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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82화 (82/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82화

그녀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북부의 공작 성이었다. 최근 들어 방문할 일이 많았기에 술김에 착각한 것이었다.

갑자기 공작 성 정문에 나타난 레이나에, 화들짝 놀란 기사들이 서둘러 로스틴을 불렀다.

그사이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깬 레이나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에 눈살을 찌푸렸다.

“……로스티인?”

네가 왜 우리 집에? 레이나는 아직도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본인이 쳐들어와 놓고, 이 야심한 시각에 얘가 왜 남의 집에 있나 싶었다.

“뭐야아, 설마 나 기다렸어어……?”

그래서 저택에 와 있던 거야?

착각해서 묻자, 그제야 로스틴은 레이나가 술에 취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그래, 언제 오나 기다렸어.”

때문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가 레이나의 등을 오른팔로 받쳤다.

강한 힘으로 부축하자 편했는지, 레이나가 축 늘어지며 그의 팔과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왔기에 이렇게나 꾸민 거지? 오늘도 공녀 혼자 너무 꾸민 거 알고 있나?”

지난 축제를 떠올리게 만드는 물음에 레이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서부 공작 성에서 내내 그랬는걸.

우습지만 이제는 혼자서 수컷 공작새처럼 꾸미고 있는 것이 익숙할 정도였다.

다음 축제 때도 혼자 실컷 꾸미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런데 정말 얘는 여기 왜 온 거지?’

레이나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스틴이 말을 이었다.

“서부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마음에 들면 그곳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서부 공작이 아주 단단히 작정하고 왔었다며, 체이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열변을 토했다.

서부로 떠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소식 하나 없어 로스틴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여나 정말 그녀가 북부를 떠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진짜 레이나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에게 홀려 옆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그 말을 하려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한 건 아니겠지.’

그리 생각하자 로스틴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그가 여전히 말이 없는 레이나에게 주절주절 말했다.

“공녀, 서부로 가지 않으면 안 돼? 서부의 공작이 무슨 제안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더 잘할 자신이 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말만 해. 전부 들어줄 테니.”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서부 공작보다 내가 더 돈이 많다. 그녀와는 다르게 나는 보석 광산도 여러 개 가지고 있고. 혹 재산세가 문제라면, 내지 않아도 돼. 그냥 살아. 아니, 대대손손 모든 세금을 물리지 않도록 할 테니…… 부디 서부로 가지 말고 북부에서 살아 줬으면 한다.”

구구절절 이야기해 놓고 보니 그런 자신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안 하느니만 못한 매력 어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붙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뭐라도 말을 해 봐야지. 그래야 레이나가 북부를 안 떠나지. 개중에는 하나 얻어걸리겠지.

“재산세……?”

다행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재산세’가 몽롱해지는 레이나의 정신을 번쩍 들도록 만들었다.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두 번 실수했다간 저택을 다시 뺏길 수도 있기에 늘 마음속 어딘가가 불안했던 것이다.

반쯤 술이 깬 그녀가 최대한 또박또박 되물었다.

“진짜, 안 내도 돼?”

“그래, 안 내도 돼. 그러니까 평생 여기서 살아.”

뭐든 다 해 주겠다고 했는데, 고작해야 재산세를 안 내도 되냐는 말을 할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는 로스틴이었으나, 어쩐지 너무 레이나다운 반응이라서 그저 웃음만 나왔다.

“응, 그거. 그거 좋다. 그거 하자.”

퍽 마음에 들었는지 레이나가 활짝 웃었다. 늘 어딘가 도도했던 웃음과는 전혀 다른 순진무구한 미소였다.

그에 로스틴은 잠시 홀린 듯 레이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레이나 역시 그런 로스틴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눈빛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먼저 침묵을 깬 이는 로스틴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확답을 받고 싶었던 그가 레이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서부에는 가지 않는 건가?”

“응, 이사 안 가. 놀러는 갈지도. 서부 던전의 마물들을 없애서 이제부터 발전할 거라고 했거든.”

“……서부 던전의 마물들을 없앴다고……?”

누가? 라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북부의 미궁을 해결했던 것처럼, 그녀가 서부 던전도 해결한 것이겠지.

그제야 로스틴은 서부 공작이 왜 레이나를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북부 미궁의 소식을 듣고 서부 던전을 부탁하려고 찾아왔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서부 공작이 꽤 많은 보상을 제안했을 텐데, 그래도 북부를 떠나지 않겠다니.

뜻밖의 결론에 다다른 그의 심장이 다소 빠르게 뛰었다.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겠지만, 그중에 아주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이나가 서부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이었으면 하는 마음만큼은 확실했다.

퍽 복잡한 심경의 로스틴과는 달리, 마음의 안정을 찾아 다시 술기운이 몰려온 레이나가 그사이 쿠울 잠에 빠졌다.

“공작님, 공녀님을 저택까지 모실까요?”

근방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기사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갑작스러운 손님을 집에 모셔다 드리는 것 정도는 기사인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아니,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성에서 재우고, 내일 아침에 데려다주겠다.”

다소 늦은 밤이긴 했지만 아직 충분히 데려다줄 수 있는 시간과 거리였고, 내일 아침에는 레이나 혼자서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으나, 로스틴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기사가 뭔가 깨달은 듯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예. 그럼 제가 서둘러 손님방을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부탁하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사가 쏜살같이 공작 성 내부로 달려갔다.

*

세계 4대 악몽 중 하나인 서부 던전을 없앤 것도 모자라, 술을 진탕 마신 레이나는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다행히 숙취는 없었으나, 기억도 일부 없었다.

아니, 없어질 거면 다 없어질 것이지. 왜 몇 개는 기억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목적지까지 잘 도착해 놓고, 갑자기 공작 성으로 간 건데……?

심지어 손과 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소멸할 것 같은 말투로 로스틴과 대화까지 나누었다.

그중에는 재산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몹시 흡족한 내용도 있었기에,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 어젯밤에 나눈 대화를 문서로 작성하자고 해야 마땅하거늘.

‘그럼 내가 어제 부렸던 술주정과 추태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셈이잖아……!’

으아아아! 레이나가 주먹에 온 힘을 실어 베개를 때렸다.

그러자 ‘펑-!’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베개가 터지며 속에 있던 오리털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어머나! 공녀님?!”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큰 소리에 당연하게도 사람들이 몰려왔다. 레이나는 갑자기 저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어색하게 웃은 그녀가 빨갛게 달아오르려는 뺨에 힘을 주어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괜찮아, 잠결에 그만…… 발로 차 버렸어.”

주먹으로 때렸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에 몹시 다행히도 다들 그랬냐며 따뜻한 물과 안정제 등등을 가져왔다.

“세숫물도 가져오겠습니다.”

“식사도 가져올까요?”

“공녀님께서 디저트를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주방장이 새벽부터 고심하여 만든 디저트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으응, 부탁해.”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냥 모르는 척 빨리 집에 가서 찬물에 세수나 하고 싶은데, 자꾸 다들 뭘 준비했다며 이것저것 가져오고 난리였다.

‘……고심했다더니 맛은 있네.’

미아만큼의 실력자는 아니지만, 공작 성의 요리사도 상당한 손재주가 있었다.

달콤한 밀푀유를 세 접시째 비운 레이나가 이제 진짜 진짜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포크를 내려놓았을 때였다.

“공녀, 일어났나?”

레이나의 추태를 함께 나눈 로스틴이 나타났다.

‘그래, 왜 네가 안 오나 했지.’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젯밤에 많이 취해 있던 그녀를 배려하여 늦게 찾아온 듯했다.

“어제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로스틴이 어젯밤을 들먹이자, 레이나가 쾅! 테이블을 내리치며 반박했다.

그녀의 표정이 퍽 간절했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으나, 그러냐며 로스틴이 맞은편에 앉았다.

“어젯밤에 재산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는 공녀에게서 세금을 받지 않기로 약속하였지.”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것은 입에 담지도 않고, 로스틴이 핵심만 설명했다.

“공녀께서 북부에 공헌한 사안이 많아 진작 고려되었어야 할 문제였다. 이제라도 논의되어 다행이야. 오늘부터 공녀께선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아니, 왜 안 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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