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80화
너무 진지하게 고맙다고 하니 레이나가 더는 참지 못하고 픽 웃었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쪽은 말려도 꼭 그럴 것 같네. 어차피 할 거라면 검은 마법이 반드시 유해한 것은 아니라고도 알려 줘.”
“네! 그럼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간신히 눈물을 그친 노엘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농담이었는데 당장이라도 역사책을 집필할 기세였기에 레이나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우리 반말하기로 하지 않았어? 나는 부탁 들어줬는데, 그쪽은 내 부탁 안 들어줄 거야?”
“아, 네. 아, 으응.”
노엘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제 보니 그녀는 반말이 어색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불편하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하, 은인에게 반말을 하려니 기분이 조금 그렇네.”
“내가 내내 그런 기분이었어. 나만 불편할 수야 없지. 노엘도 이제 좀 느껴 봐.”
“하하하!”
이번에는 진심이었는데, 노엘이 크게 웃었다. 정말 의도한 대로 반응하지 않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응. 알겠어. 정말 고마워. 나뿐만 아니라 서부 사람들 모두가 공녀의 위대한 업적을 알고 감사해할 수 있게 널리 알릴게.”
아니, 농담이라고…….
“그리고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해.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공녀를 도울 거야. 반드시.”
진심인 듯 노엘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괜찮아. 방금 봤겠지만 난 엄청나게 세. 던전 하나는 그냥 날려 버릴 정도야. 남의 목숨 같은 건 필요도 없고.”
왜 소중한 목숨을 쓸데없는 곳에 거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끼고 아껴서 서부 사람들을 위해 쓰지는 못할망정.
“그리고 나 사실 신탁이랍시고 날 모욕한 신전도 당장이라도 줘 패 버릴 수 있거든? 근데 그냥 안 하는 거야. 그럴 시간에 조용히 쉬면서 맛있는 걸 먹는 게 더 좋아서.”
‘줘 팬다.’라는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패는 것도 아니고, 정말 다 줘 팰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 말에 신전에 대한 노엘의 불신감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대체 왜, 무엇을 위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쉬고 싶어.”
생각에 빠진 노엘을 앞에 둔 레이나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소형 이동석을 찾았다.
그제야 노엘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작 성으로 귀환하자마자 레이나가 북부로 떠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렇게 위대한 일을 마쳐 놓고 그냥 돌아가다니.
“공녀! 잠깐만. 오늘 밤에도 연회를 열 예정인데 부디 참석해 주지 않겠어?”
“오늘 또? 어제도 했잖아. 이제 그만 돌아가서 애들 농사 잘 짓는지 확인해야 하고, 금고도 다 만들었는지 봐야 해.”
“아……. 그렇지만 꼭 좀 참석해 주면 안 될까? 꼭 공녀와 함께 건배하고 싶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이번 일이 알려진다면 필시 레이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바쁜 건 노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금 사람을 보내 함정을 확인하고, 던전의 구조를 알아내고, 산맥에 묻힌 금은보화를 캐내는 사업을 벌여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앞으로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었다.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공녀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걸 알리고 싶어. 끝나자마자 바로 이동석으로 돌려보내 줄게. 그러니 축배만이라도 같이 들어 줘. 응?”
그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연회를 준비할 시간도 별로 없으니 간소하게 금방 끝나겠지 싶었다.
“알겠어. 그럼 그렇게 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노엘과 함께 공작 성으로 돌아간 레이나는 다시금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씻겨지고, 꾸며지고, 입혀졌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하녀들은 레이나에게 더 찰떡같은 색을 골라서 꾸며 주었다.
‘나 행운 1,000인데, 왜 불안하지?’
이상하게 연회가 간소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예감은 100% 맞아떨어졌다.
*
“……이게 다 뭐야……?”
레이나가 공작 성 앞마당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연회에 참석한 인원이 족히 이삼천은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올려다보는 3층 테라스에 레이나와 노엘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건조한 서부의 바람이 당황한 레이나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너무 대대적이잖아……?”
“대대적이라니, 간소하게 성 주변 마을 사람들까지만 불렀는걸.”
작정하고 대대적으로 했다면 만백성을 다 모았을 법한 말투였다.
“……그래. 수천 명과 오붓하게 연회를 하다니, 정말 간소하고 좋네.”
레이나는 해탈했다. 서부 역사에 길이 남겨질 좋은 일이 생겼으니 그럴 만도 하다며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기에 다들 대체 무슨 일이냐며 수군거렸다.
‘설마 던전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던전이 있는 산맥 쪽에서 엄청난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왔었다.
부디 끔찍한 소식이 아니기를 바라며 모두가 노엘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테라스 끝에 선 노엘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다들 아까 들어서 알겠지만, 오늘 던전에 큰 사건이 발생했다.”
헉! 정말 던전에 무슨 일이 생겼구나!
결코 더 좋아질 리 없는 장소였기에, 각양각색의 좋지 못한 상황을 떠올린 모두가 큰 혼란에 빠졌다.
그에 사람들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린 노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바로 여기 계시는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녀님께서 서부 던전에 있는 모든 마물들을 해치워 주셨다.”
일순 정적이 일었다.
노엘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해 또박또박 말을 했음에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얼어붙은 사람들의 반응에 노엘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 위대한 마법을 사용하여 던전을 무력화시키셨다. 이제 우리는 서부 산맥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에서 울음기가 묻어났다. 뒤에서 듣고 있던 레이나가 괜히 먹먹해질 정도로.
“루벨라이트 공녀님 덕분에…… 드디어 왔다. 서부를 찬란하게 빛낼 새 역사가 쓰일 날이.”
도와주길 잘했다. 서부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게 보탬이 되어서 정말 기뻤다.
연회에 참석해 심금을 울리는 좋은 말을 듣게 되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던전이 무력화됐다고……?”
“마물을 다 죽였다고……? 함정도……?”
“그게, 말이 돼……?”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수군거렸다. 공작이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 걸 보면 진짜인 것 같은데, 현실성이 너무 떨어져서 곧장 이해되지 않았다.
노엘 역시 그러했기에 사람들의 반응을 당연하게 여기곤 말을 이었다.
“바로 여기 계신 분이 서부 던전의 마물들은 물론, 북부의 미궁도 없애 주신 루벨라이트 공녀님이다. 지난번 마물 사태 때도 먼저 나서서 서부를 도와주신 마음씨 고운 분이시지.”
노엘이 레이나에게 부디 한마디 해 달라며 손짓했다. 그녀가 머쓱해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음. 그렇기는 한데…… 우연히 지나가다가 도와준 거라 크게 신경 안 써도 돼. 나한테는 별일 아니거든. 그러니 다들 잘 지냈으면 좋겠어.”
새벽마다 나타난 그녀를 목격한 이들이 꽤 있었기에 드디어 사람들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로 서부 던전이 사라졌구나. 서부의 발전을 막고 있던 거대한 암 덩어리가 드디어 사라졌구나.
어쩐지 자신만의 공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레이나가 노엘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다들 감사를 하려면 나 말고 공작한테 해. 모두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무려 공작님께서 북부에 사는 한낱 영애한테 부탁하러 왔거든.”
설마 그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노엘이 눈을 크게 떴다.
“와아아! 공작님 만세!”
“공작님! 정말 감사합니다!”
“공녀님! 서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큰 함성을 내질렀다. 누군가는 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눈물은 곧 전염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 격려했다.
노엘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갔다. 레이나도 옮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서부로 와. 내가 잘해 줄게.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잘해 줄 자신이 있어. 공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공작의 자리까지 줄게. 진심이야.”
“됐어. 그만 권해. 나는 그냥 마력만 센 개차반 바보라고. 정치 같은 건 알지도 못한단 말이야. 그건 네 몫이지. 어렸을 때부터 숱한 교육을 받았을 거 아니야.”
이러다가 평생 서부를 주겠다고 따라다닐 것만 같았기에 레이나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나는 나한테 잘하는 사람보다 내가 잘해 주고 싶은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어. 너도 네가 잘해 주고 싶은 사람들 때문에 나한테 부탁하러 온 거였잖아? 그들을 지켜야지.”
레이나는 밑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맞는 말이었다. 노엘은 그들이 조금 더 잘 살았으면 해서, 아이들에게 서부를 자랑스럽게 소개할 날이 왔으면 해서 레이나를 찾은 것이었다.
“나도 내 저택을 지켜야 해. 이래 봬도 딸린 식구들이 많거든. 재배할 작물도 많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의 소박한 꿈에 공작이 알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울다가 웃으면……. 썩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데.’
장난을 치려다가 만 레이나가 그녀와 마주 보며 함께 웃었다. 꽤 괜찮은 친구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