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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83화 (83/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83화

레이나가 눈을 끔뻑였다. 최소한 민폐였다고는 말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로스틴은 어제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만행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때문에 레이나가 저도 모르게 먼저 자신의 추태를 입에 담았다.

“나, 어제 이상한 행동 안 했어?”

묻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가 되었으나, 그보다도 빨리 로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목적지를 잘못 찾아온 것을 제외하면 말이야.”

정말 없어서 이러는 거야,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모르는 척 넘어가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정말 그러니 이상하게도 의문이 수치를 이겼다.

“아니, 나 어제 좀 취해서 막, 말투도 좀 그랬잖아…….”

아오씨, 괜히 말했네. 막상 직설적으로 묻자 수치스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별로 그렇지 않았는데. 말투는 조금 귀여워지긴 했었지만.”

“……귀엽다고? 그게?”

손발의 유무를 확인해야 했을 그 말투가?

“설마 그런 취향이야?”

“유아 퇴행적인 말투를 쓰는 사람이 취향이냐고 묻는 것이라면, 결단코 아니라고 대답하지.”

로스틴이 정색하며 빠르게 말했다.

뭔가 실수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데, 그가 다시 변명을 덧붙였다.

“그저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보여 준 공녀가 귀여웠을 뿐이야.”

“……아하.”

그렇구나.

‘내, 내가 귀여웠다니. 무, 무슨 그런 말을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하지?’

어젯밤의 추태를 떠올렸을 때보다 더 부끄러워진 레이나가 괜히 포크로 접시를 쑤셨다.

자신은 무시무시한 사람이니까 귀엽다는 말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민망한 마음에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를 지척에서 지켜보던 하인들만이 올라가는 광대와 씰룩대는 입술을 애써 진정시키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어쨌든 이상한 행동은 없었으니 안심하기를. 공녀께서 가져온 술병도 잘 보관 중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서 무사 귀환을 알리고 쉬어야만 했다.

“아! 맞아, 술! 맛있어서 사람들이랑 같이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챙겨 줘서 고마워. 빨리 돌아가서 다 같이 마셔야겠다. 소형 이동석 하나만 빌려줄래? 금방 갚을게.”

그제야 멀쩡해진 레이나의 부탁에 하인이 서둘러 소형 이동석과 술병을 가져왔다.

“다음에 또 봐. 귀찮게 해서 미안했고, 고마웠어. 잘 있어!”

이윽고 그녀가 고마웠다는 인사를 남기곤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엉겁결에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한 로스틴이 스르륵 손을 내리며 혼잣말했다.

“……왜 난 초대해 주지 않는 거지.”

방금 전까지 몹시 기분이 좋았는데, 갑자기 서운함이 밀려왔다.

*

멀쩡히 돌아온 레이나에 저택 식구들이 그녀의 귀환을 환영했다.

“공녀님!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아이고, 공녀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야! 너 뭘 하다가 이렇게 늦게 온 건데! 이상한 놈만 먼저 돌아오고!”

“……이상한 놈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것이 바로 네놈이거늘. 난 소정의 임무를 마쳤을 뿐이다.”

“하하! 저는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공작 성이 시끌시끌했거든요. 아무튼 무사 귀환 축하드립니다, 공녀님.”

“야! 그럼 출근하자마자 말을 했어야지!”

“굳이?”

귀가 떨어질 듯 시끌벅적한 것을 보니 이제야 진짜 집에 돌아왔구나 싶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트리버가 레이나를 제 품에 폭 안았다.

“레이나, 갑자기 말도 없이 가서 깜짝 놀랐어. 서부까지 쫓아가려 했는데, 그러면 레이나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어.”

“으음, 잘했어.”

빈말로 칭찬을 건네니 트리버가 더더욱 레이나를 꼭 안았다.

정말 보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는 듯.

아무튼 다들 모여 있었다. 막 일을 끝마친 에일린과 인부들도 함께였다.

어째서인지 아덴도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었지만, 마침 잘되었다 싶어진 레이나가 술병을 들고 흔들었다.

“기념품 가져왔어. 서부 특산품이래. 모킹이라는 열매로 만든 술이라는데, 맛있어서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어.”

“어어? 설마 모킹주 말씀이십니까?!”

제일 먼저 미아가 반응했다. 모킹주라는 말에 뒤를 이어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모킹주요?!”

“그거 엄청 비싼 거 아닙니까?”

체이스가 눈을 빛냈다. 귀족이 아닌 이상 쉽게 접할 수 없는 술이었기에 벌써 기대가 된다는 듯.

“그렇지만 한 병밖에 없는데, 두었다가 공녀님께서 식후에 드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이내 이성을 차린 그가 정상적인 제안을 했다.

이에 레이나가 작게 웃었다.

“괜찮아. 서부 공작이 한 상자 더 보내 주기로 했어. 내가 서부 던전을 없애 줬거든.”

“……예?”

“무, 무엇이요……?”

“서부 던전?! 제국 4대 악몽?!”

왜 그런 중요한 일을 술 얘기 뒤에 대충 가져다가 붙이는 건데!

더는 놀랍지도 않았다. 아니, 놀라운데 진짜냐고 물으며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하루아침에 북부 미궁을 해치우고, 이번 마물 소동 때 나타난 수많은 마물까지 단번에 없앤 레이나였다.

갑자기 서부에 놀러 간다고 하더니, 서부 던전을 처리하고 왔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서부 공작이 뜬금없이 널 왜 찾아왔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군.”

“겸사겸사였어. 이번에 나타났던 마물을 좀 없애 줬더니 고맙다고 하더라고.”

“……아니, 그건 또 언제 한 건데?”

반사적으로 물은 케일란이 손을 내저었다.

“아냐, 됐어. 이제 네가 내일 황제가 된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련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해탈했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레이나도 뭘 말할 때마다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이 슬슬 귀찮아진 참이었다.

그녀가 어서 술이나 마시자며 모두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공녀님이 오신다고 해서 마침 디저트를 잔뜩 만들어 놓은 참이었습니다.”

다행히 안주까지 잘 구비된 상태였다. 재빨리 세팅을 마치고 각자 술잔까지 든 사람들이 말없이 레이나를 응시했다.

건배사를 하라는 뜻이었다.

“으음, 세계 평화를 위하여?”

아이러니한 건배사였지만, 딱 레이나다운 건배사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공녀님! 잘 돌아오셨어요!”

“앞으로 어디 멀리 가지 마세요.”

그건 레이나가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한적하게, 유유자적 살아가는 것이 일생일대의 소망이었다.

인원이 꽤 되는 탓에 모킹주를 반 잔씩밖에 마시지 못한 사람들이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왜 비싼지 알겠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상큼하고 무게감이 있는데도 뒷맛이 깔끔하니, 조금 더 마시고 싶어지네요. 아쉬움이 남습니다.”

체이스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 역시 어젯밤에 몇 병이나 마신 바가 있었기에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미아의 디저트만큼은 아니야. 서부에 있는 내내 얼마나 그리웠다고. 술은 조만간 또 올 테니 그때 다시 마시자.”

“예!”

“그럼요!”

“미아 최고!”

다시금 웃음을 되찾은 모두가 미아의 디저트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쿠궁!

저택 앞마당에서 무언가가 쿵! 떨어지는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설마 또 마물이 나타난 건 아니겠지?!”

요즘 들어 마물이 너무 자주 나타나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놀란 사람들이 헐레벌떡 밖으로 달려 나갔다.

레이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물이라면 제일 먼저 도착하여 없애야 했기에 그녀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

“응……?”

그러나 다행히도 앞마당에 떨어진 건 마물이나 침입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거, 마차 아닙니까? 그것도 세 대나…….”

어째서인지 커다란 짐마차가 세 대나 놓여 있었다. 마법으로 보낸 듯, 마차를 끄는 말이나 마부는 없었다.

“아, 뭔데! 왜 안 열어 봐!”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케일란이 냅다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고급스러운 상자가 빼곡하게 실려 있었다. 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모킹주」

“모킹주라고?! 설마 이게 전부 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전부 모킹주였다. 모킹주가 마차 세 대에 꽉꽉 채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일 년은 매일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만 마셔도 될 판이었다.

상자들 사이에서 신디가 화려한 봉투에 감싸진 편지 한 장을 찾아냈다.

“어머나! 여기 편지가 있어요!”

레이나의 앞으로 온 편지였다. 보낸 이는 누군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친애하는 루벨라이트 공녀께.

보내 주기로 약속했던 모킹주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조금 더 보내. 내 마음이니 거절은 거절하도록 하겠어.

조만간 또 보낼게. 네가 잘해 주고 싶다던 사람들과 함께 마셔.

추신, 북부 공작은 주지 마.

친우 노엘 테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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