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질문이 우수수 쏟아지자, 그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하나하나 대답했다.
“훈련을 많이 하긴 했는데, 가문의 힘을 물려받아서 남들보다 빠르게 강해졌다. 미궁은 신전에서 건들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봉인해 둔 거였고.”
아주 오래전에 내려온 신탁이었다. 인간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마물이 들끓으니, 성녀가 나타날 때까지 봉인하라는 신탁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윈터스노우 공작이 미궁 입구에 튼튼한 문을 설치했고, 그 열쇠를 대대로 물려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레이나가 포크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져 있었다.
아니, 그런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고?
“그런데 왜 나랑 온 거야?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거 아니야? 대대로 지킨 거라며.”
아주 가볍게 깨진 약속에 로스틴이 곤란해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글쎄. 일단 무리는 아니라고 해 두지.”
무리수를 던진 것은 신전이 먼저였다. 기별도 없이 공작 성에 찾아와서 루벨라이트 공작의 집사를 죽였으니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대신관이 할 짓이 아니었다. 루카에게 치유의 빛을 선사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이번 일은 피차일반이었다.
무리수를 던진 대신관과, 대대로 내려온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신.
게다가 로스틴은 도무지 신전과 대신관을 신뢰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대신관의 실수 하나 때문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실수가 문제였다.
완벽하다고 믿었기에 증명할 수 없는 말까지 모두 신뢰하고 따른 것인데.
그게 아니라니, 지금까지 그들이 행했던 모든 것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근데 말이야, 이곳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은 것 같지 않아? 네가 강한 것 맞는데, 굳이 봉인까지 할 필요는 없어 보여.”
레이나가 다 먹은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로스틴이 강한 것은 맞았지만, 이렇게나 압도적으로 마물을 해치울 수 있을 정도면 봉인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로스틴 역시 그리 생각했는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 또한 이렇게나 쉽게 전진할 줄은 몰랐다.”
라는 대화가 오간 순간이었다. 사방에서 마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나씩 차례대로 나타났던 아까와는 달리, 족히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아, 이거 그거네. 쉽다고 말하면 안 됐었네.”
현대 사회에는 한가하다고 말하는 순간 일거리가 몰려드는 징크스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 같았다.
‘근데 이상하네. 이런 상황은 게임에서 보지 못했는데.’
게임상에서 이렇게 수많은 마물에 둘러싸인 적은 없었다.
레이나가 의구심에 잠긴 사이, 로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시락을 다 먹어서 다행이군.”
이내 그는 마물들이 레이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직접 마물들의 속으로 들어가 검을 휘둘렀다.
아까처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몇 마리씩 픽픽 쓰러지기는 했는데, 불행히도 그의 배가 되는 마물들이 다시 나타났다.
‘아무리 로스틴이라고 하더라도 물량 공세를 이겨 낼 순 없겠지.’
다구리엔 장사 없었다. 더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숫자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기 전에 레이나가 서둘러 마법을 사용했다.
“로스틴을 제외한 마물들을 모두 태워 버려.”
말이 끝나자마자 미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마물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잠시 뒤, 걷힌 어둠 속에서 로스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마물들과의 전투로 몸 이곳저곳이 지저분해져 있었다.
손목으로 입매를 닦아 낸 그가 마물들의 흔적으로 새카맣게 물든 주변을 훑었다. 족히 수백은 될 것 같았다.
그쯤 되니 로스틴은 할 말을 잃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조금 아까 그녀에게 받았던 칭찬이 무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만약 레이나가 정말 마왕이었다면.
‘그랬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레이나가 자신과 같은 편이라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마물들의 흔적을 지르밟으며 서둘러 다가온 그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건 아니지? 너 빼고 다 태우라고는 했는데, 괜찮은 거 맞지? 안 탔지?”
대머리가 되진 않았기에 안 탄 것이 확실했으나, 주변이 마물의 사체투성이라서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스틴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끌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공녀의 마법은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레이나 역시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량의 마물을 한 번에 없앴는데, 크게 지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이제 끝인가.”
로스틴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나 많은 마물이 한꺼번에 나왔으니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했다.
“글쎄, 아마 아닐걸. 이런 데에는 원래 보스 같은 놈이 있기 마련이잖아.”
정말로 미궁에는 최종 보스가 존재했다. 몇 날 며칠 동안 끊임없이 마물들을 상대하다 보면 마지막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놈이었다.
왜 게임과는 달리 마물들이 한 번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첫날이니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괜히 더 돌아다니지 말고.”
“현명한 판단이다. 점점 더 마물이 많아지는 걸 보니 이 이상은 무리가 있을 것 같군.”
레이나가 없었다면 아직도 마물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터였다.
끝없이 몰려드는 마물을 상대하다가 기력을 모두 소진하여 목숨을 잃었을 수도.
의견이 일치했기에,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고자 레이나가 소형 이동석을 꺼냈다.
그리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로스틴의 손을 잡으려 제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웅!
갑자기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진동이 미궁을 뒤흔들었다.
긴장을 풀고 있던 레이나가 크게 휘청였고, 그 바람에 떨어뜨린 소형 이동석이 어디론가 굴러갔다.
서둘러 레이나를 감싼 로스틴이 벽을 짚고 알 수 없는 진동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했다.
“뭐야? 뭔데?!”
당황한 레이나가 로스틴의 옷을 꽉 붙드는데, 눈앞에 거대한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싸웠던 마물들과 마찬가지로 새카만 몸에 빨간 눈을 가진 놈이었다.
공간을 꽉 채울 정도로 집채만 한 늑대가 포효했다.
당장 귀가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커다란 울림에, 서둘러 귀를 막은 레이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대었다.
“뭐야, 이거. 설마 최종 보스……?”
얘가 왜 지금 나와? 3박 4일은 마물을 때려잡아야 나오는 놈 아니었어?
‘아니, 첫날부터 보스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고. 쟤 엄청 강하단 말이야.’
여주는 뒤에서 계속 힐만 하고, 북부 공작을 비롯한 남주 후보들이 죽어라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보스의 등장으로 혼란에 빠진 레이나가 얼어붙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머리까지 지이잉 울렸다.
“윽!”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음산한 목소리도 다시금 들렸다.
- 킬킬킬킬…….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레이나가 머리를 감쌌다.
그사이, 재빨리 검을 빼 든 로스틴이 보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딱히 통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 레이나의 힘이 필요하건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공녀, 괜찮아? 무슨 일이야?”
하지만 레이나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에 잠시 고민하던 로스틴이 레이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공녀, 일단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최대한 빨리 달려서 미궁을 빠져나가도록 해!”
그제야 뒤늦게 레이나가 정신을 차렸다.
이 거지 같은 목소리가 왜 또 나타난 건지 모르겠으나, 속으로 악을 쓰자 머지않아 잠잠해졌다.
“아니, 괜찮아.”
레이나가 고개를 흔들어 남은 고통을 떨쳐 내며 대답했다.
진짜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건데, 로스틴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시간이 없으니까 어서!”
아니, 괜찮다고. 두통 때문에 오해한 모양인데, 어딜 어떻게 보아도 더 강한 것은 레이나였다.
누가 누구에게 도망가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그쪽을 두고 가? 둘 중 도망간다면 그쪽이 도망가야지.”
그러는 사이, 포효를 멈춘 마물이 안광을 빛냈다.
「감히, 겁도 없이 내 아이들을 건드렸구나.」
분노를 터트린 마물의 검붉은 목구멍 속에서 새카만 마법의 구체가 순식간에 크기를 불렸다.
“젠장!”
더는 마물의 공격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레이나만이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
로스틴은 곧장 레이나를 감싸 안았다.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그녀를 지키겠다는 듯.
동시에, 그의 옆구리 사이로 레이나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놈, 아주 바싹 태워 버려. 흔적도 남지 않게 모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