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68화
우리 방금 전까지 손잡고 춤까지 췄잖아. 잊으면 섭섭하지.
마치 5년 전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막겠다는 생각만 하던 로스틴이 그제야 레이나를 인식했다.
“공녀……!”
그녀 또한 평소와는 달리 아주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방긋 웃은 레이나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오늘도 살생 금지 철칙을 철회해야 할 것 같지? 어기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상황이 어기게 만드네.”
저렇게나 마물이 많으니 털만 벗겨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뒤처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마물들이 쏟아지는 방향을 향해 손을 뻗은 레이나가 조용히 읊조렸다.
“소환된 마물들을 전부 불태워서 없애 버려. 단 한 놈도 남기지 말고.”
화르르르륵―!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엄청난 양의 어둠이 쉬지 않고 뻗어 나갔다.
마물의 수가 너무 많아서인지, 레이나의 손에서 나오는 힘에 끝이 없었다.
마치 그녀의 몸에 있는 모든 마력을 다 뽑아낼 것처럼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대로라면 레이나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로스틴이 사색이 되었다.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마물에게 뻗어 가는 그녀의 마법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검은 불꽃에 그녀가 삼켜져 버릴 것처럼.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스스로가 희생하여 마물들을 상대하는 것이 나았다.
로스틴이 레이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
때마침 레이나의 손에서 뻗어 나가던 마법도 멈추었다.
“공녀, 괜찮아?!”
로스틴이 다급히 레이나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정신없이 마법을 쏟아붓고 있던 탓에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어? 아, 응. 괜찮아.”
“정말이야?”
믿기지 않는지 로스틴이 되물었다. 그가 레이나와 시선을 맞추며 이상이 없는지 계속 확인했다.
“정말이야. 완전히 쌩쌩해. 열 번은 더 마법 쏠 수 있을 것 같아.”
일전에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었는데, 진짜로 북부 전체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마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하아…….”
레이나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하자, 그제야 로스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간 마법으로 인해 전방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카만 불꽃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 속에서 마물들의 비명이 천둥처럼 연달아 이어졌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거대한 울림이었다.
“어, 엄마아……! 무서워!”
“으허어어엉!”
겁에 질린 아이들이 엉엉 울며 부모에게 안겼다. 어른들이라고 멀쩡하진 않았다.
모두가 제발 이 악몽 같은 상황을 빨리 끝내 달라며 신께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언제 소란이 일어났냐는 듯, 마물들의 비명이 멎고 불꽃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긴장을 풀지 않았다. 수천은 되었던 마물의 무리를 한 번에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레이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녀가 다시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남은 놈들 있으면 해치워.”
“…….”
“잔당 해치워. 빨리.”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손바닥을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댄 그녀가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로스틴을 돌아보며 말했다.
“음, 아무래도 전부 다 없어진 모양인데……? 반응을 안 해.”
“하아…….”
로스틴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다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레이나가 강한 것은 익히 알았지만, 그녀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런 로스틴을 레이나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왜 저러지?’라는 표정이었다.
‘사람 속도 모르고.’
퍽 얄미운 얼굴이었으나, 어째서인지 귀엽게만 보여 헛웃음이 나왔다.
상황이 상황인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최근 들어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며 고개를 저은 그가 검을 쥐고 굳어 있는 기사들에게 명했다.
“조를 짜서 남아 있는 마물이 없는지 찾아라. 발견 즉시 돌아와 상황을 알리도록 하고, 최대한 전투는 피하도록.”
레이나의 마법이 반응하지 않으니 아마도 없을 테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사들이 신속하게 흩어졌다.
그사이 로스틴은 아직도 얼어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공녀가 마물을 전부 물리친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오늘 하루는 공작 성에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에 엄마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던 아이가 훌쩍 코를 삼키며 로스틴에게 물었다.
“고, 공녀님이 나쁜 마물 다 해치우신 거예요……? 아까 그 검은색 마법으로요……?”
“그래.”
“어엄-청나게 많았는데요……?”
“공녀가 전부 내쫓았어. 검은색 마법으로.”
로스틴의 확답을 들은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이의 시선이 그에게서 레이나에게로 옮겨 갔다.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눈이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괜히 사람을 찔리게 만드는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던 아이가 이윽고 엄마의 품을 벗어나 레이나의 지척까지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성…… 녀님?”
“응……?!”
성녀?!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레이나가 화들짝 놀랐다.
한 아이가 그녀를 성녀라고 부르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레이나를 성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맞아! 성녀님이시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와아! 성녀님이 나타나셨어!”
“아니, 아니. 나 성녀 아니야!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성녀가 아니라 마왕이라고.
열심히 부인했지만, 이미 레이나를 성녀라고 부르기로 한 아이들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왜 하필이면 성녀냐고. 굳이 따지면 걜 죽이는 역할인데.’
말도 안 되는 호칭을 훔친 것 같은 기분에 레이나가 쩔쩔맸다.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아이고 어른이고 누구 하나 정정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저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때문에 레이나가 열심히 자신은 성녀가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뜻밖에도 진짜 성녀가 나타났다.
“자, 잠깐만요! 그 여자를 왜 성녀라고 부르는 거죠? 성녀는 저인데……!”
하얀 백발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얼굴. 게임 속에서 보던 여주가 맞았다.
‘어째서 여주가 여기 있는 거지?’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놀란 레이나가 눈을 끔뻑였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만나 뭘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했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통성명과 인사라도 할까 싶어서 영업용 미소를 지으려는데, 성녀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레이나를 가리켰다.
“제가 성녀예요……! 저 여자는 검은색 마법을 썼잖아요!”
검은색 마법은 마왕이 쓰는 거라고 했다. 그럼 마왕이 분명할 텐데, 왜 저런 사람에게 성녀라고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레이나가 마법을 쓴 직후에 나타난 탓에 성녀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가 본 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게 깔린 검은 불꽃뿐이었다.
“성녀가 아니라 마왕이라고요! 마물도 저 여자가 불러낸 것이 분명해요!”
스스로 불러냈으니 없애는 것도 쉬울 것이다. 사람들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고자 소리친 성녀였으나, 불행히도 돌아온 것은 감자 덩어리였다.
갑자기 발치로 날아온 감자에 성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끄러워! 공녀가 왜 마왕이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하지 마!”
감자를 던진 이는 뜻밖에도 작은 소년이었다. 살짝 고불거리는 밝은 은발과 동그란 파란 눈을 가진 귀여운 아이였다.
처진 눈매 때문인지 퍽 유순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성격은 정반대였는지 제법 눈을 매섭게 뜬 아이가 성녀의 말에 반박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봤어! 공녀가 마법으로 마물들을 해치운걸! 네가 진짜 성녀라면, 공녀가 마물들을 해치우기 전에 나타났어야지!”
“맞아! 공녀님이 다 해치우셨어! 마왕 아니야!”
다른 아이가 맞장구를 쳤다. 인파 속 어딘가에서 ‘그렇지!’라고 말하는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
드디어 불린 소년의 이름은 루카였다.
제 이름을 부른 로스틴을 짧게 응시한 루카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휙 고개를 돌리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딱 인간이 되는 날에 맞춰서 축제를 열었더니, 어느새 참석하여 구운 감자까지 먹으며 잘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심한 로스틴이 성녀를 돌아보았다. 그가 뒤늦게 나타나 레이나를 매도한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진짜 성녀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이미 공녀께서 상황을 정리한 참이니 이만 돌아가 주시기를. 안타깝게도 초대받은 사람만이 참석할 수 있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으니까.”
“그, 그렇지만……! 검은색 마법을 썼는데…….”
사람들에게 반박을 당한 탓인지 성녀의 목소리가 한층 작아졌다.
팔짱을 낀 로스틴이 다시 말해야겠냐는 듯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마물이 나타났다고 해서 다친 사람들까지 뒤로한 채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어째서 이런 취급을 당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억울함에 성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상황이 점차 이상하게 흘러가자, 레이나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다들 왜 그래? 얘 진짜 성녀님 맞아! 모처럼 성녀님이 왔는데 친하게 지내 두면 좋지 않겠어? 성녀님, 안녕? 난 레이나라고 해.”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레이나는 성녀와 나쁜 관계를 쌓고 싶지 않았다.
사서 죽음의 지름길을 걸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미 성녀는 레이나를 안 좋게 보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훔친 것도 모자라서 검은색 마법을 쓰는 걸 똑똑히 보았는데, 반갑다며 인사를 건네다니.
그래서 입술을 깨물며 노려보니 레이나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말고 좋게 좋게 지내자고……. 나 진짜 마왕 안 할 거야. 너만 여주 해. 괜히 우리끼리 힘 빼지 말고, 남주 후보들과 잘 지내서 해피엔딩을 맞이하라고.’
아무래도 그녀에게만은 사실을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성녀는 이세계에서 소환된 사람이니, 자신도 그렇다고 말하면 잘 통할 수도 있을 것이리라.
‘최소 본전이라도-아니, 오해라도 풀리겠지.’
그런 다짐을 한 레이나가 성녀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