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64화 (64/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64화

*

“레이나!”

바쁜 일이 정돈되어 드디어 멍을 때리며 누워 있는데, 아이가 달려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

아니,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안기는 건지 모를 정도로 키가 커진 상태였다.

‘거의 180 정도 되는 거 아니야?’

자신보다 한 뼘이나 더 커져 버린 아이가 맑게 웃으며 꽃을 주었다.

“이거 레이나 가져. 예쁜 사람한테 예쁜 꽃 주는 거랬어.”

“오호, 그래? 또 귀한 향신료 꽃을 꺾어 왔구나? 어쩜 이렇게 매번 제일 비싼 걸 꺾어 올까?”

감탄한 레이나가 방긋 웃었다. 그러자 아이가 좋다며 따라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집사! 이거 미아 가져다줄래? 오늘 저녁 재료로 쓰라고 전해 줘.”

“예, 공녀님.”

집사가 익숙하게 향신료 꽃을 받아 갔다.

키만 멀대같이 커졌지, 눈치는 밥 말아 먹은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레이나에게 다시 안겨 들었다.

“레이나 꽃 좋아해? 나는 좋아. 꽃도, 레이나도 좋아.”

“좋아하기는 하는데, 줄 거면 정당하게 돈을 주고 사 줬으면 하는데. 힘들게 심어 놓은 향신료 좀 그만 꺾고.”

“응! 알겠어.”

못 알아들었을 게 뻔한 얼굴로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니. 이제 아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아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컸다.

게다가 함께 지낸 지도 꽤 되어 가고 있었다.

비싼 향신료를 자꾸 꺾는 것 외엔 말썽 부리지 않고 얌전히 지내는 걸 보니, 슬슬 이름을 붙여서 불러도 될 것 같았다.

“뭐가 좋을까.”

레이나는 꽤 작명에 자신이 있었다. 이전에도 마물 스스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이름을 붙였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삐이처럼 귀여운 얼굴은 아니고.”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아이도 레이나를 마주 쳐다보았다.

‘맨날 웃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날카로운 눈매네. 눈동자는 피처럼 빨갛고.’

한마디로 ‘힘숨찐’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풀어서 말하자면, 힘을 숨긴 찐따.

평소에는 찐따같이 허술하게 행동하지만, 강한 힘을 숨기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힘숨찐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 순 없으니까……. 흐음.’

레이나가 고심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이긴 거라고 착각한 아이가 배시시 눈을 접어 웃었다.

그와 동시에 레이나는 아이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을 떠올렸다.

“트리버!”

“……응?”

아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릴까. 레이나가 방긋 웃으며 설명했다.

“네 이름, 트리버라고.”

“트리버……? 내 이름?!”

되물은 트리버가 갑자기 헉! 숨을 삼키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뭐, 뭐야! 왜 그래?! 괜찮아?!”

놀란 레이나가 상태를 살피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트리버가 힘겹게 대답했다.

“너, 너무 기뻐서 여기가 아파.”

“……이 자식!”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

그래도 좋아서 그런 거라고 하니, 결국 픽 웃음이 나왔다.

잠시 심장을 부여잡고 한껏 기쁨을 느끼던 트리버가 레이나의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개.”

“개……?”

“응. 멍멍 짖는 개. 너 개같이 생겼어.”

변명하자면 절대 욕이 아니었다. 정말로 ‘개’처럼 생겨서 붙인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래브라도 리트리버’의 트리버였다. 검은색 리트리버 말이다.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트리버가 고개를 갸웃대었다.

우습게도 그 모습마저 리트리버 그 자체였다. 레이나가 픽 웃었다.

“귀여워.”

“귀여워?”

“응. 귀여워.”

래브라도 리트리버는 모르지만, 귀엽다는 말은 알았기에 트리버가 다시 활짝 웃었다.

“마음에 들어?”

“응! 트리버, 이름 귀여워! 좋아!”

“좋아, 앞으로 네 이름은 트리버야. 어서 가서 모두에게 소개해.”

“응!”

신이 난 트리버가 쪼르르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이름을 자랑했다.

레이나가 붙여 준 이름이라며 그는 날아갈 듯 기뻐했다.

“드디어 이름이 생겼구나!”

“응! 레이나가 지어 줬어!”

“축하해! 잘 어울리네!”

유래까진 설명하지 않았기에 다들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며 축하의 박수까지 쳐 줬다.

‘……음, 조금 더 생각할 걸 그랬나?’

강아지 품종을 붙인 건 좀 너무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트리버는 마물인데 개 이름 좀 붙인 게 뭐 어떻냐는 결론에 다다랐다.

‘마물이라고 안 부르는 게 어디야.’

멀리서 방방 뛰며 제 이름을 말하고 다니는 트리버를 보니, 아주 찰떡이라는 생각이 든 레이나가 편안한 마음으로 낮잠에 들었다.

*

오래간만에 마을로 순찰을 나간 로스틴은 퍽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마을이 왜 새카맣게 물들어 있는 것인지. 이건 뭐 거의 어둠의 도시였다.

마왕의 본거지도 이보다는 맑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놀란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마을이 이렇게 된 건, 사람들이 레이나를 더는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공녀가 자비를 베푼 모양이군. 내게 그랬듯이.’

로스틴의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런 그를 발견한 마을의 주민이 퍽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아!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다가 로스틴의 시선이 마을을 뒤덮은 검은 불꽃에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변명을 시작했다.

“고, 공작님! 이건 생명체에게는 해가 되지 않는 좋은 불꽃입니다! 봄처럼 따뜻한 불꽃이지요! 덕분에 몸이 좋지 않았던 아이들이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다들 광장에서 볕을 쬐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요!”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며 레이나의 불꽃이 얼마나 좋은지 열변을 토했다.

“맞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제 감기도 나아졌습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등장한 노인이 합세했다. 뒤이어 한나도 튀어나왔다.

“공작님! 이쪽에 공녀님께서 온실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번에 새로 도착할 작물을 심을 예정이에요!”

광장을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공녀님이 절 하늘로 날려 보내 주셨어요!”

“저도요! 막 하늘을 슝슝 날았어요!”

결국 로스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필사적으로 레이나의 좋은 점을 피력하는 사람들이 재미있었다.

“알아, 공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그가 거의 제일 먼저 알아챘기에 상황이 웃기기 그지없었다.

“어휴, 오해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네.”

“나도 나도.”

그러고 보니 로스틴이 레이나와 미궁에도 함께 다녀왔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상기한 사람들이 괜한 짓을 했다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나 덕분에 다들 잘 지내고 있었다. 그것도 전보다 훨씬 즐겁게 말이다.

더 돌아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이만 성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여성들의 대화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그런데 여기는 축제 같은 거 없어요? 이곳에 온 지도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한 번도 못 본 것 같네.”

“아무래도 추우니까요. 축제를 즐기다가 얼어 죽을 수도 있잖아요.”

농담처럼 보였으나, 거의 사실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여름에 간소한 축제를 열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여름이 사라져 추운 날씨만 계속되니 축제 같은 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5년 전, 공작가에 끔찍한 저주가 떨어져서 북부는 줄곧 초상 분위기였다.

성군을 잃은 북부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고 공작이 된 로스틴을 동정했다.

때문에 축제를 열자는 말 따위, 할 수가 없었다.

마왕이 죽기 전까지는 축제를 열지 않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 따뜻하잖아요. 공녀님께서 불꽃을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그렇기는 하죠.”

그리 대답한 여성이 괜히 로스틴의 눈치를 보았다.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나중에 사정을 잘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그렇군. 벌써 5년이나 축제를 열지 않았군.”

로스틴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화들짝 놀란 여성이 정말 죄송하다며 사과하려는데, 손으로 불꽃의 기운을 느껴 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루벨라이트 공녀 덕분에 마을이 따뜻해졌으니 축제를 열어도 무방하겠지.”

“……네?”

“와! 공작님, 정말이세요?”

“오오, 우리 마을에서 다시 축제가 열릴 줄이야!”

대부분 좋아하는 반응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5년 전 사건으로 자신처럼 가족을 잃은 자도 있을 테니, 추모식을 겸한 축제가 좋을 것 같았다.

‘슬픈 일이라고 해서 너무 언급하지 않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서 기억하고, 추억하여 이겨 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마을 사람들도, 자신도, 그리고 루카도.

“공작님! 그럼 제가 축제를 기획해 봐도 될까요?”

왜 축제를 열지 않느냐고 물었던 여성이었다.

하긴, 장기간 축제와는 담을 쌓은 마을 사람들보단 그녀가 주도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으리라.

“좋다. 기획서를 작성해서 내게 직접 가져오도록.”

“어……? 고, 공작님께 직접요……?!”

설마 공작이 직접 기획서를 검토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기에 여성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것이 좋겠지. 기다리고 있겠다.”

그 말을 끝으로 로스틴은 공작 성으로 돌아갔다.

“어, 어어?! 그냥 우리끼리 재미있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무려 5년 만에 열리는 축제인데.”

축제를 열게 된 것은 좋았지만, 여성의 처지가 퍽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말을 꺼낸 사람이 해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사람들이 그녀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며 각자의 위치로 복귀했다.

물론 입가에는 곧 열릴 축제를 기대하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