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79화 (79/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79화

“응. 이건 만취해서 봐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러는가 보다.’ 하는 게 티가 나.”

더는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피곤하니 이만 부탁을 들어주고 북부로 돌아가고 싶었다.

노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서부 던전을 없애 주셨으면 합니다.”

“서부 던전? 그 마물들이 득실거린다는 산맥?”

말이 던전이지, 사실 서부 던전은 커다란 하나의 산맥이었다.

지상과 지하 가릴 것 없이 모두 마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함정도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산맥 전체가 던전이다 보니, 너무 크고 넓어서 하나하나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성녀는 레벨 600에 던전에 들어가서, 레벨 800이 되어서야 나갈 수 있었다.

그만큼 마물이 많고, 강하고, 험난한 곳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레벨 800인 성녀가 그다음에 향하는 곳이 북부 미궁이었기에 지금의 레이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쉬운 곳이었지만.

“콜. 알겠어.”

너무 단박에 떨어진 승낙에 당황한 노엘이 눈을 끔뻑였다.

정말? 정말로 그 무시무시한 던전을 정리해 주겠다고?

북부 미궁을 해치웠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곳에는 북부 공작과 동행했다고 들었다.

때문에 아무리 그녀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거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최소한 망설이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단칼에 하겠다니. 놀란 노엘에게서 답이 없자 레이나가 혼자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괜히 아이들한테 편지를 쓰게 하거나, 이상한 노래를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저택이나 보석 같은 것도 마찬가지고.”

“그건 아닙니다. 제가 먼저 사람들에게 권한 것은 맞습니다만, 참가는 자유였습니다. 다들 진심으로 공녀님께 감사해한 거였어요. 제가 선물을 드리고 싶다고 했던 것도 진심이고요.”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그게 전부 부탁을 하기 위해서인 것만은 아니었다.

나서서 서부를 도와준 그녀에게 정말로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이들에게 편지 쓰기를 강요하거나, 웃게 만들 수 없다는 건 공녀님께서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들 진심이었습니다. 그건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뭐, 그건 그렇지.”

다 큰 어른이라면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하기 싫어하는 것을 시킨다는 건 던전을 없애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알아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러니 부디 제 선물도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아니, 정말 필요 없어. 며칠 전에 우리 애들 봐서 알겠지만, 내가 잠깐 서부 간다고 울었을 정도잖아. 걔들 나 없으면 못 살거든. 서부에 뭘 갖고 있어 봤자야.”

그 말에 노엘은 정말 사이가 좋아 보였던 레이나와 북부 사람들을 떠올렸다.

이미 레이나를 먼저 차지해 버린 사람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노엘은 순서가 밀린 뒤였다.

“그럼 저는 뭘 드려야 하죠? 던전은 그동안 우리 서부의 크나큰 난제였습니다. 금과 보석들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데, 던전 때문에 건들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던전이 자리한 산맥은 각종 희귀한 보석들이 어마어마하게 매장된 보물단지였다.

“그곳을 해결만 해 주신다면, 서부는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서부 자체의 성장은 물론이고, 사람들도 지금보다 더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겠죠. 그러니-”

뭐라도 받아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대충 뒷내용을 짐작한 레이나가 말을 끊어 버렸다.

“그걸로 됐어. 서부가 조금 더 나아져서 재밌어지면 놀러 올게. 그때 면박이나 주지 마. ……아! 그러고 보니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해.”

“무엇이죠?!”

드디어 무언가를 바란다는 레이나의 말에 노엘이 다급히 물었다. 뭐든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 설사 서부를 달라고 하더라도.

“반말 써 주면 안 돼?”

“……예?”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지금 우리 말하는 꼴이 영 웃기잖아. 사실 나 처음부터 엄청 신경 쓰였단 말이야.”

적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자신이 존댓말 하는 것은 이상하니 차라리 둘 다 반말을 하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동부 공작은 물론이고, 북부 공작과 대신관에게도 반말하고 있어서 나는 이제 와서 누군가에게 존댓말을 할 수가 없거든. 근데 그쪽이 계속 존댓말 쓰니까 기분이 좀 그랬어. 사실 지금도 좀 그래.”

“…….”

도대체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서 노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에 빠져 있던 그녀가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하하하하!”

진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지금까지도 계속 진심이었지만, 정말 어떻게 해서든 서부에 가둬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웃지. 머쓱해진 레이나가 뺨을 긁었다.

그러자 노엘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던전을 정리해 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

다음 날, 장거리 여행에 피곤했던 레이나는 정오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세수만 한 뒤 곧장 노엘을 찾았다.

“당장 던전 가자.”

“……지금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노엘이 당황하자, 레이나가 어깨를 풀며 답했다.

“응. 미궁도 이렇게 갔어.”

결국 소형 이동석만을 몇 개 챙긴 레이나가 노엘과 함께 서부 던전으로 향했다.

“진짜 엄청나게 크네. 음, 단번에는 무리일 수도 있겠는데?”

“……? 단번에요……?”

천 년 동안이나 서부를 괴롭혔던 던전을 앞에 두고 지금 무슨 말을…….

하냐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손을 뻗은 레이나가 거의 모든 마력을 사용하여 던전의 함정과 마물을 전부 없애라고 명령했다.

“사체 하나도 남기지 마.”

그와 동시에 레이나의 손끝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검은 불꽃이 뻗어 나갔다.

던전 입구에서부터 안쪽으로 빨려 들어간 불꽃은 순식간에 던전 전체를 활활 불태웠다.

키아아아악!

케에에에에에엑!

귀를 찢을 듯한 마물들의 비명이 산맥 전체를 울렸다.

쾅! 콰광! 쿠우우웅! 쿵!

연달아 발동되는 함정들의 소리가 서부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러다가 산맥이-아니, 서부가 무너져 내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생각보다 더 무시무시한 레이나의 능력에 노엘이 사색이 되어 한참이나 가슴을 졸이고 있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그에 레이나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불 켜.”

촤르르르르! 북부 미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던전 안에 은은한 빛이 가득 찼다.

“남은 마물이나 함정 있으면 마저 처리해.”

레이나가 다시 지시했다. 그러나 더 이상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게다가 상태 창까지 나타났다.

[서부 던전의 모든 마물을 해치워서 명성이 올랐습니다!]

[레이나 루벨라이트 Lv. 1,000]

체력 1,000

마력 2,000

매력 1,000

행운 1,000

평판 –1,000

명성 200

심지어 명성까지 올랐다. 정말 다 해결한 모양이었다.

‘명성만 높은 평판 나쁜 마왕이라니.’

여전히 끔찍한 평판에 아주 잠깐 미간을 찌푸린 레이나가 굳어 있는 노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끝났어.”

“……끝, 끝났다고요?”

그 던전이? 정말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빨리, 한 번에 던전의 모든 마물과 함정을 없애다니.

“응. 못 믿겠으면 한번 산책이라도 해 볼까?”

안으로 들어가자니. 절대로 알겠다고 해선 안 될 말이었지만, 노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던전 안으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들어가자마자 마물 떼가 몰려들고 함정이 쉴 새 없이 발동되어야 정상이거늘.

어째서인지 길목마다 이미 함정 발동이 끝난 뒤였고, 한 시간 동안이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됐지? 정말 없대도.”

던전을 단숨에 개박살 내 놓고, 겨우 한 시간 걸었다고 다리가 아파서 쉬고 싶다며 레이나가 벽에 몸을 기대었다.

드디어 던전이 안전하다는 걸 깨달은 노엘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 진짜 던전이 깨끗해졌다니……!”

울컥, 눈물이 터져 나왔다. 노엘이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던전 때문에, 던전만 없었다면 서부는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거라며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었는데.

이렇게 쉽게 마무리 지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기쁨이 차고 넘쳐서 눈물이 되어 흘렀다.

“공녀님은, 우리 모두의 은인입니다. 대대손손 절대로 공녀의 이름을 잊지 않게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루벨라이트 공녀.”

노엘이 넘치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