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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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으로 돌아간 성녀는 곧장 대신관을 만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외출 중이었다.
때문에 일단 목욕을 하고 푹 쉰 그녀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대신관과 마주할 수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먼저 성녀에게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대신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제대로 치장도 하지 못하고 부리나케 식당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식당에는 대신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두고 마왕을 찾아 떠났던 아덴도 함께였다.
귀족이라면서 식사 매너도 모르는지, 여전히 후드를 뒤집어쓴 채였다.
마물들 속에 자신만 내버려 두고 떠났을 때는 언제고.
필요할 땐 없고, 필요 없을 땐 있는 아덴을 저도 모르게 슬쩍 째려본 성녀가 서둘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고생했습니다. 많이 강해졌네요.”
“네, 마물이 너무 많아서 조금 힘들었어요. 몇 날 며칠을 싸웠는데, 이상하게 계속 나타나더라고요.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그랬군요. 신기한 일도 다 있네요.”
성녀가 투정을 부리자 대신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오늘은 대화가 잘 통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아서 너무 무섭고 힘들었어요. 마법이 너무 약해서 돌로 후려치는 게 더 셀 정도였고요.”
“저런…….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싸웠어요! 몇 날 며칠 잠도 거의 자지 않고요. 부끄럽지만, 마법보다는 돌로 더 많이 때린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어떻게든 해야 하니까요. 저는…… 세상을 구원해야 할 성녀잖아요?”
“그럼요. 성녀님께서 단기간에 많이 강해진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치지 않고 이렇게 돌아오셔서요.”
대신관이 방긋 웃었다.
그때까지 대화에 참전하지 못하고 있던 아덴이 대신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마물들이 성녀를 공격하지 못하던데. 대체 어째서죠? 설마 성녀의 힘인 겁니까?”
그건 성녀 역시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만약 그런 기적이 없었더라면 분명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
고심하던 대신관이 ‘글쎄요.’라며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녀님은 위대한 분이니까요. 하찮은 마물 따위는 성녀님을 공격하지 못했을 수도요.”
하찮은 마물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레이나를 만난 뒤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 아덴이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야 마물들을 방치하고 왔다는 것이 떠오른 성녀가 퍽 조급해하며 대신관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마물을 그대로 두고 왔어요! 죽여도 죽여도 계속 생겨나서, 일단 돌아와서 대신관님께 바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어쩌죠?! 사람들을 공격하진 않았을까요?!”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이긴 했으나, 벌써 하루가 지났으니 먹잇감을 찾아 마을까지 내려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덴 역시 걱정이 되는 부분이었기에 그가 대신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건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오는 게 늦어져서 제가 가서 정리하고 왔으니까요.”
“아아! 그래서 외출하신 거였구나.”
“그렇답니다.”
안심하는 성녀에게 대신관이 사르르 웃어 주었다.
식당에서 웃지 않는 자는 아덴 혼자였다.
대체 뭘 어떻게 정리했다는 걸까.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마물이었기에, 마물을 소환하는 ‘마왕’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텐데.
하나 그가 아는 한, 레이나는 그런 짓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애초에 불꽃 외에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소환 능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고.
아덴이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성녀와 대신관은 퍽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덴이 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싸운 성녀가 대견했던 대신관은 그녀의 사사로운 이야기까지 모두 웃으며 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성녀는 상태 창을 떠올렸다.
[명성 0]
처음 레벨을 올렸을 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었다. 왜 자신의 공로를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인가.
“저어, 대신관님. 제 명성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오를까요? 아직 아무도 저를 모르는 것 같아서요. 이렇게나 열심히 싸웠는데…….”
말을 잇던 그녀는 스킬 창도 한번 확인했다.
“다들 제게 도움을 요청했으면 좋겠어요. 마물들과 싸우다가 새롭게 익힌 마법도 있거든요. 빨리 사용해 보고 싶어요.”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꽤 마음에 드는 스킬이었던 모양이다.
대신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아, 그렇군요.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성녀님의 이름을 드높일 일이 생길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안다는 것인지. 그때까지 대화에 끼지 않고 듣고만 있던 아덴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탁이라도 내려온 겁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무래도 마왕이 존재하는 한, 그런 일은 계속 생길 테니까요. 눈에 훤하죠. 분명 성녀님을 증오하며 몹쓸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겁니다.”
신탁이 내려온 건 아니지만, 마왕이 있으니 당연히 나쁜 일이 일어날 거고, 성녀가 활약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정작 마왕은 오늘의 식단이나 궁금해하고 있는데, 왜 대신관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와 대신관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을 때였다.
“대신관님,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윈터스노우 공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대신관의 앞으로 공문이 한 통 도착했다.
대신관은 로스틴의 공문을 굳이 지금 읽고 싶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르던 그의 배신이 아직도 불쾌했기 때문이다.
“음, 조금 이따가 보겠습니다. 성녀님과 중요한 대화 중이니까요.”
딱히 중요한 대화는 아니었으나, 대신관이 애써 바쁜 척하며 거절을 표했다.
그러자 난감한 얼굴을 한 신관이 공문의 인장을 가리키며 감히 한 번 더 말을 꺼냈다.
“저, 대신관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지금 당장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공문에 1급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1급 인장은 공작의 신변, 혹은 영지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만 찍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자는 사람을 깨워서라도 바로 읽게 만들어야하는 중요한 공문이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이리 주시죠.”
신관은 대신관에게 냉큼 공문을 건넸다. 1급 공문이라니, 하급 신관인 그로서는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심장이 뛰었다.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녀님.”
“아! 저는 괜찮아요! 중요한 일이잖아요!”
시간을 빼앗겼음에도 성녀의 표정은 밝기 그지없었다. 대신관이 방금 자신을 위해 신관을 물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읽고 내용을 공유해 줬으면 좋겠다. 바로 옆에 있으니 뭐라도 이야기해 주지 않을까.
‘응? 잠깐만, 마치 비밀이라도 공유하는 사이 같잖아……?’
그녀는 괜히 더 기분이 좋아졌다.
물을 마시면서 공문을 읽던 대신관이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깨뜨리기 전까지는.
쨍그랑-!
손아귀의 힘으로 산산조각이 난 유리 파편이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 대신관님?! 괜찮으세요?!”
성녀가 서둘러 그의 상태를 살폈다. 손바닥에 박힌 유리 조각 때문에 그의 손이 엉망진창이었다.
“어떡해……!”
걱정하는 그녀의 눈이 저도 모르게 공문으로 향했다.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유리잔을 깨뜨린 것인지 궁금했다.
「북부 미궁 해결의 건
북부를 위협하던 미궁의 마물들을 소탕하였음을 알림.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장녀인 레이나 공작 영애가 해치웠으며, 북부 공작인 로스틴 윈터스노우가 동행하여 사실을 확인하였음.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추가로 병력을 보내 확인 중에 있으나, 특이 사항은 없음.
이상.
로스틴 윈터스노우 공작.」
“미궁……? 미궁이 뭐예요……? 이걸 정리한 게 큰일이라도 되는 건가요……?”
성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용만 보아선 좋은 일인 것 같은데, 왜 대신관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의 물음에도 대신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리 조각이 선명하게 박힌 손을 세게 주먹 쥘 뿐이었다.
“……미궁을 정리했다던 말이 사실이었다니.”
대답은 의외로 아덴에게서 나왔다. 심연의 저택을 떠나기 전, 레이나의 부하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나눴던 대화에서 들은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혼자서만 모르는 내용에 성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아덴을 바라보았다.
“미궁이 뭔데요?”
“천 년 전부터 북부에 있던 곳이다. 마물이 들끓어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한 채 봉인해 두었던 참이지.”
그의 설명을 들은 성녀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걸 정리했다면 잘된 거 아니에요?”
“그렇다.”
굳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면, 그걸 해결한 것이 마왕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어지럽혀야 마땅할 그녀가 나서서 마물들을 해치웠다면 당연히 축하해야 할 일이었다. 평화가 눈앞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신관은 그녀가 마물을 해치워서 화가 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