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76화
열렬히 공감한 레이나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단 듯이 노엘이 열심히 노를 저었다.
“서부는 그런 멍청한 편견 따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고 들은 것만 믿는 편이죠. 그러니 귀한 공녀님께 무엇이 되었든 전부 제공할 마음이 있습니다. 마물들을 해치워 주신 분께 그 정도는 보답해야 마땅하니까요.”
실제로 레이나가 어느 정도 마물을 없애 준 덕분에 병력을 움직여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아직도 마물과 씨름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 꽤 시일이 흘렀음에도 지금도 다른 영토에서 다수의 지원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그 부름에 생색을 내며 기사를 내줄 수도 있는 상태까지 회복한 참이었다. 레이나가 정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절대 강요는 아닙니다.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서부를 한번 구경 오시는 것 정도는 고려해 볼 만하지 않으신가요? 다들 공녀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를? 왜? 어떻게 알고?”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공녀님께서 새벽마다 나타나신 걸 본 사람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한두 번 오셨어야 모르는 척을 해 드리죠. 꽤 많은 사람이 공녀님을 보았습니다.”
……그치. 좀 많이 가긴 했지. 북부의 정리가 빨리 끝나서 한동안 계속 가긴 했으니까.
이런 상황인 줄 알았다면 괜히 피곤하게 새벽을 틈타 가지 말고 당당하게 낮에 가서 마음껏 도와줄걸.
물론 다들 숨어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예 안 갔을 테지만.
어쨌든 이렇게나 한번 와 달라고 하는데, 안 갈 이유는 없었다.
일단 한번 가 보고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나는 노엘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했기 때문이다.
“음. 뭐, 놀러 가는 것 정도는…….”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이게 과연 공작과 영애의 대화인가,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싶었지만, 노엘이 별말 없이 좋아하니 됐다 싶었다.
그럼 이제 식사도 거의 끝났으니, 디저트를 먹이고 돌려보낼 차례였다.
언제 서부에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묵을 것 같으니 미리 가져갈 짐을 챙겨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레이나가 미아에게 디저트를 가져와 달라고 말을 꺼냈다.
“미아! 과일 타르트 가져다줄래?”
“아, 후식이군요! 좋습니다. 그럼 후식을 먹고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응, 조심해서 잘 가.”
짧은 대화였으나 생각보다 더 친근감을 느껴서 그런지, 이제 반말이 조금 편했다.
정 불편하면 먼저 지적을 하겠지. 그럼 그때부터 미처 몰랐다며 충격을 받은 척 유교걸의 마음으로 살면 된다.
그나저나 아덴이 마법을 사용할 줄 아니, 둘이 손 꼭 붙잡고 이동석을 사용해서 왔으면 편하고 좋았을 텐데. 왜 굳이 마차를 타고 왔을까.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하하 웃은 노엘이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내뱉었기에.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당연히 공녀님도 함께 가셔야죠.”
“……뭐? 지금?”
지금 가자는 말이었어? 서부에? 이렇게 갑자기?
“네. 혹시 다른 일정이라도 있으신가요?”
진작에 아덴에게서 레이나의 일과를 자세히 설명받은 노엘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없는 거 다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어차피 맨날 놀고만 있을 테니 온 김에 같이 가자고.
‘그래서 마차를 타고 온 거였어? 내 짐도 싣고 가려고?’
나름 귀족 영애이니 짐이 많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좀 도와준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뒤늦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뭐가 필요해서 이렇게나 열심히 데려가려는 걸까.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서부에 갈 생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말 다른 일정이 없어서 한가했고, 자꾸 제대로 모신다니 슬슬 서부가 궁금해진 참이었다.
“알겠어. 가자. 짐 꾸릴 시간은 줄 거지?”
“그럼요. 얼마든지요.”
그리하여 레이나는 얼렁뚱땅 서부로 향하게 되었다.
주인이 갑자기 저택을 비우게 되었으니 좋아해야 마땅하거늘, 다들 섭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이고, 오늘 가시는 줄도 몰랐네요.”
오늘, 바로 지금 결정했으니까. 부인들이 어쩌면 좋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행용 부적이라도 만들어 왔을 텐데!”
“그러게요! 여행용 부적이 없으면 위험한 일에 빠질 수도 있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것은 레이나였다. 그녀에게 부인들의 염원이 담긴 부적까지 생긴다면, 위험에 빠지는 것은 도리어 이 세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가지고 올까요?!”
“아니, 괜찮아. 다들 진정해.”
레이나가 절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한편 뒤늦게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된 체이스는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 만약 서, 서부가 더 좋으시면 다신 북부에 오지 않으실 수도 있는 겁니까……?!”
“글쎄.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으면 그럴 수도.”
어지간하면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기에,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대충 한 말이었다.
하지만 체이스의 생각은 아니었다. 서부 공작이 이렇게 당일치기로 레이나를 냅다 데려가는 걸 보니, 그녀를 빼앗아 가기 위해서 서부에 이미 온갖 술수를 꾸며 놓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안 됩니다……! 공녀님께서 가 버리시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갈 생각일랑 전혀 없었지만, 만에 하나 서부로 이사 가게 된다면 집사 일가는 함께 가면 될 것이고, 농부 인력들은 지금처럼 심연의 저택에 출근하여 일하면 그만일 것이다.
어차피 레이나는 이곳에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존재였다. 지금도 매일 한량처럼 누워만 있으니, 가끔 찾아와서 진척 사항만 전달받으면 될 터.
그리고 사실 체이스는 여기서 삽질을 하며 이런 걸 물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윈터스노우 공작가의 기사였다. 지금 당장 공작 성으로 돌아가서 북부의 안전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때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기에는 질문 자체가 이상했다.
“몰라.”
알 바 아니라며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이자, 체이스가 청천벽력이라도 떨어진 듯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옆에서 케일란이 쓸데없이 깐족대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의 표정은 기대에 차 있었다.
“나는 괜찮아! 서부도 나쁘진 않지. 좀 건조하고 덥긴 한데, 남부만큼은 아니니까 참을 만하지. 옷을 얇게 입으면 되니까 충분히 살 만할 거야.”
그는 벌써 레이나를 따라서 서부로 이사라도 간 듯한 말투였다. 미아도 꽤 흥미로워했다.
“서부에는 극한 환경에서 자라는 희귀한 열매와 식물들이 많다고 하던데, 기회가 된다면 전부 음식에 사용해 보고 싶습니다.”
“어머나, 그럼 저도 기후에 맞게 새로운 스타일의 옷에 도전해 봐야겠어요. 공녀님께 어떤 게 잘 어울리시려나. 서부니까 얇지만 긴 스타일이 좋겠죠?”
아니, 그러니까 이사 갈 마음 없다고……. 다들 왜 그래요. 아직 출발도 안 했다고.
알아서들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까지 치는 상황에 레이나가 할 말을 잃었다.
그나마 트리버가 안 보이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걔는 왠지 막무가내로 따라붙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빨리 서부를 훑고 와서 다시 한량처럼 살며 안 간다는 의지를 손수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다녀올게. 나 보고 싶다고 울지는 말고.”
“으헝. 공녀님.”
“빨리 오셔야 해요, 흑흑.”
“누, 누가 운다고 그래!”
저택 식구들이 우는 시늉을 했다. 눈치, 코치도 없는 케일란만 빼고.
귀엽기도 하지. 픽 웃은 레이나는 대충 짐을 꾸리고 시끌벅적한 배웅을 받으며 서부로 떠나게 되었다.
*
서부까지 가는 동안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노엘이 그러고 보니 줄 것이 있다며 마차에 실려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한번 열어 보세요. 공녀님 거니까요.”
“내 거?”
출발부터 선물 공세야? 명성 빼곤 다 가진 여자라 딱히 필요 없는데.
라고 생각한 레이나가 은근히 기대하며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편지 봉투로 보이는 것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뭐야, 이게 다……?”
설마 뜬금없이 우체부라도 하라고 준 것은 아닐 테고, 아는 사람도 없는 자신에게 온 편지도 아닐 테고.
“서부의 아이들이 공녀님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
아이들이 왜? 설마 도와줘서 고맙다고?
그런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아 서둘러 편지를 하나 꺼내 읽어 보자,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루벨라이트 공녀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샌디라고 합니다. 서부에 살고 있어요!
공녀님이 마법으로 마물을 막 물리치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있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커서 공녀님처럼 멋진 마법사가 되어 마물들을 다 패 버리고 싶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서부에 자주 놀러 오세요!」
솔직히 별것 아닌 내용이었다. 그런데 왜 괜히 마음이 뿌듯해지고 간지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흠, 흠. 날이 차서 그런지 괜히 목이 답답하네.”
레이나가 헛기침을 했다. 샌디의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옆자리에 놓은 그녀는 홀린 듯 다음 편지를 열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