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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69화 (69/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69화

함께 왔던 모양인지, 대신관이 성녀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적개심 가득한 눈으로 성녀를 보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뒤늦게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한발 늦은 모양이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공녀께서 마물을 정리해 주셨다니요. 감사드립니다, 공녀님.”

대신관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레이나가 얼떨결에 묵례했다.

로스틴은 아무런 말도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지난번처럼 수상한 짓을 했다간 네가 누구든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싸늘한 눈으로.

다행히 대신관은 눈치 빠르게 북부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성녀님,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아직 지켜야 할 다음 지역이 남아 있으니까요.”

“……아, 네, 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대신관도 저 여자가 마왕이 맞다는 확언을 해 주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여기서 그 의문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한패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어? 벌써 가는 거야? 조심해서 가! 네가 진짜 성녀라고 잘 설명해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나 마왕 아니야!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자! 알겠지?”

그렇게 억울함만 남긴 채 돌아서는 성녀에게 레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아쉽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못하니, 다음에 꼭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불행히도 돌아온 인사는 없었다. 미묘하게 굳은 미소를 지은 대신관만이 레이나를 잠시 훑을 뿐이었다.

한편 아덴은 머쓱해하는 레이나를 눈에 담았다. 전과는 달리 그의 눈에서 적개심이 많이 빠져 있었다.

사실 이곳에 남아 레이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성녀와 대신관을 떠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못한 그가 두 사람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

여주와의 첫 만남을 엉망으로 끝낸 레이나가 서둘러 사람들의 오해를 정정했다.

“나한테 성녀라고 부르면 안 된다니까? 방금 왔던 사람이 진짜 성녀야! 대신관도 같이 왔었잖아. 나는 그냥 공녀라고. 성녀라고 하면 안 돼!”

여주는 스스로가 성녀인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여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신에게 부탁했었으니까.’

불행히도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만.

어쨌든 모두가 좋아하는 여주가 되었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왕으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성녀라는 호칭까지 빼앗겼으니 억울할 만도 했다.

‘그럼, 그럼. 나라도 싫어. 그러니까 일단 사람들을 설득하고, 나중에 만나서 해명도 잘해야지.’

싸우지 않고 편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자, 마을 사람들이 크게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그럼 공녀님 만세!”

“와아아! 공녀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공녀님 만세!”

정확히 따지면 동부 지역의 공녀였으나, 알 바 아니라며 다들 ‘우리 공녀님 최고’를 외쳤다.

“어휴, 정말…….”

다들 푼수가 따로 없었다. 레이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호칭이 정정되어서 더는 뭐라고 말도 못 하겠다며 그녀가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미약하게 상기된 뺨과 올라간 입꼬리가 그녀의 기분을 여실히 표현해 주고 있었다.

옆에 있던 탓에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로스틴이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뒤로하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도 강해서 귀엽다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신기하게도 볼 때마다 자꾸 귀여웠다.

루카와는 조금 다른 귀여움이었다.

정확히는 표현하기 힘들지만, 루카는 제 동생인 데다가 작아서 귀여웠고, 레이나는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귀여웠다.

그런 마음이 그득한 눈으로 레이나를 내려다보고 있자,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건의했다.

“공작님! 남은 음식이 너무 아까운데, 축제는 다 마치고 공작 성으로 이동해도 될까요? 공녀님도 계셔서 안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공작이 눈앞에 있거늘.

레이나가 있으니 안심이라며 축제를 계속하자는 말에 로스틴이 픽 웃었다.

그는 힐끗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이대로 축제를 끝내고 싶지 않은지, 빨리 그러라고 대답하라는 눈으로 로스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좋다, 그렇게 하지. 오늘의 중요한 이벤트인 게임도 아직 시작하지 않았으니, 이대로 끝나는 건 나도 아쉬운 바야. 모처럼의 경품도 아깝고 말이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다. 조금 느린 감이 있었던 아까와는 다르게 밝고 경쾌한 리듬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몇몇 아이들은 손에 음식과 음료를 들고 레이나를 찾기도 했다.

“공녀님! 이거 우리 엄마가 만든 거예요!”

“공녀님! 이건 우리 엄마요!”

“우리 아빠도 만들었어요!”

갑자기 들이닥친 음식 공세에 레이나가 방긋 웃었다.

“어머나, 그래? 다 맛있겠다. 근데 이걸 다 먹으면 내가 어떻게 될까?”

“맛있어요!”

“배불러요!”

아이들이 해맑게 대답했다.

으응, 아니. 레이나가 대답을 정정했다.

“아니, 배 터져서 병원에 실려 가.”

까르르!

뭐가 재밌다고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 마물 수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졌었는데, 벌써 다 잊은 모양이었다.

“으휴, 정말.”

그래도 즐겁다니 되었다. 레이나가 피식 웃으며 아이들의 음식을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다.

*

“야! 너 뭐야?!”

케일란이 트리버의 손목을 붙들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자 트리버가 입매를 비틀며 되물었다.

“왜?”

그의 얼굴에 더 이상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키도 183cm인 케일란보다 더 커진 상태였다.

완벽하게 성인이 된 그가 케일란의 손을 뿌리치며 얼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말도 잘 못하는 어린아이였을 때가 얼마 전이건만, 비웃는 듯 내리깐 시선에 케일란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이 새끼……!”

사실 축제가 시작되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트리버는 케일란보다 조금 작았다.

얼굴과 표정 또한 아이의 티를 완벽히 벗지는 못했었다. 어제나 그제와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물 떼가 나타나 레이나가 마법을 사용했을 때부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음식을 먹고 있던 트리버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화들짝 놀란 케일란이 무슨 일이냐며 그의 몸을 흔들며 확인하는데, 문득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공녀의 마력이…… 흡수되고 있어……?”

어째서인지, 마물 떼로 향하던 레이나의 마력 중 일부가 트리버의 몸에 흡수되고 있었다.

“뭐야……?! 야! 괜찮아?! 야! 야?! 일어나 봐!”

설마 레이나가 마물을 공격하라고 하여 트리버도 공격을 당하는 건가 싶어서 당황한 케일란이 그의 뺨을 때리며 억지로라도 깨워 보려 했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도망쳐야 했다. 레이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트리버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키가 커지고,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케일란의 얼이 빠졌다.

“뭐, 뭐야……?”

그건 레이나의 공격이 멎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치 레이나의 마력을 흡수하여 그것을 양분으로 성장이라도 하듯 점점 트리버가 자라났다.

잠시 뒤, 마물을 전부 해치워 레이나의 마법이 멈추자 트리버의 성장 또한 멎었다.

물론 이미 더 커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장해 버린 뒤였지만.

“너 뭐냐고!”

회상을 마친 케일란이 재차 물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전투도 불사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에 트리버는 치렁치렁하게 자란 제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묶어 보며 대충 대답했다.

“트리버.”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케일란은 쳐다도 보고 있지 않았다.

“지금 장난해? 네 이름 같은 거 말고! 왜 마력으로 성장했냐는 말이야!”

화가 난 케일란이 트리버의 어깨를 밀치자, 그의 새빨간 시선이 케일란에게 닿았다.

같은 빨간 눈인데, 묘하게 음습하고 불쾌해지는 색이었다.

분명 자신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편인데, 어쩐지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케일란이 괜히 입술을 짓씹었다.

그런 그를 말없이 응시하던 트리버가 이내 밀쳐진 어깨를 툭툭 털며 답했다.

“네가 알 바 아니야.”

이 이상 케일란과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짧은 대답을 끝으로 트리버가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 거기 안 서?!”

그렇다고 그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기에 케일란이 서둘러 트리버의 뒤를 따라갔다.

트리버의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레이나였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꾸역꾸역 음식을 먹는 레이나에게 다가간 그가, 언제 남을 비웃었냐는 듯 무해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제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레이나, 나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자랐어. 도와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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