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62화
과장을 보태자면, 마치 레이나가 마왕처럼 잔혹하게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성녀와의 대화에서도 그랬다. 마왕이 존재하니 성녀는 곧 이름을 떨칠 기회가 온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마왕이 평화를 선택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의 생각 속의 마왕은 반드시 악행을 저질러야만 했고, 성녀가 이를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왜지? 그래 봤자 쓸데없는 희생만 생길 텐데…….’
그 누구보다 세상의 평화를 바라는 대신관답지 않았다. 이상했다.
아덴은 스스로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이상하다고 느꼈다.
대신관이 입을 닫아 버려 식당이 침묵에 휩싸인 사이, 성녀가 그의 손에 마법을 사용했다.
유리 조각으로 끔찍하게 벌어져 있던 상처가 어느 정도 깨끗하게 아물어 갔다.
“며칠 전에 배운 마법이에요. 아까 말씀드렸죠? 새 마법을 배웠다고요. 치유 마법인데, 아직 숙련도가 부족해서 완벽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조금 더 노력해 볼게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성녀가 칭찬해 달라는 듯 해맑게 웃었다.
그제야 초점이 나가 있던 대신관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아니, 어딘가 광기에 휩싸인 것 같았지만,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제 손바닥을 확인한 대신관이 갑자기 성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대, 대신관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다 성녀님 덕분입니다.”
“저, 정말이요? 제 덕분에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성녀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대신관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네, 곧 바빠질 테니 푹 쉬고 계십시오. 식사는 여기서 마쳐야겠습니다. 급히 해야 할 일이 떠올랐거든요.”
“네! 그렇게 할게요!”
성녀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다시 화기애애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이를 보던 아덴의 마음이 급격하게 답답해졌다. 상황이 이상한데, 뭐가 어떻게 이상한지 잘 파악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꾸 케일란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뭘 아는데? 나라고 처음부터 이러려고 여길 왔는 줄 아냐? 나라고 마왕을 해치웠다는 타이틀을 달고 싶지 않았겠냐고.”
처음에는 마왕에게 세뇌라도 당해서 저딴 말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제는 자신 역시 조금씩 동요되기 시작했다.
‘일단은 여기에 남아 있어야겠어.’
한동안 성녀와 대신관의 행보를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식당을 빠져나간 아덴이 지나가는 신관 하나를 붙잡았다.
“내가 묵을 방을 마련해 줬으면 한다. 가능한 한 성녀, 혹은 대신관님과 가까운 방으로.”
*
한 차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난 뒤, 레이나는 그 뒤에도 몇 번이나 더 마을에 다녀오게 되었다.
사람들이 계속 그녀를 찾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집에도 불을 놓아 달라고 말이다.
물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믿지 않다가, 다른 사람들이 따뜻하고 무탈하게 지내는 걸 보고 나서야 부탁하러 온 자들이었기에 몹시도 송구스러워했다.
부탁하기 위해 저택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사람도 있었다. 말을 하다가 말고 너무 죄송하다며 갑자기 우는 사람도 있었다.
‘음, 괜찮은데. 면전에서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신탁이 그러하고 크나큰 피해를 입은 적도 있으니 배척했던 것 아닌가.
자신조차도 처음 레이나가 되었을 때, 이 세상도 모자라 저세상 저주와 욕까지 다 쏟아 냈었다.
왜 하필 얘냐고. 얘는 나쁜 애가 아니냐고 말이다.
때문에 사람들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되는 바였다. 오히려 울며 사과할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그렇다고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대한 돕고 싶었다.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필요성도 못 느꼈고 말이야.’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자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음에 훈풍이 부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아이스베리 마을 모든 집에 불을 놓아 준 레이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광장이나 길가에도 만들어 줄까? 밖에서도 따 뜻하게 다니면 좋잖아. 애들도 좀 넓은 데서 뛰어놀고.”
“예! 그리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마을 전체에 검은 불꽃을 까는 레이나에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감탄했다. 누군가는 박수까지 쳤다.
왜 처음부터 베로니카처럼 믿고 따르지 않았을까. 뒤늦게 송구스러워하며 반성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더는 두려움이나 공포 따윈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제 레이나가 신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제라도 레이나의 대단함을 알았으니, 앞으로는 알아서 잘하겠지.
‘안 그러면 내 손에 죽는 거야. 안 봐줄 거라고!’
흥, 콧방귀를 낀 베로니카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공녀님! 마법 보여 주세요!”
“저도 보고 싶어요!”
몇 번 봤다고 익숙해진 모양인지, 아이들이 겁도 없이 레이나에게 마법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그에 레이나는 픽 웃으며 답했다.
“흐음, 그래? 재미있는 놀이 할까?”
“네!”
이내 그녀가 불꽃을 이용하여 아이들을 공중에 띄웠다.
“헉!”
“……?!”
“로온?!”
옆에서 훈훈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부모들이 식겁했다. 베로니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눈치도 없이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만 했다.
그로 인해 부모들은 뭐라 말도 못 하고 입만 벙끗거린 채 허공에서 날아다니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레이나가 아이들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주자 한차례 소동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뭐 더 없지? 끝이지? 나 돌아가서 케이크 먹어야 하는데, 가도 되지?”
그녀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며칠째 계속 외출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 그만 오고 싶었다. 좀 쉬고 싶었다.
광장에 길거리까지 다 불을 놓아 주었으니 이제 없겠지. 더는 부탁하고 싶어도 부탁할 거리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작별 인사를 하고 저택으로 돌아가려는데, 뜻밖에도 제일 처음 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한나가 레이나를 붙잡았다.
“저어, 정말 죄송하지만,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응? 또?
무시하기에는 한나가 몹시도 송구스러워하고 있었다.
사실 부탁을 하나 더 들어주는 것 정도야 별거 아니었다.
레이나가 말해 보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나가 곧장 입을 뗐다.
“실은 저도 농사를 짓고 싶은데, 다니엘을 두고 공녀님의 저택까지 갈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그동안 지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변명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는 한나였다.
가장 먼저 레이나를 믿고 집에 불을 놓아 달라고 부탁한 사람.
“그러니 혹시 집 근처 공터에 불을 놓아 주실 수는 없을까요……? 여기서 성심성의껏 키우겠습니다. 저를 고용해 주십시오.”
“응?”
요컨대, 아픈 아이 때문에 저택까지 출근할 수가 없으니 마을에도 온실을 만들어 고용해 달라는 말이었다.
“너 농사지어 본 적은 있어? 꽃이나 약초를 키워 본 적은?”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일을 계속 도왔습니다. 나름 큰 농장이라 지금도 많은 곳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베로니카처럼 경력자인 모양이니, 분명 도움이 되겠지.
“좋아, 그럼 자세한 계획을 보내 줘. 그럼 그걸 토대로 온실을 만들어 줄게. 혼자는 어려울 테니 사람들을 모아도 괜찮아.”
계획서는 베로니카를 통해서 보내라는 말을 마친 레이나가 정말로, 이번에야말로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와, 나 이러다가 세계 제일 부자 되는 거 아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능 불꽃 덕분에 농사짓는 데 비용이 적게 들어가니, 싸게 팔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좋아. 돈으로 세상을 정복하겠어!”
마부석 쪽에서 베로니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속마음을 밖으로 내뱉었던 모양이다.
조금 창피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을 응시했다. 오늘도 길목을 밝히는 불은 선연하기만 했다.
*
요즘 매일 마을에 다녀오고 있었기에,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케일란이 말을 걸었다.
“야, 너 마력은 괜찮은 거야?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이렇게 맨날 마법을 펑펑 쓰면 고갈되지 않아? 그것도 유지 마법이잖아. 생각은 하고 쓰는 거지?”
한 번 사용하면 소모되어 사라지는 일반 마법과 달리, 유지 마법은 시전자의 마나를 지속적으로 소모했다.
때문에 지금 레이나는 엄청난 마나를 매일 소모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이미 죽고 시신까지 바싹 말라 바스러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레이나는 레벨이 1,000이 됨과 동시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쓸데없는 물음이었다.
“날 그런 허접한 마법사로 보지 말아 줄래? 북부 전체에 마법을 깔아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 있거든?”
이건 좀 과장이었지만, 어쨌든 북부의 반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그래도 뭐든 아껴 두는 게 좋잖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지금 너, 엄청 생각 없어 보이는 거 알아?”
“괜찮아. 남의 걱정 하지 말고 네 머리카락이나 걱정 해. 조금 자라더니 이제 더는 안 자라고 있잖아.”
“아씨! 갑자기 머리카락 얘기가 왜 나와! 아씨! 아이씨!”
지적당해서 창피해진 모양인지 머리를 감싼 케일란이 온실 쪽으로 서둘러 달려가며 소리쳤다.
“너는! 진짜 못됐어! 사람 마음도 모르고-!”
그의 목소리가 저택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니, 저택 뒤에 자리한 산을 타고 아이스베리 마을까지 퍼진 느낌이었다.
“……시비는 누가 먼저 걸었는데.”
뭐야, 정말. 레이나는 케일란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