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60화
이쯤 되면 거의 건강 집착인이었다.
전생에 자신도 몸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건강하고 튼튼하기만 하면 된다며 레이나가 웃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한나는 다니엘을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 큰일을 한 것도 아니건만. 괜히 민망해진 레이나가 그럼 이만 가 보겠다며 그녀의 집을 나섰다.
그렇게 베로니카와 함께 바로 마차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고, 공녀님!”
중년의 여성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레이나의 코앞에서 무릎을 꿇은 그녀가 제발 자신도 도와 달라며 빌기 시작했다.
“저, 저희 아이도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데 혹시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 영혼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갑자기 영혼?
영혼 따위 필요 없고, 어떻게 가져가는지도 몰랐기에 레이나가 눈을 끔뻑였다.
“영혼 같은 거 안 줘도 돼. 도와줄게. 집이 어디야?”
“……! 이, 이쪽입니다!”
여성은 냉큼 레이나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아이는 다니엘보다 조금 더 어렸는데, 상태는 비슷했다.
너무 추운 곳에서 태어나 면역력을 전혀 기르지 못해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나는 그녀의 집에도 한나의 집과 마찬가지로 불꽃을 마구 설치해 주었다.
“베로니카, 번거롭겠지만 여기도 채소랑 약초 좀 나눠 줘.”
“예, 공녀님.”
심지어 그녀는 채소와 약초까지 나누어 주었다. 어차피 많아서 줘 봤자 티도 안 나니까 괜찮았다.
‘뭐, 티가 나면 새로 사 오면 되는 일이고.’
드디어 일을 마치고 이번에야말로 저택에 돌아가려는데, 또 다른 주민이 레이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 공녀님! 제발 저도 도와주십시오!”
이번에는 뜻밖에도 할머니였다. 사정을 들어 보니 자식들이 성에서 일하고 있어 함께 마을에 남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몸이 약해져서 짐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홀로 북부를 떠나면 그만이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차라리 몇 년을 덜 살더라도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자 버티고 있던 차였는데.
마침 레이나의 마법을 알게 되었다며 그녀가 손발을 싹싹 빌면서 자신의 집에도 불꽃을 놓아 달라고 애원했다.
“아니, 그렇게 울지 않아도 해 줄 테니까. 알겠어…….”
요, 할머니. 레이나가 속으로만 존댓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신분이 높아졌다고 한들, K-유교걸의 마음가짐을 다 버릴 순 없었다.
‘아주머니, 아저씨까지는 이제 좀 막대할 수 있겠는데, 할머니는 아직 아니라는 말이지.’
막말을 하는 순간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속으로라도 ‘요’를 붙여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쨌든 그리하여 할머니의 집까지 개조하고 나오자, 이번에는 할아버지였다.
그다음에는 또 아이의 어머니, 남편을 따라서 북부로 온 새댁 등등.
“좋아, 알겠어. 빌지 않아도 불꽃 정도는 다 놔줄 테니까, 순서 정해서 차례가 되면 광장으로 나와.”
결국 번호표가 발부되었다. 서로 상의하여 순서를 정한 사람들이 시간이 되면 레이나를 찾았다.
다들 하나같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아직도 레이나가 너무 무서워서 덜덜 떠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보다는 따뜻함이 더 절실했는지, 사색이 된 얼굴로 레이나를 자신의 집까지 안내했다.
“더 없어? 끝이야? 나 이제 간다?”
결국 점심시간은 물론, 점심 디저트 시간까지 훌쩍 지난 뒤에야 레이나는 마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녀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꼭 보답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두려움까지 다 벗진 못했지만, 그래도 고마워하는 마음은 진짜로 보였다.
“음, 그래. 기대할게. 무슨 일 있으면 베로니카에게 말해. 그럼 다들 안녕. 따뜻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 신선한 채소도 많이 먹고.”
마차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자, 마을 사람들이 연신 허리를 숙였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
마부석에 탄 베로니카가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많이 귀찮으셨죠?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부탁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점심도, 디저트도 못 드시고…….”
“그런 것치고는 꽤 뿌듯해 보이던데.”
“티 많이 났습니까?”
“응, 엄청.”
베로니카가 머쓱해했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었다.
내가 이렇게 좋은 분의 밑에서 일한다. 너희가 그렇게나 싫어하고 믿지 않았던 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냐.
그동안 얼마나 자랑하고, 보여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때문에 베로니카는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레이나의 타박을 듣는 와중에도 괜히 실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뭐, 식사는 가서 마음껏 하면 되니까.’
이윽고 베로니카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레이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설치해 놓은 불꽃들이 아주 잘 타오르고 있었다. 이를 구경하는 그녀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
그날 저녁, 퇴근하고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이 각자의 집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 신이시여! 대체 이게 무슨……!”
한나의 남편이자 다니엘의 부친인 레이몬드는 집이 검은색 불꽃으로 불타오르는 걸 보고 눈물 바람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이라고 해서 밖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검은색 불꽃은 집 내부까지 모두 활활 태우고 있었다.
“여보! 다니엘! 흐으윽! 제기랄! 여보! 다니엘?!”
다니엘이 울부짖었다. 마음이 산산조각이 났다. 역시 그 공녀를 그냥 두어선 안 되었다.
힘이 풀린 다리를 겨우 수습하며 다니엘의 방으로 향하려는데, 다행히 멀쩡한 모습의 한나가 그를 반겼다.
“응? 여보, 퇴근하셨어요? 어서 와요.”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늘 다니엘의 방에서 아이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던 아내이거늘, 오늘은 어째서인지 주방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를 레이몬드가 서둘러 끌어안았다.
“여보!”
“어머나, 레이몬드?! 무슨 일이에요? 왜 울어요!”
한나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레이몬드는 울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가족이라도 잃은 듯 오열하고 있었다.
“당신이, 당신과 다니엘이 죽은 줄만 알고……!”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펑펑 쏟아 냈다.
남편이 돌아오면 사정을 설명하고 함께 기뻐하려고 했건만.
설마 이리 울 줄은 몰랐기에 괜찮다며 그의 등에 손을 두른 그녀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래서 공녀님께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고 가셨어요. 한참이나요.”
“그래도 경솔했습니다! 아직까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따뜻하기는 하나, 검은색 마법이니까요.”
“아니에요. 공녀님께선 좋은 분이세요. 채소와 약초도 나누어 주시기로 약속하셨는걸요.”
“채소와 약초라니, 그걸 어떻게 받을 생각을 했습니까! 뭐가 들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좋아할 줄 알았는데,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에 한나는 괜히 슬퍼졌다.
정말 공녀님께서는 좋은 분이시고, 여러모로 마음을 써 주고 가셨는데, 왜 몰라주는 걸까?
베로니카의 지난 기분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레이나의 마음도 말이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제가 다 눈물이 나려는데, 다니엘이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아빠 왔어요?”
“다니엘……?!”
늘 열이 펄펄 끓어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던 아이가 멀쩡히 걸어 나오자, 레이몬드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여전히 기력은 많이 없어 보였지만, 혼자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었다.
잘 다녀왔냐는 인사를 하며 레이몬드에게 폭 안긴 다니엘이 그의 뺨에 뽀뽀를 했다.
지금이 딱 타이밍인 것 같았다. 남편의 등에 기댄 한나가 입을 열었다.
“보세요. 공녀님의 마법 덕분에 벌써 이렇게 다니엘이 건강해졌는걸요? 아까 마당에서 햇볕도 쬐었어요. 내일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모레에는 달릴 수도 있지 않을까 괜히 기대가 돼요.”
그런 말을 들으며 말갛게 웃는 다니엘을 보니 레이몬드 역시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불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한나의 말대로 공녀가 좋은 마음으로 자비를 베푼 것이라면 이보다 더 배은망덕한 짓은 없었다.
비난은 정말 나쁜 일이 생겼을 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한나의 말대로 기대하고, 감사해할 때였다.
“……갑작스레 화를 내서 미안했습니다. 공녀님께 직접 부탁하다니,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역시 한나, 당신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고마워요. 이해해 준 당신도 대단한 사람이에요. 무엇보다 공녀님께서 제일 대단하시지만요.”
그제야 마음이 통한 남편에 한나가 방긋 웃었다.
앞뒤로 가족을 품에 안은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레이나에게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